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젊어 보이는 사진 (A)
민비(閔妃) 또는 명성황후(明成皇后)로 추정되는 사진 중에서 가장 젊어 보이는 사진으로 일반에게 널리 알려진 사진은 치마저고리를 입고 비녀를 꽂고 다소곳이 앉아있는 20대 전후 여인의 모습이다. 명성황후는 1851년 11월 17일에 태어나 1895년 10월 8일에 44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1866년 2월에 왕비 간택에 참여하여 같은 해 3월 6일에 삼간택에 뽑혀 왕비가 되었다. 15세 때의 일이다. 이 사진이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에 촬영한 것이라고 하면 1870년에서 1880년 사이에 촬영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조선에서 처음 사진이 촬영된 것이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 함선 갑판에서의 일이며 1875년의 신미양요와 1876년의 강화도조약에서도 사진이 촬영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조선에 사진이 보급되기 시작한 것이 1860년대였던 점을 고려하면 이것이 민비의 사진이라고 하더라도 시기적으로 큰 모순은 없다.
이 사진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李承晚, 1875년 - 1960년) 이 1904년에 한성 감옥에 수감되어 있을 때 집필하여 4년 후인 1910년에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출판한 ‘독립정신’ 초판에 소개된 사진의 원화로 추정된다. 민비로 추정되는 다른 사진들과의 비교를 통해서 동일 인물인지, 무관한 인물인지를 판단하는 자료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승만의 ‘독립정신’ 집필 및 출판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자.
사진 소개 경위
이승만은 독립협회가 해산된 뒤 고종의 양위 문제에 연루되어 전제군주정의 개혁을 통해 독립을 보전하려는 정치활동을 벌이던 중, 일본에 있던 박영효(朴泳孝, 1861년 – 1939년)의 정계 복귀를 도모하다가 24세이던 1899년 1월 9일 체포되어 한성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는 수감 중이던 1904년 2월 19일부터 같은 해 6월 29일 사이에 ‘독립요지’라는 제목으로 책을 집필하였다. 집필 동기는 한성 감옥에 함께 수감되어 있던 유성준(兪星濬, 1860년 - 1934년)의 권유로 러일 전쟁으로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위협이 높아져 민족 독립에 대한 조선 민중의 각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당시 대한제국의 문제점과 주변 열강의 움직임 및 대한제국 사람들이 해야 할 일들을 정리하였으며, 기독교 입국론을 주장하였다. 원고 집필 중에는 이승만의 지인들을 중심으로 읽혔으며 탈고한 1904년에는 그에게 적대적이었던 환경 때문에 대한제국 내에서는 출판되지 못하였다.
이승만이 미국 동부에서 유학하며 활동하는 동안 감옥 동기였던 박용만(朴容萬, 1881년 - 1928년)이 이승만의 아들 이태산(1899년 – 1906년,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병사)과 함께 이 책의 원고를 노끈처럼 말아서 트렁크 밑창에 감추어 미국에 가져갔다. 1910년 2월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총무로 있던 문양목(文讓穆, 1869년 - 1940년)이 이 원고의 출판을 맡았다. 문양목은 1907년 10월 대한보국회 중앙회장 및 대동공보사 사장에 취임하였고 근화여학교(現 덕성여자중학교, 덕성여자고등학교, 덕성여자대학교의 전신)를 설립한 김미리사(金美理士, 1879년 – 1955년, 후에 차미리사(車美理士)로 개명) 등과 함께 로스엔젤레스에 대동신서관을 설립했다. 원고는 1910년 2월 10일 로스앤젤레스 대동신서관에서 ‘독립정신’이라는 제목을 붙여 출판하였다. 책의 끝부분에는 ‘독립요지’라고 적혀있는 것으로 보아 출판 직전에 제목이 ‘독립요지’에서 ‘독립정신’으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이 책에 문제의 사진에 명성황후라는 설명을 붙여 처음으로 소개되었다. 같은 사진이 1910년부터 1932년까지 미국과 한국에서 발행된 각종 출판물에 약간씩 변형되거나 복제로 인하여 해상도나 선명도가 떨어진 상태로 소개되었다. 1917년 3월 미국 하와이의 태평양잡지사에서 발간한 ‘독립정신’ 2쇄본, 1917년 6월 하와이에서 중국어에서 우리말로 번역돼 출간된 독립운동가 박은식(朴殷植, 1859년 - 1925년)의 ‘한국통사(韓國痛史)’, 1927년에 사학자 장도빈(張道斌, 1888년 – 1963년)이 출판한 ‘대원군과 명성황후’에도 같은 사진이 실려 있다. 1930년에는 잡지 ‘삼천리’ 7월호에 같은 사진이 스케치의 형태로 실렸다. 1932년에는 잡지 ‘별건곤’의 사진 부록에 스케치의 형태로 실리게 된다. 후기에는 인쇄의 질이 떨어질 것을 염려하여 사진을 대신해서 사진을 모사한 스케치를 싣게 된 것으로 보인다.
