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
민비(閔妃), 명성황후(明成皇后)로 알려진 고종(高宗)의 정비(正妃)로 성은 여흥(驪興) 민(閔)씨이고 어릴 적 이름은 자영(玆暎)이었다. 조선시대 중후기의 문신, 척신, 정치인으로 한성부 판윤 등을 직책을 지낸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의 아버지로 숙종의 장인이었던 민유중(閔維重, 1630년 ~ 1687년 6월 29일)의 6대손이며 민유중의 아들 민진후(閔鎭厚, 1659년 ~ 1720년)의 5대손이다. 할아버지 민기현(閔耆顯, 1751년 ~ 1811년 8월 1일)은 예조참판과 개성 부유수를 지냈으나 아버지 민치록(閔致祿, 1799년 ~ 1858년 09월 17일)은 종4품 사도시(司䆃寺) 첨정(僉正)에 이르렀다. 민치록의 재취부인 감고당 한산 이씨의 딸로 태어났다.
생애, 호칭 문제
민비(閔妃, 1851년 11월 17일 (음력 9월 25일) ~ 1895년 10월 8일 (음력 8월 20일))는 조선의 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인 고종(高宗, 1852년 9월 8일(음력 7월 25일) ~ 1919년 1월 21일)의 왕비이다. 고종의 정비로 1871년 첫 왕자를 5일 만에 잃었다. 조선 수구파의 상징이며 개화를 반대하여 조선 근대화에 걸림돌이 되었던 최익현(崔益鉉, 1833년 12월 5일 ~ 1907년 1월 1일) 등과 손잡고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1821년 1월 24일(1820년 음력 12월 21일) ~ 1898년 2월 22일(음력 2월 2일))의 간섭을 물리치고 고종의 친정을 유도했다. 민씨 척족을 기용함으로써 세도 정권을 부활시켰으며, 1882년 임오군란 이후에는 일본의 견제를 위해 청나라의 지원에 의존하다가 1894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배한 이후에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했다. 처음에는 개항에 미온적이었으나, 점진적인 개화 시책을 통해 친일 성향을 띤 급진 개화파의 개화 정책에 제동을 걸었다. 그러다가 주조선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楼)의 공모로 을미사변(乙未事變)으로 잘 알려진 1895년 10월 8일(음력 8월 20일) 일본인 병사와 낭인들에게 암살되었다.
민비 사후에 대한제국이 성립되어 고종은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로 1897년 10월 12일부터 1907년 7월 19일까지 재위했다. 민비는 사후에 황후로 추증되었다. 정식 시호는 효자원성정화합천홍공성덕제휘열목명성태황후(孝慈元聖正化合天洪功誠德齊徽烈穆明成太皇后)로 명성황후(明成皇后) 또는 명성태황후(明成太皇后)로도 불린다.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지어진 건청궁에서 주로 생활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본고에서는 설명 내용에 따라서 민비 또는 사후 추증된 명성황후라는 칭호를 함께 사용하게 되었음을 밝혀 둔다.
사진의 탄생
인류 최초의 사진이 탄생한 것은 1826년 프랑스에서의 일로 지금으로부터 약 200년 전의 일이다. 조선(朝鮮)에서는 순조(純祖) 26년의 시기에 일어난 일이다. 바늘구멍 사진기와 같은 원리인 어두운 상자(暗箱子)인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 에 투영된 영상을 감광판으로 포착해 상을 물체에 영구적으로 정착시키는 방법을 발명한 것이 시초가 되었다. 프랑스의 조세프 니세포르 니에프스(Joseph Nicéphore Niépce)가 감광성 천연 아스팔트 (bitumen of Judea, 유태 비투먼 또는 역청)을 사용하여 최초의 사진이 구현되었다. 감광성 천연 아스팔트가 빛의 노출에 따라 굳는 성질을 이용해서 사진을 구현할 수 있었으나 8시간 정도의 장시간 노출이 필요하여 상업화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프랑스 사람인 루이 쟈크 망데 다게르(Louis Jacques Mandé Daguerre)는 니에프스의 성과를 바탕으로 사진술을 발전시켜 은도금 동판과 요오드를 이용하여 1833년에 다게레오타입(Daguerreotype) 이라고 하는 다게르의 은판 사진술을 완성하는데 성공하였다. 다게레오타입은 사실상 인류 최초의 카메라라고 할 수 있으며 비교적 짧은 노출시간과 선명한 결과물을 기반으로 상업화에 성공하여 1860년대에 새로운 방식의 보다 경제적인 사진 기술이 도입될 때까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노출시간이 비교적 짧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인물을 촬영하기에는 노출시간이 길어 건축물과 같은 정물이 주된 촬영 대상이었다.
