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무흘역(無訖驛)의 소중한 흔적

찰방 강봉휴 선정비를 찾아서

장창표 논설위원 승인 2023.11.24 16:18 의견 0

이 땅에 기차가 다니기 전의 교통 운영체계인 역제(驛制)는 고려 때 기초를 마련하고 조선에서 발전시킨 제도이다. 이와 관련된 밀양시 삼랑진읍 미전리 대신경로당 앞에 오래된 비석이 하나 있다. 심하게 마모된 비문을 찬찬히 살펴보면, 음각으로 ‘행찰방강봉휴선정비(行察訪姜鳳休善政碑)’라고 쓴 글씨가 보인다.

이 비석은 현재 밀양에 남아 있는 유일한 찰방비이다. 원래는 무흘역 터 주변에 여러 찰방비가 있었으나 1970년대 새마을사업으로 이리저리 흩어졌고, 또 이곳에 대규모 농공단지가 들어서면서 지형이 많이 변경됐다. 사라질 뻔했던 이 찰방비가 주민들의 안목(眼目)으로 지금의 자리로 옮겨오게 되어 무흘역의 역사를 가까스로 증언하고 있다.

찰방 강봉휴 선정비

삼랑진읍 미전리의 옛 지명은 무흘리로 무흘역이 위치한 데서 그 이름이 유래됐다. 산외면 죽원(竹院, 다원) 출신의 청천 신유한(申維翰, 1681~1752)은 조선통신사제술관(朝鮮通信使製述官)으로 일본에 다녀와 해유록(海游錄, 1720년)을 남겼는데, 1719년(숙종 45) 5월 12일 황산(黃山, 양산)으로 떠나기 전에 점심을 먹은 곳이 바로 무흘역이다.

영남대로(嶺南大路) 옛길에 있던 무흘역에는 나그네들이 잠을 자는 역관(驛館)이 있었으며, 역졸과 길손들을 상대로 장사하는 사람들이 살았다. 영남대로는 조선왕조 성립과 함께 구체적으로 윤곽이 드러난 교통로(交通路) 가운데 한양~동래 간의 960리(380km) 간의 최단코스로 경부선 철로보다 짧은 거리로 강을 건너지 않고 힘을 적게 들이며 고개를 넘을 수 있는 지점을 찾아 왕의 문서를 전달한 벼슬길이라고도 한다. 무흘역은 공문 전달이나 관물(官物) 수송 공무를 띤 출장 관원(官員)에게 말을 제공하거나 숙박 등의 편의를 위해 설치됐다. 역관과 파발 참에 지급된 공수전(公須田, 조선 시대 지방관청의 경비를 조달하기 위해 만든 밭)이 산재하여 역정(驛丁)들이 경작했고, 역마를 쉬게 하고 사육하는 마장(馬場)도 있었다. 공단 안쪽의 무흘역 옛터로 추정되는 곳에서 주춧돌, 기와 파편, 그릇 등이 발굴됐다.

옛 무흘역 주변(삼랑진 미전리)

강봉휴(姜鳳休, 1694~1749)의 본관은 금천(衿川), 자(字)는 의백(儀伯)이다. 귀주대첩으로 유명한 강감찬(姜邯贊, 948~1031) 장군의 20세 손으로 1735년(영조 11) 문과에 급제하여 황산도(黃山道, 조선 시대 경상도 양산의 황산역을 중심으로 한 역도) 찰방(察訪, 조선 시대 각 도의 역참을 관리하던 종6품의 외관직, 1736~1738 재직), 사헌부 지평, 사간원 정언, 사헌부 장령, 순천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진사(進士)였던 1727년 영조에게 상소(上疏)한 사실이 영조실록에 실려 있다.

「해주(海州) 진사 강봉휴 등이 소(訴)를 올려 본주의 청성묘(淸聖廟, 백이·숙제의 위패를 모신 사당)에 비석을 세워 주자(朱子)가 쓴 백세청풍(百世淸風) 넷 대자를 새기기를 청하니 임금이 이를 허락하였다.」

강봉휴의 선정비는 두 개가 세워져 있다. 하나는 1738년 삼랑진읍 미전리에 세우고, 다른 하나는 1740년 양산의 황산역 앞에 세워졌다. 그가 1736년(영조 12) 6월 1일 황산도 찰방에 제수된 뒤 달을 넘겨 부임한 사실이 영조실록에 나오며, 1738년까지 재직한 것으로 1871년에 편찬된 영남읍지(嶺南邑誌), 황산역지선생안(黃山驛誌先生案, 조선 시대 각 관아에서 전임 관원의 성명·관명·생년월일·본적 등을 기록하던 책)에도 실려 있다. 삼랑진 미전리의 비문은 마모가 심하여 그의 선정 내용은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맨 끝 행 아래에 무오(戊午, 1738년)라는 각자(刻字)가 희미하게 보인다. 이곳 주민들이 그가 성균관 전적으로 제수되어 서울로 올라갈 때 선정비를 세웠음을 알 수 있다.

황산도 속역분포(대동여지도)

삼랑진읍 미전리 대천마을에서 화성마을로 넘어가는 고개는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는 무흘현(無訖峴)이라고 되어 있고 대개 무흘 고개라고 불렀다. 이 고개는 영남대로 주요 길목으로 해동지도(海東地圖), 여지도(輿地圖), 지승(地勝)에서는 무흘치(無訖峙)라 표기되어 있다. 영남대로 밀양 구간은 삼랑진 작원(鵲院) 마을에서 상동면 옥산리 여수(麗水) 마을까지이다.

1902년 일본인이 경부선 철도를 부설하면서 무흘산을 관통하는 이곳 지명을 무월(無月)로 바꾸고 터널 이름도 무월산수도(無月山隧道)로 명명했다. ‘수(隧)’는 굴이니, 수도(隧道)는 ‘바위를 뚫어 만든 굴 길’을 뜻한다. 원래 무흘은 처음 지을 때 ‘고개가 하도 높아 끝이 보이지 않는다’라는 뜻을 나타내는 한자어인데도 굳이 ‘달이 보이지 않는다’라는 의미로 억지로 집어넣었다.

월연 수도는 용평동 월연대(月淵臺)에서, 청룡산 수도는 용성리 청룡산(靑龍山)에서, 작원관 수도는 작원관(鵲院關)에서 각각 취했다. 하나같이 철로가 지나는 지점에 근거해 이름을 지었다. 여러 근거로 볼 때, 무월은 ‘無月(무월)’이 아닌 ‘無訖(무흘)’로 표기해야 마땅하다. 무월산, 무월역, 무월고개, 무월수도, 무월터널에 들어 있는 무월(無月)을 본래의 이름인 ‘무흘(無訖)’로 바로 고쳐야 한다. 아울러 선정비 보존에도 특별한 조치(措置)가 있었으면 한다.

K-헤리티지 뉴스 논설위원 장창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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