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에는 꼭 한 번 가보고 싶은 장소가 있었다. 바로 비봉(碑峯)으로,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봉우리 위에 비석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이 비석은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로, 향로봉에서 비봉 방향으로 걸어가다 보면 비봉의 형태와 정상에 세워진 비석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비봉으로 가는 코스는 비봉탐방지원센터(서울 종로구 구기동 192-1)로 올라가거나 진관사 계곡 코스로 가는 것이 빠른 편에 속한다.

▲ 북한산 비봉, 멀리서도 순수비를 볼 수 있다. ⓒ 김희태

비봉의 높이는 해발 560m에 불과하지만, 정상까지 암릉 구간이 이어져 있고, 별도의 안전장치가 없기에 만만히 생각한다면 올라가기가 쉽지 않다. 안전에 유의하면서 정상까지 가는 건 초보자도 충분히 가능하며, 정상을 가다 보면 사진 명소인 코뿔소 바위를 만날 수 있다.

그렇게 비봉의 정상에 올라 진흥왕 순수비(복제본)를 마주하면서 주변을 돌아보면 주변 풍경이 그야말로 멋진 장관을 연출한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비석이 품고 있는 천사백 년 전 신라의 위용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 코뿔소 바위, 비봉으로 올라가는 길에 볼 수 있는 관광 명소다. ⓒ 김희태
▲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현재 비봉 정상에 세워진 건 2006년에 세운 복제비다. ⓒ 김희태

진흥왕(眞興王, 재위 540~576)은 신라의 전성기를 이끈 정복 군주로 유명하며, 그의 재위 기간 신라는 북진을 통해 영토를 비약적으로 확장했다. 이를 보여주는 흔적이 바로 진흥왕 순수비로, 현재까지 밝혀진 진흥왕 순수비는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황초령 진흥왕 순수비 ▶마운령 진흥왕 순수비 ▶창녕 진흥왕 척경비 등이 있다.

▲ 파주 감악산비 비석의 형태가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와 유사하다. ⓒ 김희태

또한, 연구자에 따라 파주 감악산 정상에 있는 감악산비를 진흥왕 순수비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유는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와 형태가 유사한데다 지난 2022년에 비면에서 '전(典)' 글자가 확인되는 등 정황상 진흥왕 순수비로 볼 만한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다만, 감악산비는 심증이 있지만, 명확하게 순수비로 확정된 건 아니기에 추정의 범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이처럼 비봉에서 만날 수 있는 진흥왕 순수비는 신라 멸망 후 조선시대까지 오랫동안 그 존재가 잊혀졌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비봉에 세워진 비석과 관련한 언급이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택리지(擇里志)>의 기록을 인용해 비봉에 세워진 비석에 무학왕심도차(無學枉尋到此)가 새겨진 사실과 도선(道詵)이 세운 것이라는 기록이 있다.

또한, <완당전집>에도 해당 비석을 요승무학왕심도차지비(妖僧無學枉尋到此之碑)로 언급하고 있다. 즉, 비봉에 세워진 비석의 존재는 인지했으나 해당 비석을 무학대사 혹은 도선의 비로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조선 후기에 실학자들에 의해 비석에 대한 정밀 분석이 시작되었고,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에서 서유구(徐有榘, 1764~1845)는 비봉에 신라진흥왕북순비(新羅眞興王北巡碑)가 있으며, 비문 중 10글자를 알아볼 수 있다고 기록했다.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가 순수비임을 고증하기 전부터 이미 진흥왕 북순비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훼손이 심한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옆면에는 김정희가 새긴 명문이 남아 있다. ⓒ 김희태

<완당전집>과 순수비 옆면의 새긴 명문을 통해 김정희는 1816년(순조 16)과 1817년(순조 17), 두 차례 비봉을 방문해 비문을 읽고 고증하며 총 68글자를 판독했는데, 이를 통해 당시 진흥왕의 영토 순행 사실과 신라와 고구려간 경계 비석을 세운 사실을 확인했다.

▲ 북한산 비봉과 진흥왕 순수비 천사백 년 전 신라의 위용을 느낄 수 있다. ⓒ 김희태

비석의 정확한 건립 시기는 오랜 풍화로 인해 일부 마모된 부분으로 인해 확정할 수 없지만 두 가지 견해가 존재한다. 첫 번째는 <삼국사기>에 기록된 555년(진흥왕 16) 10월 진흥왕이 북한산 순행한 기록을 근거로 이 시기에 비석이 세워졌을 가능성이다.

두 번째는 김정희가 비문을 판독한 뒤 순수비에 새겨진 '남천군주(南川軍主)'의 명문을 주목했는데, <삼국사기>에는 568년(진흥왕 29) 10월에 북한산주를 폐하고, 남천군주를 설치한 기록이 있다. 따라서 순수비에 남천군주 명문이 있다는 것은 비를 세운 시기가 568년 이후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김정희는 비를 세운 시기를 568년에서 576년을 벗어나지 않을 것이라 주장하기도 했다.

▲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국보) 원본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 김희태
▲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지 순수비를 세웠던 자리는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 김희태

현재 국보로 지정된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의 원본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져 보존되고 있으며, 원 위치인 비봉에는 지난 2006년에 복제본이 세워졌다. 또한, 순수비가 있던 자리는 사적(북한산 진흥왕 순수비지)으로 지정된 상태다.

북한산의 비봉과 진흥왕 순수비는 신라의 영토 확장과 북진 정책을 보여주는 문화유산이자 지금도 많은 등산객들이 찾고 있는 북한산의 대표 명소로, 훌륭한 역사·문화 자원인 동시에 관광자원으로서 주목되는 현장이다.

김희태 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