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4-5일(1박2일)에 기아문화재지킴이 25명의 회원과 가족들을 모시고 안동문화재지킴이 김호태 이사장님의 초청으로 안동의 다양한 문화재들을 둘러보는 뜻깊은 시간을 보냈다. 아침 일찍 광주를 출발한 후 4시간을 달려가는 긴 여정 끝에 안동 도착하자마자 먼저 하회마을을 방문했다.
▶ 하회(河回)마을
하회마을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한국의 대표적인 전통마을로, 조선시대 선비의 고장인 안동의 풍류와 문화를 엿볼 수 있는 곳이다. 하회마을의 전통가옥들과 양진당(養眞堂), 충효당(忠孝堂), 삼신당(參神堂), 만송정(萬松亭) 숲 등을 둘러보며 조선시대의 생활상을 체험했다.
풍산 유씨의 씨족마을로 유운룡(柳雲龍)·유성룡(柳成龍) 형제 대(代)부터 번창하게 된 마을이라고 한다. 낙동강 줄기가 S자 모양으로 동·남·서를 감싸 돌고 있고 독특한 지리적 형상과 빼어난 자연경관을 갖추고 있다. 안동(安東) 하회(河回)마을은 처음에는 허씨(許氏)와 안씨(安氏) 중심의 씨족마을이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이들 두 집안은 떠나고 풍산류씨(豊山柳氏)가 중심이 되어 터를 닦아 그 후 600년 동안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씨족마을이다. 한편, 씨족마을이라는 전통 외에도 마을 주민들이 기와집과 초가집의 옛 한옥을 여전히 생활공간으로 이용하고 있어 한옥의 과거 현재 미래 모습을 모두 살필 수 있는, 그야말로 한옥을 대표하는 마을로 꼽힌다.
‘하회(河回)’라는 이름은 마을 주위를 감싸 안고 흐르는 낙동강의 모습이 ‘회(回)’자와 비슷하다고 하여 붙여졌는데, 풍수지리학적인 관점에서는 마을이 물 위에 떠 있는 연꽃의 형상과 같다 하여 길지(吉地)로 꼽는다. 이와 관련하여 과거 이 마을에서는 담장을 만들 때 돌을 섞지 않았다고 하는데, 마을이 물에 가라앉지 않기를 바라는 풍수의 관점에서 그렇게 한 것이라고 한다.
▶ 화천서원(花川書院) 및 부용대(芙蓉臺)
그리고 안동의 대표적인 명물 음식인 간고등어 정식으로 점심을 맛있게 먹고, 이어서 화천서원과 부용대를 방문했다. 화천서원(花川書院)은 겸암 류운룡(謙菴 柳雲龍, 1539 ~1601년)의 학덕을 흠모한 지역 유림들이 세운 서원으로 경덕사(景德祠), 전사청(奠祀廳), 전학재(典學齋), 심원재(尋遠齋), 지산루(地山樓) 유물들을 둘러보고, 부용대의 절경을 감상했다.
화천서원은 도산서원 등 향촌 사림의 동의를 얻어 1786년에 건립하였다. 건립 후 겸암(謙菴) 류운룡(柳雲龍)을 주향으로 하고 동리(東籬) 김윤안(金允安)과 종손자인 졸재(拙齋) 류원지(柳元之)를 배향하고 100여 년 이상 춘추로 향사를 지내오다가 1871년 서원 철폐령에 의해 강당과 주사만 남기고 훼철됐다. 서원의 훼철을 아쉬워하던 후손들은 1966년부터 기금을 모아 사림들의 공론으로 1996년에 복설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부용대(芙蓉臺)는 태백산맥의 맨 끝부분에 해당하며 정상에서 안동 하회 마을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높이 64m의 절벽이다. 부용대라는 이름은 하회 마을이 들어선 모습이 연꽃 같다는 데서 유래한 것으로, 하회 마을을 가장 잘 바라볼 수 있는 곳이라 부용대라 부른다. 처음에는 ‘하회 북쪽에 있는 언덕’이란 뜻에서 ‘북애(北厓)’라 불렸다고 한다.
