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문예인, "위창 오세창葦滄 吳世昌"을 아시나요

- 기 간: 2023년 9월 7(목)~12월 25일(월)까지
- 장 소: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2층 서화Ⅱ실 202-4·5
- 전시품: <상형문자로 쓴 어·거·주> 등 30건 56점

박동석 발행인ㆍICPSC이사장 승인 2023.09.13 18:58 | 최종 수정 2023.09.13 19:21 의견 0

국립중앙박물관(관장 윤성용)은 3·1운동에 참여한 애국지사이자 우리 서화 연구에 힘쓴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1864~1953) 서거 70주년을 기념해 ‘근대 문예인’으로서 위창 오세창을 집중 조명한다. 근대 격동기 다양한 직업을 가졌던 오세창의 생애, 예술 활동, 감식안鑑識眼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을 중심으로 조명하는 기회로, 서화실 정기 전시품 교체의 일환으로 이 전시를 마련했다.

(도1) 오세창의 노년 시절 사진 (사진제공: 독립기념관)


다양한 직업을 거친 근대인 오세창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전반을 살아온 오세창은 16세인 1879년(고종 16) 한어(중국어) 역관譯官을 시작으로 언론인, 독립운동가, 서예가 등 여러 직업을 거쳤다.(도1) 그의 다양한 이력은 통번역 업무를 담당한 관원 명단을 적은 <통문관 관안>과 1906년 그가 신문사 사장으로 있을 때 발행한 <만세보>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1919년 3·1운동 때 인쇄된 <기미독립선언서>에도 그의 이름이 등장한다.(도2)

(도2) 기미독립선언서(己未獨立宣言書) 오세창 등 33인, 1919년, 구2766

오세창은 독립운동가로도 활동했다. 그는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조선의 독립을 선언했으며,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3년형을 언도받고 2년 8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독립선언서 왼쪽 두 번째 줄 상단에 그의 이름이 보인다. 오세창은 광복 후 3·1운동의 상징적 인물로 국민의 존경을 받았다.


오세창은 역관 오경석吳慶錫(1831~1879)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일찍이 부친이 수집한 다양한 자료를 보며 성장했고, 훗날 관직에 나아가 개화정책을 수행했다. 관직에서 물러난 이후 언론인으로 애국계몽 운동을 후원했고, 1919년에는 민족 대표로 3·1 운동에 참여해 2년 8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그는 서화가들과 교류하며 활발한 예술 활동을 펼쳤고, 탁월한 감식안으로 서화 연구에 전념해 『근역서화징槿域書畫徵』, 『근묵槿墨』 등 저서를 남겼다.

(도3) 우리나라 금석문을 모은 《근역석묵》 槿域石墨 上·下, 오세창 엮음, 20세기, 구5321·5322

오세창이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금석문 탑본을 오려 붙여 두 첩으로 편집한 첩이다. 상첩에는 삼국-고려의 탑본 40개, 하첩에는 조선시대 탑본 38개가 수록되어 있다. 이 첩은 18~19세기에 편찬된 금석문 탑본첩과 제작 방식이 유사하여, 오세창이 금석문 연구의 맥을 잇기 위해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우리 옛 글씨를 모으고 정리하다

그는 오래된 금속이나 돌에 새긴 글씨 금석문金石文을 수집하고 연구한 오경석에 이어 서예, 회화, 금석문 등 여러 분야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근역석묵槿域石墨』에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금석문 탑본 78건이 수록되어있다.(도3) 특히 이 첩에는 469년 고구려가 평양 성벽을 축조하면서 새긴 <고구려 평양성 석편>(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소장, 이하 석편, 보물) 탑본이 수록되어 있다. 이 석편은 1855년 오경석이 수집해 오세창에게 전해진 것으로 이후 일부 결실되었으나 『근역석묵』의 탑본은 결실 전 모습으로 가치가 높다.

