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처사(風流處士)'들의 유토피아를 꿈꾸는 풍영정(風詠亭)

- 알싸한 바람을 따라 '바람(風)의 정자'에는 풍류처사(風流處士) 칠계 선생이 있다
- 풍영정과 극락강의 아름다움이 조화로운 문화공간

김오현 선임기자 승인 2024.08.04 15:39 | 최종 수정 2024.08.04 20:02 의견 1

기아국가유산지킴이 스터디 활동과 풍영정 전경(사진촬영 오현)

풍영정(風詠亭)은 조선시대 승문원판교를 지낸 칠계 김언거(漆溪 金彦琚, 1503∼1584)가 벼슬에서 물러난 뒤 고향에 돌아와 지은 정자이다. 앞면 4칸·옆면 2칸 규모로 이루어져 있으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정자 안쪽에 걸려 있는 한석봉(韓石棒)이 쓴 ‘제일호산(第一湖山)’이라는 편액과 퇴계 이황(退溪 李滉), 남명 조식(南冥 曺植),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 회재 박광옥(懷齋 朴光玉), 제봉 고경명(霽峰 高敬命) 등이 지은 현판들의 면면만 봐도 풍영정의 위상이 어떠했는지를 가늠 할 수 있다.

풍영정 전경, 현판, 수완동 풍영정 옆의 칠계 선생 비석, 갈처사에게 편액을 부탁하는 모습


▶ 칠계 김언거(漆溪 金彦琚)

풍영정(風詠亭)의 주인 칠계 김언거(漆溪 金彦琚, 1503~1584)의 자는 계진(季珍)이고, 호는 칠계(漆溪)·풍영(風詠)·관포당(灌圃堂)이며, 본관은 광산이다. 광주의 마지면(馬池面) 선창리(仙滄里, 현재의 풍영정이 있는 곳)에서 증사헌부집의(曾司憲府執義) 김정(金禎)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김언거(金彦居)는 고려시대 충숙왕 때 첨의정승(僉議政丞, 종1품)을 지낸 쾌헌 김태현(快軒 金台鉉, 1261~1330)의 문정공파로 문정공의 넷째 아들 김광로(金光輅)의 11세손으로 칠계공파라고도 한다. 김광로(金光輅)의 7세손이 남구 대촌동 칠석에 세운 부용정(광주광역시 문화유산자료 제13호)의 주인공 김문발(金文發, 1359~1418)이다. 그리고 또 다른 광주를 대표하는 광산김씨 집안으로는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 중심의 낭장공 김규(郎將公 金珪)의 후손으로 충장공 김덕령(忠壯公 金德齡, 1567~1596)장군이 있다.

광산김씨 쾌헌 김태현의 문정공파종중 비석군과 김광로의 7세손이 김문발이 칠석동에 세운 부용정(광주광역시 문화유산자료)의 전경(사진제공 네이버 검색)

1531년(중종 26) 문과에 합격하여, 1532년에 예조좌랑 및 정언에 제수되었다. 1545년에 금산 군수에서 사헌부 장령이 되었고, 1546년에는 상주목사가 되었다. 1550년에는 통정으로 승진되었고, 그 이듬해에 응교가 되었으며, 1557년에 승문원판교(정3품)에 올랐으며, 1560년(명종 15)에 정년 퇴임하여 정계를 떠나 꿈에 그리던 고향으로 돌아온다. 김언거(金彦居)는 고향에 있는 극락강의 옛 이름인 칠계(옷나무 '칠'과 시냇물 '계'의 합성어)를 자신의 호로 사용할 정도로 이곳을 그리워했다.칠계(漆溪)는 그렇게 고향 산천을 벗 삼아 시문을 짓고 풍류를 즐기며 도인 같은 삶을 살다가 82세로 눈을 감아 강이 바라보이는 선창산의 언덕에 묻혔다.

『칠계집(漆溪集)』은 일제 강점기인 1922년에 김언거의 후손들이 김언거의 작품을 수집하여 엮은 문집이다. 2004년에는 김언거와 학문적으로 교류한 인물들과 관련 있는 시문까지 합쳐 번역한 『칠계유집(漆溪遺集)』이 광산김씨 칠계공파 문중에 의해 발간되었다. 풍영정이 건립되자 퇴계 이황(退溪 李滉)을 비롯하여 남명 조식(南冥 曺植),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 규암 송인수(圭菴 宋麟壽), 미암 유희춘(眉巖 柳希春), 면앙정 송순(俛仰亭 宋純), 신재 주세붕(愼齋 周世鵬), 고봉 기대승(高峯 奇大升), 송강 정철(松江 鄭澈), 회재 박광옥(懷齋 朴光玉), 제봉 고경명(霽峰 高敬命) 등 당대의 내로라하는 명현들이 방문하여 김언거와 교류하며 학문을 쌓았다. 『칠계집』에는 모두 84명의 교유 인사가 확인되며, 특히 이황(李滉)과는 40여 수에 가까운 시를 주고받는 등 활발하게 교유하였다.

