43돌 5·18민주화운동을 맞아 기아문화재지킴이 세번째 오월 사적지 탐방하다

"시대를 초월하는 오월의 정신을, 세대가 함께하는 오늘의 정의로!"
5·18민주화운동을 추모하는 마음을 담아 횃불 코스 탐방

김오현 시민기자 승인 2023.05.30 13:46 의견 0

2021년 오월길 탐방때 시민군 최후의 항쟁지 "옛 전남도청" 앞 단체사진


어제 아침부터 비가 오락가락하다 보니 5.18 사적지 탐방에 몇 분이나 참석할지 걱정이 되어 내 정신도 오락가락하는 느낌으로 아내와 함께 3번 좌석버스를 타고 전남대학교 정문으로 향했다. 모처럼 찾아온 연휴에 남들은 꽃구경이나 해외여행 가는데 내가 무슨 청승으로 5.18 사적지 탐방을 기획하고 추진했는지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1980년 5월 18일 그날 "불의에 항거하여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민주화 운동을 하신 광주시민과 학생들"을 생각하면 조금은 한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더욱더 힘찬 걸음으로 5월 그날의 아픔을 느껴보고 민주주의의 소중한 가치를 기억하기 위해 5.18 사적지 1호인 횃불 코스(전남대학교정문)를 15명의 회원님과 같이 탐방했다.

● 일시 : 05월28일(일) 오전 9시-12시(3시간)

● 5·18기념재단 오월길 안내해설사(박미경)

● 집결 장소 : 전남대 정문 '민주공원'

● 횃불 코스 : 전남대 내 정의의 길과 광주역 광장,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옛터

▪ 의 미 : 항쟁의 불씨가 도심으로 번져가던 길

▪ 총 거리 : 약 6km

▪ 소요시간 : 약 3시간 예정

🔘 정의의 길(1.7km)

정의의 길은 전남대학교 민주화 운동의 역사와 오월 정신의 역사성을 종합하는 상징적인 길로 5·18민주항쟁 최초의 발원지인 정문에서 박관현 언덕, 윤상원 숲, 김남주 뜰, 교육지표 마당, 벽화마당, 5·18 광장, 박승희 정원 등이 집중돼 있다.

전남대학교 민주화 운동의 역사와 오월정신의 역사성을 종합하는 상징적인 길의 안내도

▶ 전남대학교 정문(제1호 5·18 민주화운동의 시작점!)

전남대 정문은 개교 이래 보다 나은 세상을 꿈꾸었던 학생들이 함께 민주화를 외쳤던 장소이며, 무엇보다 5·18민중항쟁이 시작된 곳이다.

1980년 5월 17일 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되고, 군인들이 전남대를 장악하자 18일 오전 10시, 박관현 총학생회장과의 약속을 기억하는 학생들이 정문 앞에 모여들었다. 학생들은 학교 출입을 막는 계엄군과 충돌했으며, 이후 금남로로 진출해 시민들과 함께 시위를 벌이면서 민중항쟁이 시작된다. 이후에도 정문은 민주화를 열망하는 학생들과 이를 저지하려는 국가권력이 충돌했던 곳으로, 민주 · 인권 · 평화의 상징적 장소가 되었다.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에 찬란히 빛나는 학생들의 저항정신을 기리기 위해 광주광역시는 1999년 사적 제1호로 ‘5·18 소공원’을 조성했고, 전남대는 2016년 ‘민주공원’을 마련하였다.

보다 나은 세상을 꿈꾸었던 학생들이 함께 민주화를 외쳤던 전남대학교 정문 사적지 앞에서...

▶ 박관현 언덕(민주화의 새벽 기관차)

박관현은 신군부의 반인권적 폭력에 죽음으로 저항했던 민주열사이다.

