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정 정걸 장군의 영정과 정걸 제독의 오연 작가 그림(사진제공 네이버 검색)
정걸 장군(丁傑 將軍)은 조선 시대 해전의 명장으로, 1555년 을묘왜변(乙卯倭變) 이후 왜구를 격퇴하며 큰 공을 세웠다. 특히 전라, 경상, 충청 수사를 두루 역임하며 조선 수군의 핵심 인물로 활약했다.
이순신 장군의 조방장(助防將)으로 파견되어 판옥선 제작을 주도하며, 거북선 탄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임진왜란의 영웅 이순신 장군(李舜臣 將軍)의 멘토였던 정걸 장군의 후손들이 모여 사는 전라남도 고흥군 포두면 길두리 안동마을의 안동사를 찾아가서 정걸 장군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그의 삶과 업적을 되짚어 본다.
이순신장군의 영정/ 정걸장군의 영정/한산대첩 민족기록화(김형구 그림)
▶ 송정 정걸(松亭 丁傑)장군
송정 정걸(松亭 丁傑, 1514~1597)장군의 본관은 영광(靈光, 현재는 압해정씨 불우헌공파), 자는 영중(英中), 호는 송정(松亭)이다. 1514년(중종 9), 지금의 전라남도 고흥군 포두면(浦頭面)에서 태어났다. 최초의 가사 작품인 '상춘곡(賞春曲)'을 쓴 정극인(丁克仁)의 5대손으로 1544년 31세의 나이로 무과에 급제한 뒤, 훈련원 봉사(奉事)를 거쳐 선전관(宣傳官)을 지냈다. 1555년 을묘왜변(乙卯倭變, 왜구가 지금의 전남 영암, 해남, 진도, 장흥 일대를 침탈한 사건) 때 달량성(達梁城)에서 왜군을 무찌른 공으로 남도포(南桃浦, 진도) 만호가 되었다. 이듬해 부안현감을 거쳐, 1561년 온성도호부사, 1568년(선조 1) 종성부사로 있으면서 여진(女眞), 즉 야인(野人)의 토벌과 국경 수비에 공을 세웠다. 그 뒤 1572년과 1578년 경상우수사, 1577년 전라좌수사, 1583년 전라병마사, 1584년 창원부사, 1587년 전라우수사를 역임하기 전까지 40년이 넘는 오랜 군 경력과 최전선에서 복무하며 조선을 위협했던 왜구(倭寇)와 야인(野人)을 상대로 싸워 본 풍부한 실전 경험과 빛나는 전공을 쌓은 유능한 무장(武將)이었다. 그리고 무관(武官)으로 오를 수 있는 자리는 두루 다 거쳤으니, 훌륭한 후배들을 위해 벼슬을 그만 두고 낙향하였다.
위의 왼쪽부터 충무사 이순신장군 영정/ 충무사 영당에 모셔진 정우 영정/ 나대용 장군 영정/ 충무사 영당에 모셔진 송희립 영정
1591년, 고흥 지역을 관할하는 전라좌수사로 새로 부임해온 충무공(忠武公) 이순신 장군(李舜臣 將軍)이 그를 특별히 조방장(助防將, 주장의 휘하에서 방비를 돕는 장수)으로 청하였기 때문에 전라좌수영 조방장(助防將)으로 조선 수군의 주력 전선인 판옥선을 만들었고 화전, 철령전(철령을 붙여서 만든 화살), 곡방패, 화경소 등 여러가지 무기를 만들었다. 이듬해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李舜臣)과 함께 각종 해전에 참가해 많은 공을 세웠다. 특히 1592년 5월, 이순신 함대의 첫 해전인 옥포해전에서 전공을 세운 이래, 7월의 한산도대첩에 이어, 9월의 부산포해전에서도 큰 공을 세웠다.
전라좌수영의 5관 5포 위치 지도/ 전라좌수영의 진남관 전경
1593년 2월에는 충청수사(忠淸水使)로 있으면서 행주대첩(幸州大捷)에 참가해, 화살이 거의 떨어져 가는 권율 장군(權慄 將軍)에게 화살을 조달해 승리로 이끄는 데 이바지한 뒤, 다시 서울 탈환(奪還) 작전(作戰)에도 참가하였다. 같은 해 6월, 이순신의 요청으로 한산도에서 왜적을 방어하고, 12월에는 전라도방어사(全羅道防禦使)로 부임해 남서 해안에서 왜적 토벌에 전념하였다. 1595년 관직에서 물러난 뒤, 정유재란이 일어난 1597년 여름 83살의 나이로 죽었다. 포두면 안동사(安洞祠)에 배향되었다. 또한, 2015년 전남 고흥에 주둔하고 있는 31사단 예하 향토부대가 정걸의 업적을 기리고자 부대명칭을 "정걸대대"라고 명명했다고 한다.
위의 왼쪽부터 고흥 지역의 '정걸대대'/정걸장군 생가터(현재 길두교회)/안동사의 전경
정걸 장군(丁傑 將軍)은 광산김씨 현감 석백의 딸과 결혼해 1남 2녀를 두었다. 그의 아들 정연(丁淵)은 영광군수를 지내다가 정유재란 때 흥덕전투에서 1598년에 순절하였고, 그의 손자 정홍록(丁弘祿)은 1597년 정유재란 때 무안현감으로 근무할 때 명량해전에 참전하였고, 1598년 낙안군수를 역임하고 정유재란에 의병군으로 활약하다 전사했다.
위의 왼쪽부터 헌대부 병마절도사 정걸 유허비/유주산 정걸묘지/정걸 자 정연, 손 정홍록 묘지/정걸가 교지류고문서
정걸 장군(丁傑 將軍)은 이순신(李舜臣)보다 31살이나 연상이었지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의 조방장으로 함께 옥포해전, 한산도대첩, 부산포해전 등에 참가해 조선 수군을 승리로 이끌었다. 행주대첩(幸州大捷)과 서울 탈환작전에도 참가했다. 그는 판옥선을 축조하고 해상전투에 쓰이는 무기를 만들었으며, 수십년 왜구들과 전투경험을 토대로 판옥선 개조를 지도해 돌격선인 ‘거북선’을 제조하는데도 기여했다. 정걸 장군(丁傑 將軍)은 아들과 손자까지 3대에 걸쳐 나라를 위해 헌신한 충절의 집안이었지만, 정작 그의 업적과 희생에 비해 그의 이름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고흥 압해정씨(영광정씨) 불우헌공파(不憂軒公派) 사당인 안동사(雁洞祠)는 소박하기 그지없는 모습으로, 정걸 장군(丁傑 將軍)의 위대한 업적에 비해 너무 초라한 모습으로 남아 있어 안타까움을 더한다.
🔳 참고 문현
1. 김성철, ['숨은 영웅' 정걸 장군을 아십니까? ], 오마이뉴스, 2005.
2. 도우, [을묘왜변, 임진왜란의 영웅 : 정걸 장군에 대하여], 네이버 블로그 태극기사 , 2020.
3. 서정현, [고흥 압해정씨(押海丁氏) 불우헌공파 정걸 종가], 남도일보, 2022.
4. 정학수, [가문을 빛낸 인물 - 불우헌공파], 압해정씨 대종회,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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