▶ 소산(素山)마을
11월04일 종착지인 백하구려(白下舊廬)로 이동하는 도중에 안동김씨 집성촌인 삼구정(三龜亭)과 청원루(淸遠樓) 등이 있는 소산 마을을 방문했다. 마을 입구 바로 앞 언덕 위에는 안동의 빼어난 명승지인 삼구정(三龜亭)이 있다. 조선 성종 때 사헌부 장령을 지낸 김영수가 88세의 노모를 즐겁게 해드리기 위해 지은 정자로 삼구정(三龜亭)은 세 마리의 거북이가 있는 정자란 뜻이다. 십장생 중 하나인 거북이 모양의 돌 3개가 삼구정(三龜亭) 앞에 놓여 있다.
길을 따라 우측으로 가면 청음 김상헌(金尙憲)이 ‘청나라를 멀리 한다’해서 명명한 국가 보물 청원루(淸遠樓)가 있다. 병자호란 당시 인조와 신하들이 남한산성에 들어가 항전했고 주화파의 주장에 따라 결국 항복하기로 했다. 김상헌은 화의를 청하는 최명길(崔鳴吉)의 국서를 찢고 자결을 시도하기도 했다. 삼전도 항복 후, 김상헌은 학가산 아래 목석거라는 초옥을 짓고 은거했다. 이후에도, 인조가 명을 공격하려는 청나라에 군사를 지원하려 하자, 반대 상소를 올려 청나라로 압송됐다가 6년 뒤에야 돌아올 수 있었다. 이때 남긴 시(詩)가 바로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만은 시절이 하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이다.
영의정, 대제학, 승지 등을 배출한 소산마을은 안동 김씨 500년 세거지로 금산촌(金山村)으로 불렸었다. 그러나 청음 김상헌이“김씨가 모여 사는 마을을 금산촌이라 하는 것은 화려해 합당하지 않다”며 마을을 감싸고 있는 소요산의 이름을 따서 소산(素山)으로 고쳤다 한다. ‘깨끗하고 희며, 빛나는 산에 둘러싸인 마을’이란 뜻을 지녔다.
▶ 백하구려(白下舊廬)
백하구려(白下舊廬)는 도기념물, 현충시설로 구한말과 일제 초에 국민계몽과 광복운동에 몸바친 백하 김대락(白下 金大洛, 1845∼1915년)선생의 고택으로 사랑채를 확장하여 1907년 이 지역 최초로 근대식 학교인 협동학교를 개교했던 곳이다.
백하 김대락(白下 金大洛)선생은 보수적 완고함을 버리고 협동학교를 지원하고 사랑채를 교사(校舍)로 내주는 등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1910년 "나라를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내앞마을 150명을 이끌고 만주로 망명했다. 문중 단위론 첫 집단망명이었다.
만주에서 백하는 매부인 이상룡(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등과 함께 한인 자치조직 경학사를 만들고,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인 신흥강습소를 세워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매진하다 1914년 삼원포에서 세상을 떠난다.
백하구려가 있는 내앞마을은 백하를 비롯한 독립운동 유공자를 20여명이나 배출한 마을이다. '만주벌 호랑이'로 불린 일송 김동삼(一松 金東三, 1878~1937년), 백하의 아들로 해방 직후 김구와 김일성이 만난 남북연석회의 임시의장을 맡았던 월성 김형식(月松 金衡植,1877~1950년)도 이 마을 출신의 독립운동가다.
이번 안동 문화재 탐방은 기아문화재지킴이 회원들과 가족들에게 안동의 아름다운 문화유산을 직접 보고 느낄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다. 안동문화지킴이 김호태 이사장님의 따뜻한 환대와 친절한 설명에 감사하며, 더욱 열심히 문화재를 지키고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특히, 진찬승 회원은 "안동의 문화재들은 정말 아름답고 웅장했고, 특히 하회마을의 전통가옥들과 부용대의 절경은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을 것 같다고 말했다."
기아문화재지킴이 회원들과 가족들은 안동의 아름다운 문화유산을 직접 보고 느낄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을 보냈으며, 앞으로 더욱더 열심히 지역 문화재를 지키고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다짐해본다.
🔳 참고문현
1. 김호태, [사람과 문화], (사)안동문화지킴이, 2022~2023.
2. 권기상, [안동김씨 세거지 지키는 '삼구정 소나무'], 안동 뉴스 자료, 2023.
3. 권기창, [감성충전 안동여행], 안동시 홈페이지 자료, 2023.
4. 최응천, [나만의 문화유산 해설사 자료], 문화재청 모바일자료,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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