원본 사진의 발견과 60년 후의 신문 기사
원본으로 추정되는 사진은 한미사진미술관이 소장하게 되었으나 사진의 하단에는 영문 필기체로 ‘Pride of the Village’라고 적혀있는데 ‘고장의 자랑’ 정도의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사진의 원소장자는 외국인이었거나 외국에 거주하는 사람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다만 ‘Pride of the Village’를 명성황후로 볼 여지가 있을까 하는 의문은 든다.
1935년 1월 1일자 조선일보 신년 호에서는 설날 풍습을 다루면서 ‘규중에 숨은 고운 각씨들’이라는 제목의 짧은 글에서 명성황후로 거론되는 사진 2장을 실었다. 60년 전에 찍은 아가씨들의 사진이라고 소개하며 당시의 복장이 매우 불편해 보인다는 내용으로 소개하고 있다. 1935년으로부터 60년 전이라면 1875년경으로 조선에 사진이 보급되던 시기와도 맞물리고 명성황후가 생존하던 시기이기도 하다. 30년을 한 세대라고 하면 약 2세대 전의 모습으로 소개하고 있다. 평균수명이 지금보다는 짧았던 시기이므로 쉽게 상상할 수 없는 풍속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보다는 생활방식이 그리 빠르지 않은 시대였음에도 두 세대 전의 풍습은 다르게 느껴졌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원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규중에 숨은 고흔 각씨들」
이것은 큰머리에 큰옷을입은 육십년전의 부인네 올씨다. 지금모가 아씨더러보라면 저리케차리고 엇지견듸느냐고할지모르지만 녯날의부인네는 이머리이옷으로 일평생을 보냈엇을뿐이아니라 또그중에는이머리이옷도 못차리게되야 일평생을한탄으로지낸이도업지안답니다.
저고리는젖가슴도 못가리도록짤지만 치마만은두발을 푹싸도록지르르 끌리는것이 꼴이사납기도하나 아지못하게녯맛이납니다. 이것은남끝동자지고름의저고리와 스란치마를입은 륙십년 전절므신 안악네의옷맵시외다. 머릿뒤를보십시요. 방맹이만한 석류잠이 달리어있지안습니까? (륙십년전에 백인사진)
두 사진 중에서 아래 사진은 젊은 아낙네의 모습이라고 소개하면서 무척 불편해 보이지만 자지고름 (자주고름의 일제 강점기의 표현)의 저고리와 스란치마를 입고 있어 자못 옛 맛이 난다고 소개하고 있다. 스란단은 무늬를 금사(金絲)로 짜 넣거나, 금박(金箔)을 직접 찍거나 금박 찍은 스란(여성 하의인 치마의 무릎 근처에 가로로 댄 선(線) 장식)을 덧대는 형태로 장식한 것으로 조선 여성의 예복에 사용되었다. 스란치마는 적의(翟衣)나 원삼(圓衫), 당의(唐衣) 등의 예복 차림을 할 때 같이 입는 예복용 치마이다.
1935년 1월 1일에 실렸던 기사이니 지금으로부터 88년 전의 기사로 명성황후 사후 39년 후에 작성된 것이다. 지금보다는 사진의 인물이 누구인지 알 수 있는 개연성이 높았겠지만 ‘명성황후’나 ‘민비’라고 표현하지 않았다. 글을 쓴 사람은 사진에 대한 기록이 없었다면 사진을 누가 찍었는지 사진의 주인공을 알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다만 오래된 사진이라는 정도만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1931년 당시의 문맹률, 신문의 보급률, 경제 상황 등을 고려하면 그런 오류가 발견되었을 가능성도 매우 희박하다. 오류가 발견되었다고 해도 그것을 정정하는 것은 더더욱 어려웠을 것이다. 오류라는 기록이 없는 기록은 옳은 기록처럼 믿게 되고 그 기록정보는 유지 계승되며 확대 재생산되기도 한다. 이러한 사장은 오늘날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일상생활에서 진실, 사실, 유언비어, 가짜 뉴스라는 단어를 접하게 되는 이유이다. 눈앞에 놓인 자료를 바탕으로 당시의 상황을 고려하면서 여러 가지 기록들과의 대조를 통해서 논리에 근거해서 합리적인 답을 찾아가야 할 것이다.