(도4) 옛 기물의 명문을 임모한 병풍 鍾鼎瓦塼銘臨摸圖 十幅屛風, 오세창, 1925년, 증6239, 국립중앙박물관회 기증

옛 문자에 대한 오세창의 관심과 이를 활용한 예술적 감각을 살펴볼 수 있는 작품이다. 고대 중국의 기와와 청동기 명문 25점을 임모하여 병풍으로 제작했다. 제1폭 상단 진나라 와당 ‘여천무극與天無極’부터 제10폭 하단 청동기 명문까지 장수와 다복 등 길상적인 내용의 문구로 이루어져 있다. 그는 명문마다 예서나 행서로 뜻과 유래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적고 직접 새긴 인장을 찍었다.


옛 글씨를 본받아 독창적인 서체를 창안하다

오세창은 금석문을 따라 쓰고(임모臨摸) 문구와 설명을 적어 작품으로 제작한‘종정와전임모도鐘鼎瓦塼銘臨摸圖’ 전형을 확립했다.(도4) 또한 옛 글씨를 바탕으로 독창적인 상형고문象形古文과 전서篆書 작품을 제작했다.(도5) 상형고문을 쓴 <어魚·거車·주舟>는 문자를 보는 순간 그림이 연상되는 작품으로 옛 글씨의 문자성을 벗어나지 않으면서 고대 문자의 그림문자적 특성을 살렸다.

(도5) 상형문자로 쓴 「어·거·주」 象形古文 「魚車舟」, 오세창, 1929년, 증7014, 국립중앙박물관회 기증

「어·거·주」는 『전국책戰國策』에 실린 고사로 “세력이 약하더라도 서로 힘을 합치면 어려운 상황을 극복할 수 있다”는 뜻이다. 3·1운동으로 옥고를 겪은 오세창이 독립의 염원을 담아 이 고사를 쓴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이 작품과 유사한 「어·거·주」를 같은 해 가을에 열린 서화협회전(협전)에 출품했다.

魚車舟說載戰國策

或說燕王以兵合三晉. 其略曰 比目之魚 不相得則不能行 故古之人稱之 以其合兩而如一也. 今山東合弱而不能如一 是山東之知不如魚也. ​又譬如車士之引車也 三人不能行 索二人 五人而車因行矣. 今山東三國 弱而不能敵秦 索二國 因能勝秦矣. 然而山東不知相索者 智固不如車士矣. 胡與越人 言語不相知 志意不相通 同舟而凌波至其相救助如一也. 今山東之相與也 如同舟而濟 秦之兵至 不能相救助如一 智又不如胡·越之人矣. 三物者 人之所能爲也 山東之主遂不悟 此臣之所爲山東苦也. 願大王之熟慮之也.

己巳菊秋 葦滄老人 吳世昌

‘어거주’의 설은 전국책에 실려 있다.

어떤 이가 연왕燕王에게 병력으로 삼진三晉을 통합하기를 설득했다.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비목어比目魚라는 물고기는 서로 함께 만나지 않으면 다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옛사람은 그것이 둘을 합하여 하나와 같다고 일컬었던 것입니다. 지금 산동山東이 약한 나라들을 연합하여 하나와 같지 못하니, 이는 산동의 지혜가 물고기만도 못한 것입니다.

또 비유하건대, 수레를 끄는 인부들이 수레를 끌 때 세 사람이 끌어도 움직이지 않으면, 두 사람을 더 찾아서 다섯이 되어서야 수레가 움직입니다. 지금의 산동 세 나라는 약해서 진秦나라를 대적할 수가 없으니, 두 나라를 더 찾아야 이에 진나라를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산동이 서로 찾을 줄 모르는 것은, 그 지혜가 진실로 수레를 끄는 인부만도 못합니다.

호胡와 월越은 서로 상대의 언어를 모르고, 서로 생각도 통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같은 배를 타고 물결을 치고 넘어갈 때, 서로 도와 구조하는 것에 있어서는 한 몸과 같습니다. 지금의 산동 여러 나라의 관계가 같이 배를 타고 강물을 건너는 경우와 같은데, 진나라 군사가 이르면 한 몸같이 서로 도와 구해 주지 못하니, 지혜가 또한 호와 월 사람만도 못합니다.

