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선교장 탐방

조선시대 자연보존된 이내번의 전통가옥

이종철 선임기자 승인 2024.05.13 09:48 의견 0
선교장의 시문
선교장 전경
매홀국가유산지킴이 환경정화봉사


매홀역사문매홀역사문화포럼 5월 탐방은 강릉 선교장(船橋莊)에 왔다. 1967년에 국가민속유산으로 지정된 선교장은 이 지방의 명문으로 알려진 이내번(李乃蕃)이 살기 시작하여 대대로 후손들이 거처하는 집이다. 가장 오래된 안채 주옥(住屋)은 당초에 주거를 정한 때의 건물이라고 전하나 확실하지 않다.

입구에 들어서니 작은 호수가 나를 맞았다. 호수는 아름답다. 호수를 지나 작은 문에 들어섰다. 작은 문에는 승고월하문(僧敲月下門)이라는 글귀가 적혀있다. 해설사님이 뜻을 잘 설명하여 주었다.

활래정(活來亭)으로 왔다. 활래정은 물 위에 떠 있는 누마루와 온돌방, 다실이 있어서 근대 한국 특유의 건축양식과 조경미를 갖추고 있다고 한다. (건축물 앞의 설명에서) 아름다운 건축물을 감상하고 조금 더 걸어 선교장의 안주인과 직계 여인들이 지냈던 안채 주옥으로 들어섰다. 안채 주옥은 행랑채와는 다른 구조로 되어있다고 한다.

안채 주옥에서 간단한 청소로 문화재 보존행사를 진행한 후, 이씨 가의 서고 겸 공부방으로 사용되었고 맏며느리에게 살림을 물려준 할머니의 거처였던 서별당(西別堂)과 집안 살림을 돕던 여인들이 지냈던 연지당(蓮池堂)도 관람하였다. 안채와 행랑채 사이에는 담을 쌓아서 막았으며, 행랑채는 남쪽에 있고 서쪽으로 사랑채에 출입하는 솟을대문이 있다. 행랑채도 살펴보며 그 시절을 생각해보았다.

선교장을 나와 선교장의 손님맞이에 주로 사용되었고 전국의 학자 풍류객과 교분을 나누던 중사랑(中舍廊)과 선교장 가(家)의 살림을 감독하던 집사들의 거처였던 초가(草家)도 관람하였다. 현재 이 초가는 관광객들에게 임대한다고 한다.

관람 후, 연못 앞의 넓은 공터에 자리 잡았다. 아름다운 풍경을 사진에 담고 앉아서 봄날을 느껴보았다. 아직은 덥지 않은 날씨지만 햇살이 강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 이내번(李乃蕃, 1703-1781)은 효령대군의 11세손으로 가선대부를 지냈다. (조선일보, 2024. 5. 3)

● 글을 쓸 때 퇴고(推敲)라는 말이 있다. 시문을 지을 때 자구를 여러 번 생각하여 고침을 이르는 말이다, (당시기사(唐詩紀事) 출전) 어느 날, 당나라의 시인 가도(賈島, 777-841)가 말을 타고 가면서 ‘이응의 유거에 제함(題李凝幽居)’이라는 시를 짓고 있었다.

閑居隣竝少(한거린병소) 이웃이 드물어 한거하고

草徑入荒園(추경입황원) 풀숲 오솔길은 황원에 통하네

鳥宿池邊樹(조숙지변수) 새는 연못가 나무에 잠자고

僧敲月下門(승고월하문) 중은 달 아래 문을 두드린다

그런데 마지막 구절에서 ‘민다(推)’라고 하는 것이 좋을지 ‘두드린다(敲)’라고 하는 것이 좋을지 여기서 그만 딱 막혀 버렸다. 그래서 가도는 이 두 낱말만 정신없이 되뇌며 가던 중 타고 있는 말이 마주 오던 고관의 행차와 부딪치고 말았다.

“무례한 놈! 뭣 하는 놈이냐?”

“당장 말에서 내려오지 못할까!”

“이 행차가 뉘 행찬 줄 알기나 하느냐?”

병졸(兵卒)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내뱉으며 가도를 끌어내리고 고관 앞으로 끌고 갔다. 그 고관은 당대(唐代)의 대문장가인 한유(韓愈)로 그는 도읍을 다스리는 으뜸 벼슬인 경조윤(京兆尹)이었다. 한유 앞에 끌려온 가도는 먼저 길을 비키지 못한 까닭을 솔직히 말하고 사죄했다. 그러자 한유는 노여워하는 기색도 없이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내 생각엔 역시 ‘민다’는 ‘퇴(推)’보다 ‘두드린다’는 ‘고(敲)’가 좋겠네.”

이를 계기로 그 후 이들은 둘도 없는 시우(詩友)가 되었다고 한다. (한자신문, 2018.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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