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우식 칼럼] 민비 (명성황후) 사진 진위 논란과 검토 (2)

민비 사진의 종류, 사진 기술, 각종 논란, 풀어야 할 숙제

편집국 승인 2023.11.08 10:38 | 최종 수정 2023.11.09 15:07 의견 0

민비 사진의 종류

지금까지 민비(閔妃) 또는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사진이라고 소개되거나 주장된 사진은 수없이 많지만, 대부분은 4종류의 원화를 바탕으로 변형되어 소개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원화에 가까운 것으로 추정되는 4종류의 사진과 그 사진들의 대표적인 소개 사례를 정리해 보았다. 앞으로 이어질 연재에서 소개하는 사진들과 사진의 해석에 있어서 기준점으로 삼으면 전체적인 맥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사진 기술이 보급되기 시작한 것이 민비가 생존했던 19세기 중반 (1860년대 이후)의 일이라는 점과 더불어 사진을 인쇄 매체를 통하여 소개하려면 사진 또는 그림의 인쇄 기술의 확립이 선행되어 있어야 했지만, 당시의 기술적 수준으로는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다는 점을 참작하여 문제에 접근해 갈 필요가 있다. 그 당시에는 사진이 있다고 해서 지금처럼 바로 사진을 인쇄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역사적 실체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기술적 수준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해석이 필요하다.

명성황후로 추정되었던 사진 A (1910년에 출판된 이승만의 독립정신 초판에 소개된 사진의 원화로 추정되는 사진)

명성황후로 추정되었던 사진 B (1894년에 영국의 The Illustrated London News에 Attendant on the King of Corea (조선 왕의 시녀)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사진)

명성황후로 추정되었던 사진 C (1906년에 미국의 Homer B. Hulbert가 출판한 The Passing of Korea (대한제국 멸망사)에 A Palace-Woman in Full Regalia (정장한 궁중 여인)으로 소개된 사진)

원로 사학자들에 의하여 명성황후의 모습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사진으로 1977년부터 국사 교과서에도 실렸으나 비교적 근래에 부정론이 일어나면서 국사 교과서에서도 실리지 않게 되었다.

명성황후로 추정되었던 사진 D (2007년에 운현궁에서 발견된 족자 형태의 두건을 쓴 여인의 초상화로 뒷면에 민씨부인(閔氏婦人)이라는 글이 적혀있어 명성황후의 초상화라는 주장이 제기된 사진)

사진 기술의 발전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의 전환)

지금은 디지털카메라 또는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촬영해서 사진의 구도나 화질을 화면상에서 그 자리에서 확인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마음에 들 때까지 다시 촬영할 수도 있다. 촬영된 사진을 바로 전송하거나 공유도 할 수 있고 사진의 전체 또는 일부를 편집하여 저장할 수도 있다. 어린이들까지도 옛날의 전문 사진사들보다 더 익숙하게 사진을 다룰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디지털 사진은 전자산업 발전의 성과이며 1951년 경애 초기의 이미지 센서의 개발이 이루어진 것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전자적으로 촬영된 모든 이미지는 디지털 정보화될 수 있다. 1970년 4월에 CCD(Charge-Coupled Device, 전하결합소자) 이미지 센서의 개발과 시연이 이루어지면서 반도체 산업의 비약적인 발전과 더불어 디지털 사진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최초의 소비자용 디지털카메라는 1990년대 후반에 출시되었으며 사진을 다루는 전문가들이 필름을 사용한 촬영-현상-인화의 과정이 있어야 하는 기존의 방식보다 더 빠르게 처리할 수 있는 장점이 있는 디지털 사진 기술로의 전환이 이루어져 왔다. 반도체 생산 기술의 발전으로 사진의 화질과 해상도의 개선이 이루어진 결과이다. 2000년경부터는 디지털카메라가 통신 기능을 가진 휴대폰과 통합되는 방향으로 기술적인 변화가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기술 혁신의 결과, 휴대폰 카메라는 소셜 미디어 및 이메일과의 연결성으로 인해 매우 빠른 속도로 전 세계적으로 보급되었다. 바늘구멍 사진기와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촬영하고 현상, 인화까지 직접 해야 했으면서도 디지털 이미지 센서의 개발에도 관여했던 반도체 공학자인 필자에게는 격세지감으로 느껴진다.

참고로 본 칼럼에 소개하는 사진은 모두 아날로그적인 사진 또는 초상화를 디지털 이미지로 변환한 것이며 이 칼럼을 컴퓨터나 스마트폰 화면으로 읽게 되는 독자들은 아날로그 이미지와 디지털 이미지의 차이를 인식하거나 구별할 필요 없이 그림이나 문자 이미지에 의한 시각적인 자극을 통해서 필요한 정보를 추출하여 이미지가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각자의 관점에서 이해하며 활용하는 것이다. 같은 내용의 정보를 접하더라도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 될 수밖에 없다.