상반된 증언 (1)
2015년의 주간조선의 기사에 따르면, 단국대학교 황필홍 교수는 이른 시기의 많은 책자에서 이 사진이 ‘명성황후’라고 실려 있는 것을 근거로 이 사진이 실제 명성황후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주장했다. 명성황후의 조카이며 민영환(閔泳煥, 1861년 8월 7일 - 1905년 11월 30일)의 동생인 민영찬(閔泳瓚, 1873년 12월 3일 - 1948년 11월 16일)도 이 사진을 명성황후로 지목했다고 한다. 민영찬의 생몰 연도는 명성황후 생몰 연도와 21년이나 겹치기 때문에 얼굴을 못 본 것이 아니라면 이 사진이 명성황후일 가능성이 높다고 적고 있다. 또한 명성황후를 만났던 외국인들의 증언, 특히 영국 잉글랜드 출신의 19세기 여행가이며, 지리학자이자 작가로 1894년부터 3년간 조선과 중국을 자주 방문하면서 1898년에 출판된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 (Korea and Her Neighbours)’을 저술한 이사벨라 버드 비숍(Isabella Bird Bishop, 결혼 전 이름 Isabella Lucy Bird, 1831년 10월 15일 ~ 1904년 10월 7일)의 인상처럼 차갑고 지적인 외모라는 등 과도 들어맞아, 권오창 화백이 그린 명성황후 표준영정의 저본이 되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부터 1980년대까지 명성황후 사진으로 알려졌던 사진으로 이목구비를 조금씩 고쳐 그린 수십 가지 합성 본이 많은 출판물에 등장한다. 1990년에 명성황후 사진으로 국사 교과서에 실렸으나 논란 끝에 1997년 삭제되었다. 원본 사진에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사진 속의 여인은 한복을 입고, 손에 서양식 흰 면장갑을 끼고 있다. 장갑은 격식 있는 의복을 상징하므로 사진 촬영 당시에 흰 면장갑을 낄 수 있는 사람은 최소 귀족이나 왕족이라고 판단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여전히 ‘독립정신’과 ‘별건곤’ 등에 소개된 사진 속 인물이 명성황후라고 확신할 수 없다는 반론이 제기되고 있다. 주된 반론의 근거로는 “사진 속 인물의 의상이 황후의 것으로 보기 어렵다”, “어느 노상궁은 사진 속 인물이 황후가 아니라고 증언했다”는 등의 주관적 판단이 개입되었거나 전해 들은 이야기이다.
명성황후의 조카인 민영찬의 증언을 믿을 것인가, 어느 노상궁의 증언을 믿을 것인가, 아니면 둘 다 믿지 않을 것인가.
상반된 증언 (2)
2015년에 국사편찬위원회 구선희 연구관은 주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명성황후 본인이 사진 찍는 걸 무척 싫어했다고 한다. 게다가 사진 기술은 근대 이후에 국내에 정착됐기 때문에 명성황후 사진 자료를 구하기는 쉽지 않다. 어쨌든 현재 명성황후 사진으로 확정된 건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다.
지난 칼럼에서도 소개한 바와 같이, 민족주의 사학자였던 문일평은 어느 서양여자(西洋女子)의 기록(記錄)에 이러한 말이 있다고 소개했다. “명성후(明成后)께서 사진(寫眞)찍기를 즐겨하셨다.”
명성황후는 사진 찍기를 싫어했을까? 아니면 사진찍기를 좋아했을까? 사진이 있을까? 사진은 없을까?
법정에서의 검사와 변호사에 의한 증인신문 장면을 연상하게 한다. 이 문제도 역사 법정과도 같은 분위기가 연출될 수밖에 없다. 인정에 호소하는 것보다는 과학적인 방법으로 사건을 해결해야 할 것 같다.