기아국가유산지킴이 스터디 활동으로 풍영정을 해설사와 함께 돌아보고 마지막으로 맛점 모습

▶ 풍영정(風詠亭)

풍영정(風詠亭)은 김언거(金彦据, 1503~1584)가 지은 정자로 1984년 2월 29일에 광주광역시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었으며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다. 1898년(고종 35)에 중수되었고, 이때 송사 기우만(松沙 奇宇萬)이 중수기(重修記)를 썼다.

광산구 신창동 광신대교 옆 언덕에 있는 정자 풍영정(風詠亭)은 '맑은 바람을 쐬며 시를 읊는다.'는 이름의 정자로 '세상의 모든 잡념을 버리고 오로지 자연을 벗삼아 심신을 다스리겠다.'라는 뜻으로 지었다고 한다. 이 정자 아래로 흐르는 극락강의 폭이 지금보다 훨씬 더 넓고 수심이 깊었던 옛날에는 이 정자 아래 나루터가 있어서 나주 영산포에서 소금을 싣고 소금배들이 들어왔다고 한다. 이 강줄기를 극락강(極樂江)이라고 부르고 영산강의 한 구간으로 이십리 안팎이었다. 광산구 신가동과 신창동, 운남동 일대가 이 강변과 맞닿아 있다.

조선시대 동국여지승람에 풍영정에 관한 기록, 명현들이 지은 현판들, 정자 안쪽에 걸려 있는 한석봉(韓石棒)이 쓴 ‘제일호산(第一湖山)’이라는 편액 등의 모습(사진제공 광산저널TV)

극락강은 일상의 번뇌를 건너 피안의 세계(모든 고통과 속박에서 자유로운 깨달음의 세계를 저쪽 언덕이라는 뜻)로 인도할 것만 같은 불교적 이름 극락강은 관리나 여행객이 머물던 '원(院)'인 극락원에서 유래한다. 극락원 앞을 흐르는 강을 극락강, 그 강을 건너는 나루를 '극락진'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옛날 극락교는 지금의 서창교 일대이고, 지금 극락교라 부르는 곳은 광주-송정리간 공항가는 도로이다. 담양 가마골에서 발원하여 산동교(山東橋, 국도 제1호선 광산구 신창동과 북구 동림동 연결)를 흘러 온 강물을 신가동 광신대교 주변에서는 조선시대에 '칠천(漆川)'이라 불렀다. 김언거의 호가 칠계(漆溪)였던 것도 여기에서 비롯됐다.

기아국가유산지킴이 스터디 활동과 정자 아래로 흐르는 극락강 바위에 햇볕 즐기는 거북이들...

영산강 8경 중 7경에 해당하는 이곳 풍영정(風詠亭)의 현재 모습은 1976년도 담양댐 건설, 도시화로 인한 무차별적인 개발과 4대강 치수사업으로 옛 운치를 찾아볼 수 없다. '풍영(風詠)'은 <논어>의 '선진(先進)'편에서 차용해왔다. '풍우영귀(風雩詠歸)', 자연을 즐기며 시가를 읊조린다는 뜻이다. 아마도 이정자를 지은 김언거가 평생 꿈꾸던 '이상향' 같은 곳이었을 것이다.

풍영정(風詠亭)은 460여년 전 권력을 놓고 미련 없이 고향으로 돌아와 거문고와 시문을 벗 삼아 행복한 노후의 삶을 살다간 맑고 고고한 기품을 지닌 선비의 '파라다이스(걱정이나 근심 없이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곳)' 였을 것이다. 아울러 풍영정(風詠亭)은 앞으로도 지속적인 관리와 보호를 통해 조선시대 선비들의 문화와 전통을 후대에 전달하는 중요한 역할을 해 나갈 것이다.

🔳 참고문헌

1. 광주랑, [외로울땐 극락강 풍영정으로 간다], 광주광역시 공식 블로그, 2012.

2. 김윤기, [풍영정], 광주광역시 광주문화재단, 2019.

3. 홍창우, [김언거],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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