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부 관아와 송덕비(頌德碑)

밀양 관아(官衙)를 찾아서

장창표 논설위원 승인 2023.05.30 08:38 | 최종 수정 2023.05.30 10:57 의견 0

관아(官衙)는 읍성 내에서 중심이 되는 공간으로, 고을 수령이 행정과 각종 사무를 처리하는 곳이다. 각종 문헌에 의하면 밀양부 관아는 100여 칸 내외였다고 하는데,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모두 불에 탔다. 이 때문에 영남루 경내에 초옥(草屋)을 세워 임시 관아로 사용하다가 1611년(광해군 3)에 밀양 부사로 부임한 원유남(元裕男, 1561〜1631)이 관아를 새로 지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 제도의 개편(改編)에 따라 밀양 관아는 밀양 군청으로 명칭이 바뀌었다가 1927년 삼문동(현재 밀양시립도서관 자리)에 밀양 군청을 신축하면서 밀양부 관아는 그 용도가 폐지되었다. 이후에 관아 건물은 개보수(改補修)를 거쳐 밀양읍사무소, 밀양시청, 내일동사무소 등으로 사용되었다. 2010년에 그동안 남아 있는 관아의 여러 건물은 발굴·조사한 결과를 바탕으로 현재의 자리에서 축소⸱복원되었다.

옛 밀양읍사무소

옛 기록에 따르면, 밀양 부사가 행정을 처리하던 동헌을 근민헌(近民軒)이라 불렀는데, 이는 ‘백성을 가까이할지언정 얕잡아 보아 선 안 된다(民可近 不可下, 민가근 불가하).’라는 서경(書經)의 구절에서 따왔다. 관아 내에 있는 매죽당(梅竹堂)은 아사의 별실로 부사의 비서인 책방(册房)이 거처하던 집이다. 관아의 내삼문인 응향문(凝香門)은 아사의 정문이다. 2층으로 위에 큰 북을 매달아 아침저녁으로 문을 여닫을 때 북을 울렸다고 한다.

밀양 관아 앞에는 밀양 부사를 역임하였거나 밀양지역을 관할(管轄)하였던 관찰사 등을 기리는 비석 19기(基)가 자리하고 있다. 원래는 영남루 경내에 있었으나 밀양부 관아를 복원하면서 이 자리로 옮겨온 것이다. 그 가운데 1기는 완전히 박락(剝落, 글씨가 오래되어 깎여서 떨어짐)되어 누구의 비석인지 알지 못한다. 나머지 18기 가운데 2기는 조선 후기에 경상도 관찰사를 역임한 홍재철(洪在喆, 1799〜?)과 서헌순(徐憲淳, 1801〜1868)의 비석이고, 16기는 하진보(河晉寶, 1530〜1585) 등 대부분 조선 중⸱후기에 밀양 부사를 역임한 이들의 비석이다. 비석의 내용은 이들이 밀양에 재임하는 동안의 선정과 공덕을 기리기 위해 밀양부 백성들이 세웠는데, 선정비(善政碑), 유애비(遺愛碑), 불망비(不忘碑) 등으로 불린다.

관아 앞 선정비

서헌순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1863년(철종 14) 경상도 관찰사로 임용되었다. 당시 밀양을 시찰할 때 선정을 베푼 것을 기념하여 영세불망비가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정사(政事)를 다스림에 청렴결백하였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재주가 신과 같이 뛰어났다고 한다. 부산 수영구(수영동)와 사하구(다대동)에도 경상도 관찰사 때의 불망비(不忘碑)가 세워져 있다.

맨 왼편(서쪽)에는 한쪽 모서리가 깨진 비석이 하나 있다. 「통정대부(通政大夫) 행(行) 도호부사(都護府使) 정(鄭) 후(候) 휘(諱) 병하(秉夏) 애민송덕비(愛民頌德碑)」라 새겨져 있다. 비석의 주인공은 부사 정병하(鄭秉夏)이다. 그는 김옥균(金玉均, 1851〜1894)의 영향으로 개화파 정치인이 되었다. 밀양 부사로 재임(1888.5∼1894.7)하면서는 낙동강 유역의 제방을 막아 농토를 넓혔으며, 밀주장정(密州章程, 향약)을 만들고 농정촬요(農政撮要)를 간행했다. 이후, 농상아문 협판(農商衙門 協辦), 내장원장(內藏院長, 왕실 재정책임자)이 되어 출세 가도를 달렸다. 1895년 을미사변(乙未事變) 전날에 명성황후를 거짓으로 안심시키고, 사건 당일 밤에는 궁궐의 당직사령으로 일본 낭인(浪人)들이 국모를 시해할 때 깊이 가담한 인물이다. 이후, 그는 일본 공사 미우라의 사주(使嗾)를 받아 폐비 조칙을 썼으며, 유길준(兪吉濬, 1856∼1914) 등과 고종에게 단발령 선포를 강압하면서 황제의 머리카락까지 잘랐다. 그러나 1896년 아관파천(俄館播遷)이 단행되고, 그는 순검(巡檢)들에게 참살되고 시신은 군중들의 돌을 맞고 찢겼다. 이런 그에게 일제 앞잡이들은 시호(諡號)까지 내리고, 해방 후에도 미국에 빌붙은 친일 인사들이 부사 때의 몇몇 치적(治績)을 내세워 아무런 죄도 묻지 않았다. 누군가의 의분(義憤)으로 한쪽 모서리가 깨진 채 관아 앞에서 충절(忠節)의 고장을 비웃듯 서 있는 비석. 하지만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은 이런 사연을 아는지 모르는지...

밀양 관아 앞은 어떤 곳인가? 이곳은 1919년(기미년) 8차례 밀양 독립 만세운동의 불꽃을 지핀 곳이다. 윤세주와 윤치형의 주도로 밀양 최초의 3⸱13 밀양 장날 만세운동이 일어난 역사의 현장으로 선현(先賢)들의 피와 눈물이 서린 곳이다. 그 고귀한 정신을 기리고자 해마다 3월 13일에는 이곳에서 독립 만세운동을 재현하고 있다.

단재 신채호(申采浩, 1880〜1936)는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가 없다.”라고 했다. 정병하 송덕비와 같은 부끄러운 아픔의 역사도 꼭 기억해야 한다. 이런 흔적들을 지우기보다는 비석 옆에 쉬운 우리말 해설판을 곁들여 오래오래 교훈의 장(場)으로 삼았으면 한다.

K-헤리티지 뉴스 논설위원 장창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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