19세기의 사진 촬영
사진술이 발명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9세기의 사진 촬영 장면을 살펴보자. 큼지막한 네모난 모양의 어둠상자 (카메라)의 뒷면에 달린 간유리에 머리를 대고 작업을 한다. 주위의 빛이 들어오지 않도록 검은 천을 머리에 쓴 상태에서 앞쪽의 바늘구멍을 대신한 렌즈를 통해서 들어온 미약한 빛이 간 유리판에 맺히도록 한다. 촬영하고자 하는 이미지가 적당한 크기와 구도로 상하좌우가 반대로 맺히도록 조정한다. 렌즈를 통해서 간유리에 맺힌 영상은 빛이 약하므로 검은 천으로 만든 차광막을 사용하여 주변을 어둡게 해야 확인할 수 있다. 촬영 준비가 되면 빛이 차단된 커다란 유리건판 상자를 간 유리판의 위치에 붙이고 유리건판 앞의 차광판을 제거하고 셔터를 누른다. 조리개와 셔터의 시간 설정은 유리건판의 감도에 맞게 설정해야 하는데 그것은 사진사의 경험과 기술에 의해서 결정된다. 실패를 많이 경험한 사진사가 유능한 사진사가 될 수 있는 장인의 세계이다.
유리 건판의 감도가 좋지 못하다 보니 노광시간이 수초에서 1분 정도 걸리기도 한다. 움직이지 않는 정물 촬영이 주를 이루었다. 인물을 촬영하려면 인물이 정물인 척할 수밖에 없다. 그것도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되는 긴 시간이다. 지금도 셔터를 누를 때만 눈을 감는 분들이 계셔서 단체 사진을 촬영할 때는 같은 구도로 여러 장을 촬영해서 인위적으로 개안 수술을 하기도 한다. 유리 건판이나 필름으로 사진을 촬영하던 시대에는 사진 촬영이 끝나도 제대로 찍혔는지는 현상을 해 봐야 알 수 있다. 따라서 보험으로 여러 장을 촬영하기도 하지만 비용이 발생하는 일이라서 매우 중요한 사진이 아니라면 위험을 감수해야만 했던 시절이다. 유리 건판도 완벽한 것이 아니라서 현상이 끝난 다음에 연필로 가필하면서 사진 원판의 흠집을 수정해서 사진을 인화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사진 기술 여명기의 사진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면 이러한 기술사적인 내용도 함께 검토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당시에 사진을 출판물로 인쇄할 때에 사용된 방법에 관해도 고려해야 한다. 사진을 어떻게 인쇄해 왔을까? 지금처럼 레이저 프린터나 잉크젯 프린터로 인쇄하던 시기가 아니었다. 인쇄물의 상태 조사를 바탕으로 인쇄 기술의 발달과정도 함께 살펴 가면서 합리적인 결론을 도출해야 할 것이다.
올해 2월, 동아일보에서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제공한 사진을 바탕으로 ‘1890년대 선교사, 한복 입고 회갑연 열며 조선에 적응’이라는 기사를 실었다. 60세 생일을 기념해 연 한국의 회갑연에 참석한 선교사들과 가족들의 사진이 실렸는데 선교사들은 한국 문화에 스며들기 위해 60세 생일 파티를 한국식 회갑연으로 열어 모두 한복을 입고 참석하여 촬영한 사진이 소개되었다. 정확한 촬영 연도는 알 수 없으나 민비가 시해되던 1895년 10월 8일의 을미사변 전후의 사진이다. 이 사진의 주인공 중에는 실제로 민비를 알현한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진의 출처와 촬영 배경을 이야기하지 않고 사진만 보게 된다면 최근에 세계적인 한류의 영향으로 서양에서 벌어진 핼러윈 파티 사진을 고풍스럽게 흑백으로 변환한 이미지라고 해도 반박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 사진을 소개하면서 적은 제목이 100% 확실하다는 증거도 없다. 사진을 촬영한 사람은 한 사람뿐이다. 사진이 어떻게 어떠한 설명과 함께 어떻게 전달되어 출판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추적하는 일은 쉽지 않다. 역사 추리소설 장작의 세계와 크게 다를 바 없다.
요즈음 광화문 앞을 지나다 보면 다양한 색상의 한복을 입고 거리를 활보하는 외국인 관광객들을 만나게 된다. 한꺼번에 여러 임금님들이 호위무사도 없이 지나가기도 하고 신호등을 보면서 횡단보도를 건너기도 한다. 그 앞에는 각종 정당들의 정치구호가 적힌 현수막이 달려있다. 이렇게 촬영된 사진을 100년 후의 사람들은 어떻게 판단하게 될까? 끊임없이 이러한 질문을 하면서 민비 또는 명성황후의 사진을 바라볼 때 역사적 실체에 한 걸음 다가설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앞으로 소개할 내용에서는 이러한 관점에서 문제에 접근해 갈 예정이다.
<유우식 문화유산회복재단 학술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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