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아문화재지킴이 스티디활동으로 광주광역시 북구 "미지정 문화재인 만주사(晩洲祠)" 답사

- 공원 조성이나 개발 사업을 위해 미지정문화재가 철거되는 현실에 직면에 있다
-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왕에게 상소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자결한 연제 송병선(淵齋 宋秉璿)선생

김오현 선임기자 승인 2023.11.30 00:42 | 최종 수정 2024.02.16 12:21 의견 0

기아지킴이 스티디활동으로 광주 북구 "미지정 문화재인 만주사(晩洲祠)" 를 지키기 위해 애쓰는 후손 노태희선생과 함께 기념사진(사진촬영 박정세)

만주사(晩洲祠)는 광주광역시 북구 소해로 11번지에 위치하며 연제 송병선(淵齋 宋秉璿, 1836~1905)과 소해 노종용(蘇海 盧種龍, 1856~1940)을 배향한 사우로 크게는 만주사, 원풍정(농암정), 경의재(소해정)로 총 세 채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우선 이 두분을 모시는 사당인 만주사는 일제 강점기인 1944년에 건립되었다.
만주사의 오른쪽 내삼문을 열고 나가면 1817년에 모정(茅亭)으로 지어졌다가 태풍으로 쓰러진 것을 1913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중건하고 마지막으로 1973년에 중수를 한 원풍정(농암정)이 있고, 계단 아래 큰 마당에는 강학당으로 쓰여진 경의재(소해정)가 있다. 또 외삼문을 벗어나 경의재의 왼편으로 나가면 현대에 제작된 비석군이 다수 있는데 그 중에 특이한 것은 효열비인데, 임진왜란 금산전투에서 순국한 노희서(1558-1592)의 12세손 노병두(소해 선생의 손자)에게 시집 와서 4대 독자인 노지섭을 잘 길러 자손을 번성시켰다는 내용으로써 윤보선 전 대통령의 친필로 쓰여졌다.

​​​​만주사 전경, 연재 송병선(淵齋 宋秉璿)선생과 소해 노종용(蘇海 盧種龍)선생의 영정 사진

▶ 만주사(晩洲祠)
만주사(晩洲祠)는 문충공(文忠公) 연재 송병선(淵齋 宋秉璿)선생과 소해 노종용(蘇海 盧種龍)선생을 모시고 향사하는 곳이다. 연재 선생의 진상을 중앙에 봉안하고 소해 선생의 진상을 동벽에 봉안하였다.
순종 1941년 호남의 향교. 서원 등 인근 고을의 수백 유림의 연이은 발의로 연재 선생과 소해 선생의 유풍을 추모하기 위하여 일제 강점기가 절정에 이르렀던 1944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된 사우를 지금의 자리에 창건하였다. 이곳은 이에 앞서 소해선생이 생존 시에 스승이신 연재공의 영정을 봉안했던 곳이기도 하다. 한편, 광주시에서는 2011년 7월 29일에 만주사 앞길을 소해로라 이름 짓고 현재에 이르고 있다.

출입문 4짝이 모두 하단에 태극기 문양을 하고 있는데 일제강점기 때 이런 문양은 불가능한 일이었는데 평소에는 태극기 문양 전면에 얇은 오동나무 판재를 덧대어 썼고 행사때는 판재를 떼고 독립의 의지 표현

한말의 문신이자 우국지사인 연제 송병선(淵齋 宋秉璿, 1836~1905) 본관은 충남 은진이며 자 화옥(華玉), 호는 연재(淵齋)라 한다. 우암 송시열의 9세손으로 1836년에 출생하여. 서연관, 경연관, 참판을 거쳐 대사헌에 올랐다. 항상 옳은 것을 지키고 사악한 것을 배척하며 일본의 침략을 극구 반대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뒤 이의 부당함을 왕에게 상소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음독자결하였다. 시호는 문충(文忠)이고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이 수여되었다.
소해 노종용(蘇海 盧種龍)은 농암정 건립자 농암 노재규(聾岩 盧在奎, 1836 - 1920)의 아들로서 일찍이 학문에 뜻을 두고 송병선과 최익현(崔益鉉)에게 사사하였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어 송병선이 자결하고 최익현이 일제에 잡혀 대마도에서 순절하자,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 광주 일곡동에 내려와 학문에 전념하며 후진양성에 힘썼다. 저서로 소해문집(蘇海文集)이 있다.