이상 세 가지 물건 같은 경우는 사람이면 누구나 그렇게 할 수 있는 일이건만, 산동의 군주들이 끝내 깨닫지 못하고 있으니, 이것이 제가 산동 사람들을 위해서 걱정 드리는 바입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깊이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기사년(1929) 가을 위창노인 오세창


이번에 처음 공개하는 <전서로 쓴 우리나라 문인의 시>에는‘영동관란도인瀛東觀瀾道人(바다 동쪽에서 물결이 일렁이는 모습을 보는 사람)’호가 적혀 있다. 의미상 오세창이 정치적 사건에 휘말려 일본에 망명했던 때(1902~1906년)에 사용한 호로 추정되며, 이 작품에서 중년 시절 필치를 살펴볼 수 있다.(도6)

(도6) 전서로 쓴 우리나라 문인의 시 篆書漢詩, 오세창, 20세기 초 추정, 구8687

오세창이 정치적 사건에 휘말려 일본에 망명했던 1902-1906년 사이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왼쪽에 ‘바다 동쪽에서 물결이 일렁이는 모습을 보는 사람’이라는 의미의 ‘영동관란도인瀛東觀瀾道人’ 호가 있다. 이 호는 다른 작품에서 사용된 예가 없으며, 의미 또한 나라 밖에 있음을 암시하는 듯하다. 내용은 16세기의 문인 유희경劉希慶(1545-1636)과 백대붕白大鵬(?-1592)의 시를 적은 것이다.


옛 것을 연구해 감식안을 기르다

오세창은 옛 것을 연구하고 감식안을 길러 서화를 품평했다. 그는 서체가 매우 독특해 진위 논란이 있었던 김정희金正喜(1786~1856)가 쓴 『손자孫子』에 대해 의견을 남겼다. 그는 『손자』에 찍힌 인장이 김정희 제자 신헌申櫶(1810~1884)의 것임을 밝히고, 김정희가 당나라 서체를 참고했다는 점을 들어 『손자』를 김정희의 진품으로 결론내렸다.(도7) 또한 13세기 고려불화 <수대장존자>(보물)의 기원과 내력을 <고려사>·<해주부지>등의 기록을 참고해 작성했는데, 그림 뒷면에 이 글이 부착되어 있다.(도8)

(도7) 김정희가 쓴 『손자』 金正喜筆孫子, 김정희, 조선 19세기, 동원3440, 이홍근 기증

(도7-1) 김정희가 쓴 『손자』에 대한 오세창의 의견, 1933년

김정희가 해서로 쓴 『손자』는 필체가 독특해 진위眞僞 문제가 일어날 만큼 화제가 되었다. 이 책에는 19세기의 무인 신헌申櫶(1810-1884)의 호 「위당威堂」을 새긴 인장이 찍혀있다. 신헌은 김정희가 제주에 유배되었을 때 서신을 주고받을 만큼 각별한 사이로, 김정희가 무인인 신헌을 위해 전략과 전술의 기본서인 『손자』를 손수 적어 선물했던 것으로 보인다. 오세창은 이 책을 감식하고 뒷면에 김정희가 제자 신헌을 위해 쓴 것이며, 여러 필체를 참고해 쓴 진품珍品이라는 의견을 남겼다.

此冊之出售於世也 或曰阮堂無如是字體. 或曰是阮堂墨跡之另一格者 如蘭亭之聚訟. 余觀其書 參褚氏聖敎序及薛氏石淙詩 刻意以殷人瘦長之篆體 成唐人朗整之楷法. 若非胸藏百千卷金石者 無能辨此. 抑爲申威堂將軍 作兵家書. 故帶劍拔弩張之勢也. 洵藝苑之珍 斷爲阮翁之墨戱三昧也可. 守眞齋主人以爲何如?

