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의예안이씨 가훈으로 세종이 이정간의 효심에 감동하여 내린 어필과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 유천리에 있는 시조 이도의 묘소를 드론으로 본 전경(사진제공 네이버 검색, 전의예안이씨 화수회)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은 작지만 깊은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고려 초 개국 공신 이도(李棹)는 태조 왕건(王建)이 후백제를 정벌할 때 금강을 건너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어 왕건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이 공로로 그는 전산후(全山侯, 전의의 옛 이름)에 봉해졌고, 후손들은 그의 본관인 전의를 이어받아 전의예안이씨(全義禮安李氏)를 이루었다.

전의면은 백제 부흥군의 요지였던 운주산성이 자리 잡고 있으며, 고려 초 인물인 전의예안이씨(全義禮安李氏) 시조 이도(李棹)의 묘소는 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일제강점기 철도 부설로 훼손될 위기에 놓였던 묘소는 후손들의 노력으로 위기를 넘기고 오늘날까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전의예안이씨(全義禮安李氏)는 고려 개국 공신의 후예로서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며, 전의면은 그들의 발자취가 남아있는 곳이다.

이 기사를 시작으로 좀더 전의예안이씨(全義禮安李氏)의 역사와 관련 문화유산을 소개하며, 그 의미를 되새겨보고자 한다.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 전경, 세종특별자치시 기념물인 이성산 전경, 이성산에 이태사 유허비
시조 이도의 묘소로부터 동북쪽 500m앞에 있는 구암 사적과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를 정벌할 때 금강을 건널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모습을 그림화한 사진

▶ 전의예안이씨(全義禮安李氏)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全義面)은 세종특별자치시에 속한 면으로 전의김씨(全義金氏)와 전의예안이씨(全義禮安李氏) 두 성씨의 본관이다. 전의 김씨 (全義 金氏) 시조이자 조선 전기 연산군 시절 내시중 한 명이었던 김처선(金處善)이 연산군에게 간언(諫言)하다 죽임을 당하고, 본관이였던 전의김씨(全義金氏) 역시 사라져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또하나의 성씨는 전의이씨로 고려 개국공신인 이도(李棹) 를 시조로 한다.

전의예안이씨(全義禮安李氏)는 고려 개국 공신인 이도(李棹)를 시조로 하는 한국의 대표적인 성씨 중 하나이다. 이도(李棹)는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를 정벌할 때 금강을 건너는 데 큰 공을 세워 왕건에게 '도(棹, 배를 젓는 노를 뜻하는 노도)'라는 이름을 하사받고 전의후(全義侯)에 봉해졌다. 이후 후손들이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 이성산(李城山) 아래에 세거하면서 본관을 전의로 정하게 되었다. 일부 후손들이 예안 지방으로 이주하면서 예안이씨(禮安李氏)로 분관하기도 했지만, 최근에는 다시 통합하여 전의예안이씨(全義禮安李氏)로 부르기고 있다.

고려통합삼한개국익찬이등공신 삼중대광태사 이도의 영정, 위패, 태사공 이도의 산소를 수호하기 위한 재실인 영사재의 전경
고려사 열전과 평양의 영명사에 나오는 예안이씨 시조 이혼(李混), 중시조 이익(李翊)의 신도비

◼️ 예안이씨(禮安李氏)의 연원(淵源)

전의예안이씨(全義禮安李氏)의 시조 태사공(太師公) 이도(李棹)의 7세손(世孫) 동암수공(東巖叟公) 이천(李仟)의 아들 3형제(兄弟) 중 둘째아들인 고려 첨의정승(高麗 僉議政丞)을 지낸 문장공파(文莊公派)파조(派祖) 이혼(李混)이 국가에 공훈(功勳)하여 예안백(禮安伯)에 봉군(封君)되었으며, 또 그 손자(孫子)인 보문각제학(寶文閣提學)을 지낸 10세손(世孫)이익(李翊)이 예안군(禮安君)으로 봉군(封君)되어 그 군호(君號)를 따라 전의(全義)에서 예안(禮安)으로 이적(移籍)하여 예안이씨(禮安李氏)의 득관조(得貫祖)가 되었다.

내력인즉 일부 전의이씨(全義李氏)들은 예안(禮安,현재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지방으로 이주하면서 조선 시대에는 많은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며 안동 지역의 명문가로 자리매김했다. 1927년 문중 간의 합의로 통합하였지만 현재도 호적상의 본관은 전의와 예안이 구별되고 있으며 1927년에 통합은 종친들 간의 통합이었다.

전의이씨에서 분적 예안을 본관으로 삼아 이어왔으나 1927년 문중 간의 합의로 통합되어 전의예안이씨로 불리어지고 있음
보물 제533호로 지정된 예안이씨 'ㅁ'자형 몸채와 'ㅡ'자형 별당인 쌍수당과 안동 체화정의 전경



◼️ 충효와 학문을 중시한 가문

전의예안이씨(全義禮安李氏)는 충효(忠孝)와 학문(學文)을 중시하는 가풍으로 유명하다. 특히 세종 때 강원도 관찰사를 지낸 이정간(李貞幹)은 노모를 정성껏 봉양한 효성이 널리 알려져 세종대왕에게 극찬을 받았으며, 세종이 직접 내린 '가전충효 세수인경(家傳忠孝 世守仁敬)'이라는 어필은 전의예안이씨(全義禮安李氏)의 가훈(家訓)으로 자리 잡았다. 이는 충(忠)과 효(孝)를 가문의 전통으로 삼고, 인(仁)과 경(敬)을 몸소 실천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러한 가훈 아래 전의예안이씨(全義禮安李氏)는 조선 시대에 문과 급제자 188명, 공신 9명, 상신 5명, 대제학 1명, 청백리 8명, 호당 4명, 시호 를 받은 인물 38명 등 많은 인물을 배출하며 사회 각 분야에서 활약했다. 2015년 인구 조사 결과, 전의이씨의 인구는 164,189명과 예안이씨의 인구는 17,748명이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전의예안이씨(全義禮安李氏)는 현재까지도 한국 사회에서 중요한 성씨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신종동국여지승람의 이도와 이성에 관한 기록, 전의예안이씨 가훈으로 세종이 이정간에게 감동하여 내린 어필, 조형물


전의예안이씨(全義禮安李氏)는 고려 개국 공신의 후예로서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한국의 대표적인 성씨이다. 충효(忠孝), 예절(禮節), 학문(學文)을 중시하며 조선시대 명문가로 성장했으며, 현재까지도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전의예안이씨(全義禮安李氏)의 역사는 한국 사회의 변화와 발전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며, 우리에게 귀감이 되는 많은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결론적으로, 전의예안이씨(全義禮安李氏)는 이처럼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인물들을 배출하며 조선 사회 발전에 기여했고, 그들의 덕행(德行)과 학문(學文)은 후손들에게 귀감(龜鑑)이 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 참고문헌

1. 그링자, [전의이씨 예안이씨 시조 이도 사당과 묘지], 네이버블로그 'C4 헤리티지캠핑', 2021.

2. 전의이씨부정공파TV, [역사다큐멘터리 천년 가문의 뿌리를 찾다], 전의이씨부정공파종문회, 2023.

3. 春和, [전의·예안 이씨 화수회 문중의 역사], 전의·예안 이씨 화수회, 2024.

4. 신민식, [한국주요성씨 전의(全義) 이씨], 세계성씨연맹,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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