1841년에는 영국의 윌리엄 헨리 폭스 탈보트(William Henry Fox Talbot)가 금속을 원판 재료로 하는 기존의 방식과 차별화된 종이에 인화하는 방법인 칼로타입(calotype)을 발표하게 된다. 이 방식은 음화(negative) 상태로 감광판에 영상을 포착해서 양화(positive)를 만들어 내는 것으로 오늘날의 사진 기술처럼 하나의 음화를 사용하여 대량의 양화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카메라와 사진의 보급
1851년에 영국인 프레드릭 스코트 아처(Frederick Scott Archer)의 콜로디온(collodion) 습판이 발명되어 경제적인 사진 기술이 보급되었다. 이어서 1871년에는 리챠드 매독스 (Richard Maddox)의 젤라틴 건판의 발명으로 이어졌다. 1889년에는 사진의 원판(plate)이 이스트먼 코닥(Kodak)사에서 셀룰로이드를 두루마리의 형태로 제조된 롤 필름(roll film) 생산되어 판매되기 시작했다.
개화기 사진의 역사
2019년에 출판된 중앙대학교 이경률 교수의 ‘한국 최초의 사진에 관한 실증적 고찰 - 현존하는 1860년대 한국 사진을 중심으로 -’라는 제목의 논문에 의하면 한국 사진의 출발로서 최초의 사진은 1839년 사진이 발명되고 난 후 거의 20년이 지난 1860년대 나타난 것으로 조사 되었다. 이러한 조선에서의 사진의 늦은 전파와 수용의 가장 큰 이유로 1842년 중국 아편전쟁의 영향으로 거의 30년간 조선이 지향한 쇄국정책 특히 서양 문물에 대한 배타적 정책에 기인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서양 문물을 대표하는 것들 중의 하나인 사진은 당시 개인이 소지한다는 것만으로도 처벌 대상이었다고 한다.
현존하는 한국 초기 사진들은 대부분 1860년대 외국인에 의해 촬영된 것들로 역사적 사건과 종교적 기록과 관계되어 있다. 한국 최초의 사진은 1997년에 발견된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 함선 갑판에서 촬영된 세 장의 조선인 사진으로 알려져 왔으나 2008년에 1863년 조선 연행사 일행이 북경에 갔을 때 당시 러시아 공사관 사진관에서 촬영된 여섯 장의 사진이 발견되었다. 따라서 1863년 연행사(燕行使) 일행의 사진들이 오늘날 현존하는 한국 최초의 사진인 셈이다.
그 후에도 중국을 방문한 사신들 중에는 사진을 몰래 찍는 모험을 감행하기도 하고 사진을 간직하고 돌아와 주위의 친지들에게 소개한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또한, 미국과 일본의 사진사들이 강화도에 상륙해 신미양요(1875년 9월 20일 일본군함 운요호(雲揚號)의 강화해협 불법침입으로 발생한 한일 간의 포격 사건)의 전투 장면, 1876년 2월 27일(고종 13년 음력 2월 3일) 조선과 일본 제국 사이에 체결된 조약인 강화도조약 (江華島條約 또는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 Japan-Korea Treaty of 1876))당시의 현장을 촬영한 적도 있었다.
조선에서의 사진 촬영의 역사
사진 도입에 관련된 자료는 극히 미미해서 논의가 있을 때마다 항상 등장하는 기록은 「한성순보」 1884년 2월 14일 자의 잡보란에 실린 기사이다. 이 신문에 의하면, “지난 여름 저동에 살고 있는 우후를 지낸 김용원이 이 일본인 사진사 혼다슈노스케를 초빙해서 촬영국을 설치했으며 금년 봄에는 마동에 사는 외무아문 주사를 지낸 지운영 또한 촬영국을 설립했는데 일본에 가서 사진술을 배워 왔으며 그 기술이 정교하다.”고 두 사람의 촬영국(사진관) 개업에 대해 보고하고 있다.