사진과 초상화 부재설

명성황후의 사진으로 추정되던 것들이 전부 부정되면서 명성황후는 살면서 어떠한 사진도 촬영한 적이 없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조선시대 왕비의 초상화가 한 장도 전해지는 것이 없으므로 왕비의 초상화는 그리지 않는 것이 관례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명성황후의 생애를 고려하면 초상화나 사진은 없을 것이라고 하는 설도 논리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에 고종을 비롯하여 많은 왕실 인사들의 사진이 촬영되었고 중전은 아니지만 비슷한 시기의 고종의 후궁이며 영친왕(英親王) 의민태자 이은(懿愍太子 李垠, 1897년 10월 20일 - 1970년 5월 1일)의 생모인 순헌황귀비 엄씨(純獻皇貴妃 嚴氏, 1854년 1월 21일 - 1911년 7월 20일), 덕혜옹주(德惠翁主, 1912년 5월 25일 - 1989년 4월 21일)의 생모인 복녕당 귀인 양씨(福寧堂 貴人 梁氏, 1882년 9월 27일 - 1929년 5월 30일)와 같은 왕실 여성들의 사진이 상당히 많이 남아있다. 순종(純宗, 1874년 3월 25일 - 1926년 4월 25일)의 계후인 순정효황후 윤씨(純貞孝皇后 尹氏, 1894년 9월 7일 - 1966년 2월 3일)의 사진도 남아있는 점으로 보아 점은 명성황후의 사진이나 초상화가 남아있을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고종의 현상금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이며 민족주의 사학자였던 호암(湖岩) 문일평(文一平, 1888~1939)은 교육 활동과 일제 강점기 조선의 고서적, 역사에 관한 연구 등을 한 인물이다. 그는 <조선일보> 1934년 3월 2일자 (부록 3면)의 "[사외이문(史外異聞)] 명성후 어진(明成后 御眞)"에 소문에 의하면 ‘고종은 명성황후가 1895년 8월 20일 (양력으로 을미사변이 일어난 1895년 10월 8일) 정변(政變)이 있기 며칠 전에 궁중에서 사진 촬영을 한 사실을 기억하고 그 사진을 얻기 위해 수만 원의 현상금을 건 일이 있었는데, 무슨 까닭인지 어진을 얻을 수가 없다고 애석해했다’고 적었다.

고종의 기억이 잘못된 것일까?

이승만 박사의 책에 실린 사진은 가짜

문일평은 같은 기사에서 이런 내용도 적고 있다. 외인(外人)의 저서(著書)에 혹은 명성후(明成后)의 어진(御眞)이라고 게재(揭載)한 것도 있지마는 그 역시 대중할 수 없는 것은 물론(勿論)이다. 그러면 요새 흔히 신문(新聞)과 잡지(雜誌)에 나도는 명성후(明成后)의 어진(御眞)은 그 유래(由來)가 어떠한 것인가. 그는 수십년전(數十年前) 이승만 박사(李承晩 博士)의 저술(著述)한 책에 명성후(明成后)의 어진(御眞)이라고 삽입(揷入)한 것이 있었는데 이것을 맨 처음 복사(複寫)하기는 덕흥서림(德興書林)이 있었고 그다음에 복사(複寫)하기는 동아일보(東亞日報)이었다. 이로부터 안본(本)이 진정(眞正)한 명성후(明成后)의 어진(御眞)처럼 되고 말았거니와 이 사진(寫眞)을 가장 먼저 이박사(李博士)의 책에서 발견(發見)하였을 때 나는 크게 기뻐하여 그것을 보장(寶藏)할 양으로 그윽이 떼어 두었더니 궐후(厥後)에 명성후(明成后)의 어용(御容)을 짐작할 분을 찾아가 그 사진(寫眞)을 보인즉 아니라고 하므로 그제야 나도 안본(本)임을 알았다.

여기에서 안본(贋本)은 ‘속일 목적으로 만든 가짜’라는 의미이므로 이승만박사의 책에 실린 명성황후의 사진은 가짜라는 뜻이다.

명성황후는 사진찍기를 좋아했다.

문일평은 다음과 같은 내용도 소개하고 있다. 어느 서양여자(西洋女子)의 기록(記錄)에 이러한 말이 있다. 명성후(明成后)께서 사진(寫眞)찍기를 즐겨하셨다고. 그러나 무슨 까닭인지 그 어른의 사진(寫眞)은 세상(世上)에서 얻어볼 수가 없다. 그야 사진(寫眞)이 있기만 하면 언제나 세인(世人)의 앞에 나타날 때가 있겠지만 일일(一日)이라고 속(速)히 출현(出現)하기를 바란다.

명성황후가 시해당한 1895년에 문일평의 나이는 만 7 - 8세였으므로 본인이 확인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지금까지 드러난 여러 가지 사실을 바탕으로 합리적인 판단을 추구하는 자세가 필요해 보인다.

풀어야 할 숙제

‘있다’와 ‘없다’, ‘가능하다’와 ‘불가능하다’는 서로 대립하는 개념이다. 어느 순간 또는 짧은 기간의 일이라면 비교적 쉽게 결론이 날 수 있는 일이지만 대상으로 하는 기간이 비교적 길거나 한정되지 않는 경우라면 ‘없다’ 또는 ‘불가능하다’를 입증하는 일은 쉽지 않거나 ‘불가능하다’. 지금 눈앞에 없을 수는 있으나 언제인지, 어디인지를 단정할 수는 없지만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1,000번 시도해서 성공하지 못한다고 해서 불가능한 것이 증명되는 것은 아니다. 시도한 방법이 잘못된 것일 수도 있고 성공할 확률이 낮은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1,001번째의 시도에서 성공했다면 “불가능하다‘는 것이 틀렸다는 것이 입증되기 때문이다. 단 한 번의 성공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힘을 갖는다.

모든 선입견을 버리고 주어진 자료만을 바탕으로 합리적인 판단을 해가는 지세로 임한다면 역사적 사실에 조금이라도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긍정적인 내용도 부정적인 내용도 모두 모아서 조각 퍼즐을 맞춰가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하겠다. 앞으로 4회에 걸쳐서 네 가지 종류의 명성황후로 추정되었던 사진들이 출판물에 따라서 어떻게 소개되어 왔는지 살펴보고 합리적인 판단에 필요한 기초로 삼고자 한다.

<유우식 문화유산 회복재단 학술위원>

ICPSCⓒ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