癸酉端陽翌日 葦蒼 吳世昌

이 책이 세상에 나왔을 때 어떤 이는 “완당 김정희는 이러한 글씨가 없다.”라고 했고, 어떤 이는 “이것은 완당 글씨의 또 다른 하나의 모습이다.”라고 하여, 왕희지의 「난정서蘭亭序」가 세상에 나왔을 때 진위眞僞 문제로 논란이 많았던 것과 같다.

내가 그 글씨를 보니, 완당이 당나라 명필 저수량褚遂良이 쓴 「성교서聖敎序」와 설요薛曜가 쓴 「석종시石淙詩」를 참고하고, 은나라 사람의 굳세고 힘찬 전서체에 힘을 쏟았으며, 당나라 사람의 분명하고 단정한 해서체로 완성한 것이다.

만약 가슴에 수백, 수천 권의 금석金石과 관련한 저서를 담지 않은 사람은 이 글씨를 변별할 수 없다. 또 위당威堂 신헌申櫶(1810-1884) 장군을 위해서 병가서兵家書 글씨를 쓴 것이므로 칼을 들고 쇠뇌를 당겨서 쏘는 기세이다. 참으로 예술계의 진품珍品이며 완옹阮翁의 뛰어난 작품이라고 단정해도 좋다.

수진재 주인守眞齋主人(이병직)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계유년(1933) 단오 다음날 위창 오세창


오세창은 격변의 시기 민족의 계몽과 독립을 위해 힘썼고, 한편으로는 우리 서화를 연구해 옛 것을 배우고 이를 바탕으로 독창적인 서체를 이룬 근대기 문예인이었다. 오세창의 손길이 남아있는 작품들을 감상하며, 옛 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이루고자 했던(법고창신法古創新) 그의 노력을 느껴보기 바란다.

(도8) 수대장존자 守大藏尊者圖, 고려 1235년, 보물, 구4997
(도8-1) <수대장존자>에 대한 오세창의 의견, 1915년, 그림 뒷면 부착

守天藏尊者像 乃高麗史所載 太祖六年 癸未夏六月癸未 福府卿金質使梁 還獻五百羅漢畫像 命置于海州崇山寺云 之第九十二像也. 海州府志曰 州北崇山寺五百羅漢像 朱梁龍德三年 高麗使臣金質 自汴都來獻 卽太祖天授六年也. 命置于崇山寺. 至恭愍王時 元順帝營建神光寺 遂廢者也. 粤在乙亥先府君得此於神光寺僧. 舊傳㝡末像 有畫人之名姓 或稱吳道子筆云. 然惜未能攷證者. 蓋五百之軸 年久散盡. 伊時寺中已無餘者 則第五百像 無從一覩 而且麗史及府志 並未道誰畫故也. 幸惟一尊來 奠于敝廬 悤悤四十年. 殆使不佞守護天授之寶藏 不致湮沒之意者存歟. 若四百九十九像之蹟 尙在乎人界 頓悟其爲千載上東來之神品而珍護焉, 亦一般奇遇也. 爰綴數語而重裝 廣樹因緣 永資供養.

天授六年癸未後 九百九十三年之乙卯六月吉日 海州吳世昌葦滄甫敬識.

수천장존자상守天藏尊者像은 『고려사』 태조 6년 계미년(923) 6월 계미일에 실려 있는 기사에 “복부경福府卿 김질金質(『고려사』에는 尹質)이 후량後梁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와 오백나한 화상을 바치자 해주 숭산사崇山寺에 두라고 명을 내렸다.”라고 하였다. 수천장존자상은 오백나한화상의 제92번째 상이다.

『해주부지』에 “고을 북쪽 숭산사의 오백나한상은 주량朱梁(후량) 용덕龍德 3년(923)에 고려 사신 김질이 변도汴都(후량의 수도)에서 가져와 바친 것이다. 고려 태조 천수天授 6년(923, 태조 6)이니 숭산사에 두라고 명을 내렸다.”라고 하였다. 공민왕 때에 원나라 순제順帝가 해주에 신광사神光寺를 건립하였지만 끝내 폐찰이 되었다.