1978년 전남대 법대에 입학한 그는 사회조사연구회 부회장과 들불야학의 강학으로 활동하며 학생운동의 길에 들어선다. 1980년 4월 학우들의 압도적인 지지로 총학생회장에 당선된 박관현은 탁월한 연설과 지도력으로 민족민주화성회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는데, 이는 5·18민중항쟁의 직접적인 동력이 되었다. 5월 17일 수배령이 내려져 도피생활을 하던 박관현은 1982년 4월 체포되어 광주교도소에 수감 된다. 이후 ‘5·18 진상규명과 재소자 처우 개선’을 위해 50일간의 단식투쟁을 벌이다 1982년 10월 12일, 30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전남대는 그의 치열한 저항정신을 기리기 위해 1989년 법대 앞에 혁명정신 계승비를 세우고, 2020년 ‘박관현 언덕’을 조성하였다.

박관현 열사의 희생이 주는 깊은 울림을 전하기 위하여 물결을 형상화하여 언덕을 조성하였으며, 굳은 의지를 표현하고자 자연석과 장대석을 사용했다.

신군부의 반인권적 폭력에 죽음으로 저항하던 민주열사 박관현 언덕에서...

윤상원 숲(오월 광주의 영원한 대변인)

윤상원은 5·18민중항쟁 당시 도청에서 최후까지 민주주의를 사수했던 시민군이다.

전남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윤상원은 안정된 직장을 버리고 한국 사회의 불의와 모순을 개혁하기 위해 운동가의 길을 걷는다. 1978년부터 들불야학의 강학으로 활동했으며, 노동운동에 투신하였다. 5·18 당시 윤상원은 광주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투사회보’를 제작·유포하였고, 새로운 항쟁지도부의 대변인으로 활동하다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의 총격에 31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전남대는 ‘진실된 삶, 정의로운 사회,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윤상원 열사를 기리기 위해 2007년 사회대 앞에 그의 흉상과 비석을 세웠고, 2019년 윤상원열사기념홀을 건립하였으며, 2020년 ‘윤상원 숲’을 조성했다.

‘님을 위한 정원’으로도 불리며 윤상원 열사에 대한 기념이 아닌 ‘기억’을 통해 당시의 윤상원 열사를 위로하고자 조성했으며 윤상원 열사의 흉상의 시선 방향으로 중심축을 선정하였다.

오월 광주의 영원한 대변인 윤상원 숲 앞에서 열변을 토하는 박미경 오월지기

5.18민중항쟁을 형상화한 유일한 벽화 앞에서...

🔘 광주역 광장(제2호 분노의 방아쇠가 당겨졌다)

광주역 일대는 차량과 사람의 왕래가 많은 공간이며, 시위대의 중요한 이동로였다. 이는 전남대학교 학생들이 5월 14∼16일 도심으로 행진하고 귀교할 때 광주역 광장을 경유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5월 18일 전남대학교 정문에서 사건이 발생한 이후에도 학생들은 광주역 광장을 경유해서 금남로로 가서 시민들에게 비극을 전했다.

광주역의 경계를 맡은 계엄군은 제3공수여단 제16대대였다. 20일 저녁 무등경기장에서 출발한 차량 시위대의 일부가 광주역을 경유해서 금남로로 진행하자, 곧바로 제16대대가 배치되었다. 제3공수여단 제12대대와 제15대대가 지원하여 시위대를 진압하려 했으나,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작전처는 지프와 트럭에 실탄을 싣고 광주역으로 이송하려 했다. 이들 차량이 전남대학교를 나서자 시위대가 이동을 방해했다. 계엄군은 이들에게 발포하는 등 진로를 확보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공식 문서에는 이에 관한 희생자가 언급되고 있지 않으나, 병원 기록 등에는 사망자와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했던 것으로 남아 있다. 더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것은 21일 새벽 2시 20분경부터 제3공수여단이 전남대학교로 철수를 완료하기까지였다.