​​​​원풍정 앞에서 후손과 단체기념촬영

▶원풍정(願豊亭), 별칭으로 농암정(聾岩亭)
광주광역시 북구 일곡동에 있는 일제강점기에 중건된 정자로 애초의 건물은 1817년에 모정(茅亭)으로 지어졌는데 농암 노재규(聾岩 盧在奎, 1836 - 1920)선생이 1897년에 초당(草堂)으로 고쳐 짓고 1912년에 태풍으로 붕괴되자 이듬해인 1913년에 중건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변했다. 1973년에 또 한번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건물의 뒷켠에 아궁이를 놓고 굴뚝은 앞 마당에 아주 낮게 설치하여 연기가 주변에 깔리면 구름 위에 앉아 있는 듯 했다고한다. 또한 건물 중심에는 온돌방이 있고 전후좌우에는 우물마루가 놓여있는데 이들 마룻장은 한결같이 옹이가 없는 것만을 엄선하여 깔았다. 이는 일본을 마치 나무 판재에 박힌 옹이와 같은 잡티라 여기고 옹이가 없는 마룻장과 같아야 한다는 뜻으로 배일정신(排日精神)을 후손과 후학들에게 가르쳤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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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집으로 지리산에 남았던 마지막 지리산 금강송으로 지은 집

농암(聾岩)선생은 소해(蘇海)선생의 부친으로 헌종 1836년에 일곡동에서 출생했는데 어려서부터 성품이 온화하고 어질며 검소하였다. 부모의 병환에 극진히 간호하였으며 상을 당해 3년 간 시묘하였다. 선대의 교훈을 준수하고 흉년을 당하면 향리 주민을 정성을 다하여 구휼하며 향리를 떠나는 사람이 없게 하였다. 그 선행이 계속되자 임금께 알려지고 1889년에는 사헌부 감찰에 제수되고 1891년에는 돈녕부 도정에 얼마 후에는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에 제수되어 3대를 추후 증직하는 등 임금의 은총이 융숭하였으나 나아가지 아니하고 오래 전의 모정을 1897년에 초당으로 고쳐 짓고 그 이름을 우국원풍(憂國願豊/나라를 걱정하며 풍년을 기원함)의 뜻의 원풍정으로 하였다. 또한 이 집은 원풍정 외에 농암정(聾岩亭)이라고도 불리운다. 이것은 건립자인 노재규 선생의 아호가 '聾岩(농암)'이기 때문이다. 농암이란 어지러운 이 세상의 온갖 시비를 듣지 않기 위해 고의로 귀가 안들리는 농아처럼 행세하며 세상을 등지고 살아간다는 뜻이다.
최익현(崔益鉉), 기우만(奇宇萬), 오계수(吳繼洙), 오준선(吳駿善) 등을 비롯한 29명의 당시의 석학의 기문과 시가 다수 있다. 원풍정은 건립자 농암 노재규(聾岩 盧在奎) 선생의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잘 간직하고 있는 장소이다.

만주사 답사 후 소해선생께서 건립하신
경의재 마루에서 기념촬영

▶ 경의재(景義齋)별칭으로 소해정(蘇海亭)
경의재는 광주광역시 북구 일곡동에 있으며, 소해 노종용(蘇海 盧種龍, 1856~1940)이 1930년 애초에 소해정(蘇海亭)이란 이름으로 건립하였다. 선생은 최익현(崔益鉉, 1833~1907), 송병선(宋秉璿, 1836~1905) 등으로부터 학문을 배웠고, 구한말 스승의 뜻을 이어받아 여러 차례 상소를 올리면서 을사오적(乙巳五賊 : 이완용, 이근택, 이지용, 박제순, 권중현 등)을 물리치고 나라를 보전하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자, 고향인 현재의 광주광역시 북구 일곡동으로 와서 교육과 후진 양성을 하였고, 본인의 아호를 딴 소해정을 지었다. 1965년 노종용의 아들인 노진영이 소해정을 같은 공간에 있는 만주사(晩洲祠)의 강당으로 헌납하면서 경의재(선친의 절의를 숭모한다는 의미)로 이름을 바꾸었다.
정면 5칸, 측면 3칸, 팔작지붕으로 내실에 쪽마루를 두었다. 주련은 석촌 윤용구가 썼으며 고광선, 노상익. 기우만 등 당대의 유명한 문인들이 시, 기문을 무려 46개의 현판을 남겼다. 강학을 하는 곳이라는 뜻으로 면수재(勉修齋)라고도 부르고 있다.