지난 을해년(1875, 고종12)에 선부군先府君(오경석)이 신광사 스님에게 이 그림을 얻었다. 예로부터 전해오기를 “가장 끝에 있는 상에는 그림을 그린 사람은 성명이 있는데 당나라 화가 오도자吳道子가 그린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고증을 할 수 없음이 애석하다. 대개 오백의 화상을 그린 축軸이 세월이 오래 흘러 모두 흩어졌다. 당시 절에 이미 남아 있는 것이 없었던 것은 오백나한상 전체는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또한 『고려사』와 『해주부지』에서도 모두 누가 그렸다고는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일존一尊을 집에 모신 지가 어느덧 40년이다. 어쩌면 나로 하여금 하늘이 내려 준 보물을 지켜 보호하도록 하고 사라지게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만약 499상의 진적眞蹟이 아직도 세상에 있다면 그것이 천년의 세월을 거쳐 우리나라에 온 신품神品임을 깨닫고 소중히 여겨 지킬 것이니 역시 하나의 기이한 만남이다. 이에 몇 마디 말을 엮고 다시 장정裝幀해서 인연因緣을 널리 심어 영원토록 공양하는 바탕이 되고자 한다.

천수 6년 계미년 후로 993년이 지난 을묘년(1915) 6월 초하루에 해주 오세창 위창이 경건한 마음으로 기록하다.

* 오세창은 「수천장존자」로 기록했으나 국가지정문화재 명칭에 따라 「수대장존자」로 명명함

오세창은 오경석이 수집한 그림 중 불화佛畫도 감식했다. 이 그림은 깨달음을 얻은 성자인 나한羅漢 가운데 수대장존자守大藏尊者를 그린 것이다. 1915년 오세창이 불화 뒷면에 남긴 글에 따르면 이 그림은 해주 신광사神光寺에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고, 1875년 오경석이 소장하게 되었다. 오세창은 불화를 새로 장정하고 『고려사』 · 『해주부지』 등의 기록을 참고해 그림의 기원과 내력을 기록했다.

(도9) 책가도 冊架圖, 이응록(1808-1883 이후), 조선 1864-1871, 덕수6004
(도10) 책가도 제9폭에 그려진 ‘이응록인’ 인장

책, 중국 고동기古銅器, 귀한 도자기, 붓, 길상적 의미가 있는 꽃과 과일 등이 가득 놓인 책장을 그린 책가도이다. 제5·6폭을 중심으로 좌우 대칭이고 서양화의 투시도법을 변형해 원근감과 공간감을 살렸다. 책가도 속 기물들은 상류층에서 사용했거나 갖길 원했던 것으로, 당대 최신 수입품이나 귀중품이다. 18-19세기 화원 이윤민李潤民·이형록李亨祿 부자父子가 특히 책가도를 잘 그렸다. 이형록은 자신의 이름을 써넣은 도장을 책가도에 그려 넣기도 했는데 이 병풍의 9폭 상단에도 그의 도장이 있다. 이형록은 1864년부터 1871년에 이응록이라는 이름을 사용했기에 이 병풍의 제작 시기를 추정할 수 있다.


영상과 함께 즐기는 책가도

한편, 서화Ⅱ실 202-2·3호실은 서화 전시품 16건을 새롭게 전시했다. 그 중 <책가도8폭병풍冊架圖八幅屛風>은 책가도로 이름난 화원화가 이형록李亨祿(1808~1883년 이후)이 그린 것으로, 구도가 짜임새 있고 채색이 진중해 19세기 책가도의 진수를 보여준다.(도9) 특히 이 작품은 이형록이 1864년에 이응록李應祿으로 개명한 뒤에 제작했음을 병풍 제9폭 그려진‘이응록인’ 인장으로 알 수 있다.(도10) 전시품과 함께 대형 화면에서 상영되는 고화질 영상,“조선시대 책장 그림 이야기”를 보며 책가도의 매력을 충분히 느껴보시길 바란다.

<자료제공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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