제3공수여단이 철수한 뒤 광주역 일대는 처참한 광경을 드러냈다. 시민들은 광주역 광장에서 시신 2구를 발견하고, 손수레에 실어 금남로를 따라 전남도청으로 나아갔다. 손수레에 실린 2구의 시신은 허봉(26세, 이발사, 자상)과 김재화(26세, 회사원, 총상)이었다. 시신을 본 시민들은 계엄군의 만행에 격분했다. 계엄군은 자신들이 그런 것이 아니고, 간첩의 소행이라고 둘러댔다. 돌이켜보면, 이 사건은 21일 오후 금남로와 전남도청 일대에서 대규모 학살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분노의 방아쇠, 당겨지게 한 광주역 광장 오월사적지 앞에서...

🔘 구 시외버스터미널(제3호 계엄군의 만행, 일파만파로 퍼지다)

시외버스공용터미널은 광주역과 마찬가지로 사람과 차량의 왕래가 많은 곳이었다. 시외버스공용터미널은 각지에서 사람들이 모여들거나 흩어지는 주요 거점이었다. 그리고 시외버스공용터미널 일대의 도로망은 광주역, 금남로 등과 연결되어 시위대의 중요한 이동로였고, 시외버스공용터미널 광장은 집회를 열기에 좋았다. 시외버스공용터미널에서 금남로 4가는 지척이었기에 종종 이곳에서 시위 대열이 형성되곤 했다.

시외버스공용터미널 일대의 사건들은 5월 18일 오후에서 20일 사이에 주로 발생했다. 5월 18일에는 제7공수여단 제33대대가 진압 작전을 전개했는데, 지나가는 시내버스를 검문하여 학생으로 보이면 하차시키고, 저항하면 집단으로 폭행을 가했다. 이를 만류하던 안내원과 노인 등에게도 진압봉을 휘둘렀다. 오후에는 시외버스공용터미널에서 시위대와 계엄군 사이에 대규모 충돌이 발생했다.

19일에는 제11공수여단 제61대대가 시외버스공용터미널 일대를 담당했는데, 광주 소방서를 거점으로 삼았다. 계엄군은 시외버스공용터미널 방면에서 시민들이 항거하거나 시위대가 형성되면 즉시 출동했다. 계엄군은 장갑차를 이용해 시위대를 분산시키고, 병력을 투입하여 최루탄과 진압봉으로 구타 및 연행했다. 계엄군은 시위대를 찾는다며 시외버스공용터미널 지하도는 물론 터미널 내부에까지 들어가 무차별적으로 폭행했다.

계엄군은 대검도 사용하여 자상을 입은 부상자들이 여럿 발생했으며, 부상자를 병원으로 후송하던 택시도 공격했다. 19일의 시위는 밤 8시경에 종료되었다.

20일에는 제3공수여단 제13대대가 시외버스공용터미널에서 진압 작전을 폈다. 광주 전역으로 시위가 확대되면서 계엄군도 여러 장소에 분산 배치되었다. 이들은 밤 10시경 하달된 제3공수 여단장의 지시에 따라 광주역으로 합류했다. 계엄군이 시외버스공용터미널에서 자행한 만행을 목격한 사람들은 전라남도와 인근지역에 소식을 전파했다.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시외버스는 20일 밤까지 운행되었다. 21일부터는 극히 일부 지역에 버스가 운행되었고, 22일부터는 완전히 운행이 중단되었다.

현재는 시외버스터미널이 광천동 유스퀘어 광주 버스터미널로 이전하였고, 해당 부지에는 광주은행 본점과 롯데백화점 광주점이 들어서 있다.

계엄군의 만행, 일파만로 퍼지는 구 시외버스 터미널 오월사적지 앞에서...

2020년 오월사적지 탐방때 민주주의의 꽃, 민주광장 시계탑에서 단체사진

2021년 오월사적지 탐방때 시민군 편성지 광주공원 광장계단에서 단체사진(사진촬영 오현)

■ 참고문현

1. 5.18기념재단, [광주의 오월을 걷자], 전남대학교 문화전문대학원 장소마케팅

연구센터, 2017.

2. 광주전남추모연대 교육팀, [5.18 민중항쟁 안내 해설가이드북], 5.18민중항쟁

기념행사위원회,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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