김용원(金鏞元, 1842년 – 1896년 또는 1892년)은 도화서의 화원으로 우후(虞候)를 지냈으며 조선 후기 제25대 철종의 어진과 의궤 제작에 참여하였다. 1876년에는 김기수(金綺秀)가 이끄는 수신사(修信使)의 수행화원으로 일본에도 다녀왔다. 수신사 일행에 선발된 이후에는 주로 기술직 전문가로서의 공적 임무를 수행하였다. 일본에서 근대화된 과학 문명을 접한 후, 1879년경 일본 공사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의 권유로 사진술을 배우게 되었다. 부산의 일본인 거류지에서 일본인 사진사로부터 사진술을 처음으로 배우기 시작한 그는 일본을 왕래하며 사진기기를 구입하여 우리나라 최초로 사진술을 도입하게 된 역사적인 사람이 되었다. 김용원은 1883년 여름 서울 저동(苧洞)에 촬영국(사진관)을 설치했다. 이 사진관은 김용원이 일본인 사진사 혼다 슈노스케(本多修之助)를 고용하여 운영했지만, 우리나라 사진관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1884년 봄에는 지운영(池運永, 1852년 ~ 1935년 6월 6일)이 촬영국을 개설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지운영은 의사 겸 한글학자 지석영(池錫永)의 형이며 독립운동가 겸 정치가 지청천(池靑天) 장군의 7촌 숙부이며 독립운동가 겸 정치가 지달수(池達洙)의 삼종조부(三從祖父)이다.
1880년 이후에는 김용원에 이어 지운영과 함께 황철(黃鐵, 1864년 – 1930년)도 사진술 연구에 열성적이었다고 한다. 이들은 사진 도입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선각자이다. 황철은 김용원이나 지운영과는 달리 일본이 아닌 중국 상해(上海)에서 사진술을 습득했으며 서구적인 사진 문화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었다.
황철이 사진 기술을 배우고 사진 기재를 구입해 귀국한 것은 1882년 말경으로 양력으로 는 1883년 2월이다. 자신의 집과 종로의 대안동, 소안동 그리고 충무로 등지에서 사진관을 개업하고 많은 사진을 남기는 등 활발한 사진 활동을 하였다. 지운영은 1882년 겨울에 사진 기술을 배울 목적으로 일본에 건너가 코베(神戸)의 히라무라 사진관(平村写真館, 1870年(明治3年)에 코베 모토마치(神戸元町)에서 개업하여 현재도 운영 중인 사진관)에서 공부했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교묘한 빛의 기술인 사진술을 습득했다고 한다. 일본에서 귀국해서 종로 3가 부근 마동에서 촬영국을 설치하고 운영했으나 1882년의 임오군란으로 문을 닫게 되었다.
김용원, 황철, 지운영 등은 사진관을 설립해 초상 사진을 촬영하는 방법으로 민중 초상 사진 시대를 개척하며 조선에 사진을 도입한 선각자들이다. 이들의 활동을 통해서 왕실과 민비 (명성황후) 사진 촬영의 시대적 배경 및 촬영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조선에서의 사진의 정착과 발달
조선에 사진이 도입되어 정착해 가는 과정은 정치적 영향과 사회적인 저항으로 인한 시련과 좌절의 연속이었다. 1884년에 갑신정변이 일어났을 무렵에는 수구 세력들이 사진관을 파괴하고 사진을 찍는 행위 자체를 금지하기도 하였다. 샤머니즘의 영향으로 많은 근거 없는 속설들이 유포되어 일반인들이 서구 문물을 거부하였으며 사진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사진 기계가 나무를 비추면 나무가 말라 죽고 집이나 담에 비추면 집이나 담장이 무너진다던가 풀에 비추면 말라 죽는다거나 죽음을 불러온다는 둥 위협적이며 불행을 예고하는 소문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그리고 셋이 사진을 찍으면 가운데 사람은 얼마 살지 못한다던가 부부가 같이 촬영하면 이별한다고 해서 사진을 멀리하도록 하는 근거 없는 경고성 소문이 유포되기도 하였다.
왕실 사진 촬영에 관한 기록
고종이 처음 사진을 찍은 것은 개항 직후인 1880년대로 추정된다. 윤치호(尹致昊, 1865년 1월 23일 ~ 1945년 12월 6일)의 일기에는 고종이 “1884년 3월 10일과 13일 사진을 촬영했다”는 기록이 있다.