만주사 후손인 노태희선생으로부터 만주사, 원풍정, 경의재 등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는 회원들...

▶ 미지정문화재
미지정문화재는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의 지정을 받지 않은 문화재를 말한다. 미지정문화재는 지정문화재에 비해 보호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경우가 많다. 그 중에서도 공원부지 수용으로 인해 철거되는 비지정문화재의 사례가 증가하고 있다.
공원부지 수용은 공원 조성을 위해 필요한 토지를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수용하는 것을 말한다. 공원 조성은 국민의 휴식과 여가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중요한 사업이지만, 그 과정에서 문화재가 철거되는 것은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미지정문화재가 공원부지 수용으로 인해 철거되는 이유
첫째, 미지정문화재의 가치가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미지정문화재는 지정문화재에 비해 연구와 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그 가치를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다.
둘째, 미지정문화재의 보호를 위한 법적 근거가 미흡하기 때문이다. 미지정문화재는 지정문화재에 비해 보호받을 수 있는 권리가 상대적으로 약하다. 따라서 공원 조성의 필요성이 미지정문화재의 보호보다 우선시되는 경우가 많다.

경의재 건물에 고광선, 노상익. 기우만 등 당대의 유명한 문인들의 시, 기문 등 46개 현판들...

◾️미지정문화재가 공원부지 수용으로 인해 철거되는 문제점
• 문화재의 소실 : 미지정문화재는 지정문화재에 비해 보호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공원부지 수용으로 인해 철거되면 해당 문화재는 영영 사라지게 된다.
• 역사적 가치의 상실 : 미지정문화재는 해당 지역의 역사적 가치를 보여주는 중요한 유산이다. 공원부지 수용으로 인해 철거되면 해당 지역의 역사적 가치가 상실될 수 있다.

◾️미지정문화재가 철거되는 현실을 개선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
• 미지정문화재도 지정문화재 못지않게 중요한 역사적·문화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인식을 확산시켜야 한다.
• 미지정문화재에 대한 조사·발굴을 확대하여 그 가치를 널리 알리고, 보호의 필요성을 제고한다.
• 미지정문화재의 보호를 위한 법적·제도적 기반을 마련한다. 예를 들어, 미지정문화재의 철거를 금지하거나, 철거가 필요한 경우 문화재청의 허가를 받도록 하는 등의 규정을 마련할 수 있다.
• 시민들의 관심과 참여를 유도한다. 미지정문화재에 대한 인식 개선을 위한 교육과 홍보를 강화하고, 시민들이 미지정문화재의 보존을 위한 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만주사, 원풍정, 경의재로 총 세 채로 구성된 건물들을 살펴보고 있는 회원들...

미지정문화재는 우리의 과거를 이해하고 미래를 설계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그러나 개발논리에 밀려 미지정문화재가 사라진다면, 우리의 역사와 문화는 점점 더 소실될 것이다. 미지정문화재가 철거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미지정문화재의 가치에 대한 인식 개선, 조사·발굴 확대, 미지정문화재의 보호를 위한 법적·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야 한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미지정문화재가 철거되는 것을 막고, 우리 문화유산을 온전히 보존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또한 만주사는 비록 미지정문화재이지만 광주지역의 근대 역사를 보여주는 중요한 문화재이다. 또한, 송병선선생과 노종룡선생은 한국 근대사의 격동기를 살다간 애국지사로, 그들의 넋을 기리는 사당은 역사적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참고 문현
1. 김동환, [광주고전국역총서 누정제영], 광주광역시, 1992.
2. 안병우, [디지털광주문화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3.
3. 천득염, [호남의 누정], (재)한국학호남진흥원, 2023.
4. simpro해피트래블, [광주 북구 문화재 일곡동 만주사], 네이버 블로그,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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