고종의 사진을 처음 찍은 사람은 <조선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는 책을 남긴 미국인 퍼시벌 로웰(Percival Lawrence Lowell, 1855년 3월 13일 ~ 1916년 11월 12일)이다. 그는 애리조나 천문대를 세운 세계적으로 유명한 천문학자이자 외교관으로, 조선이 1883년 미국에 보빙사(報聘士, 1883년 7월 15일 조선이 최초로 서양(미국) 국가에 파견한 외교 사절단)를 파견했을 때 일본에서 일행과 합류하여 안내를 맡았다. 고종은 그의 공을 치하하는 의미로 한국에 초청해 1883년 12월 20일부터 이듬해 3월 18일까지 체류했다. 그는 윤치호의 소개로 1884년 3월 10일 창덕궁에 들어가 농수정을 배경으로 고종 사진 3장과 왕세자(순종) 사진 1장을 찍었다. 고종은 장대석에 서거나 앉아서 사진을 찍었고, 경치도 촬영했다. 농수정을 배경으로한 사진에 나타난 빛과 그림자의 상태로 보아서 촬영 시각은 오후 1~2시로 추정된다.
그로부터 며칠 후에 지운영은 자신의 사진술을 공식화하기 위해 고종의 어진(御眞)인 초상 사진 촬영을 시도하여 1884년 3월 16일에 고종을 알현하고 어진을 촬영하는 데 성공했다. 조선인으로는 최초로 국왕의 사진을 찍는 영광을 얻게 되었다. 민비도 알현했을 가능성도 높고 당시에 민비의 사진 촬영이 있었는 지 없었는 지를 증언할 수 있는 중요한 인물일 것이다.
최인진 사진역사연구소장의 조사에 따르면 퍼시벌 로웰과 지운영이 며칠 간격으로 사진을 찍게 된 이유는 3월 5일이 왕세자의 10번째 생일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민비와의 사이에 태어난 첫아들을 잃은 고종은 세자가 열 살이 된 것을 무척 기뻐했고, 궁에서는 계속 잔치가 이어졌다고 한다. 나중에 지운영의 사진을 받은 민비는 측근이던 윤치호에게 “동궁 야야(도련님)의 어진을 보았느냐”면서 기뻐했다고 한다. 지운영과 퍼시벌 로웰이 촬영한 사진은 5개월의 시차를 두고 고종에게 전해졌다고 한다. 지운영은 사진 촬영 7일 후에 사진을 뽑아(현상하고 인화하여) 바칠 수 있었으나 로웰은 미국으로 돌아간 뒤 5개월 만에 자신의 다른 사진 53장과 함께 사진첩으로 고종에게 보냈다고 한다.
민비의 표준영정
명성황후(민비)의 표준 영정은 1910년에 출판된 이승만의 ‘독립정신 (초판)’에 실린 민비의 사진을 바탕으로 영정과 인물 초상화 전문 화가로 활동하는 권오창 화백이 제작한 것이 운현궁과 여주 생가에 전시되어 있다.
앞에서 소개한 상황을 전체적으로 고려하여 판단하면 민비가 1895년 10월 8일에 시해되기 이전에 사진이 촬영되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그동안 약 세 종류의 사진이 민비의 사진으로 단행본과 교과서에 오랫동안 소개되어 왔으나 진위를 놓고 공방이 끊이지 않았다. 급기야는 교과서에 실렸던 사진마저도 진위 시비로 사라지게 되었다. 2017년에는 족자에 민씨부인(閔氏夫人)이라고 쓰여있는 하얀 두건을 쓴 여인의 초상화가 발견되었다. 이 초상화의 주인공이 명성황후라고 추측하기도 하고, 일각에서는 운현궁에서 발견되었으니 흥선대원군의 아내인 여흥부대부인 민씨(驪興府大夫人 閔氏)일 가능성이 높다고 추측하기도 한다. 이 초상화도 이제까지 소개된 세 종류의 사진에 논란을 더하고 있다.
앞으로 9회에 걸쳐 그동안 민비의 사진으로 주장되어온 네 가지 종류의 사진 및 초상화에 관하여 진위에 관한 논점과 주장을 소개하면서 다양한 각도에서 역사적 실체에 접근해 보고자 한다. 불과 130년 전의 일이지만 역사적 진실을 밝히는 일은 어렵기만 하다. 추가적인 자료와 합리적인 분석을 통하여 독자들과 함께 역사적 실체에 다가가 볼 예정이다.
권오창 화백이 명성황후의 영정 제작에 참고한 것으로 알려진 1910년에 이승만이 저술한 ‘독립정신 (초판)’에 실린 명성황후의 사진
<유우식 문화유산회복재단 학술위원>
ICPSCⓒ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