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4-5일(1박2일)에 기아문화재지킴이 25명의 회원과 가족들이 안동문화재지킴이 김호태 이사장님의 초청으로 안동의 다양한 문화재들을 둘러보는 뜻깊은 시간을 보냈다. 아침 일찍 광주를 출발한 후 4시간을 달려가는 긴 여정 끝에 안동 도착하자마자 먼저 하회마을을 방문했다.
▶ 도산서원(陶山書院)
도산서원은 퇴계 이황(退溪 李滉) 선생이 도산서당을 짓고 유생을 교육하며 학문을 쌓던 곳이다.
퇴계 이황(退溪 李滉,1501∼1570년) 선생은 주자학을 집대성한 유학자로 우리나라 유학의 길을 정립하면서 백운동서원의 운영, 도산서당의 설립으로 후진양성과 학문연구에 전력하였다. 중종, 명종, 선조의 지극한 존경을 받았으며 일본 유학의 부흥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도산서원은 조선 선조 7년(1574) 그의 학덕을 추모하는 문인과 유생들이 상덕사(尙德祠)란 사당을 짓고 전교당 동ㆍ서재를 지어 서원으로 완성했으며, 선조 8년(1575) 국왕에게 이름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면서 영남지방 유학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 서원의 건축물들은 민간인들의 집처럼 전체적으로 간결, 검소하게 꾸며 퇴계(退溪)의 품격과 학문을 공부하는 선비의 자세를 잘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서원 철폐 때에는 소수서원(紹修書院)ㆍ숭양서원(崧陽書院) 등과 더불어 정리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1969년 문화체육부에서 해체 복원하여 면목이 일신되었다. 2019년 7월 전국 8개 서원과 함께 ‘한국의 서원’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 안동 임청각(安東 臨淸閣)
임청각(臨淸閣)은 형조좌랑(刑曹佐郞)을 지낸 바 있는 이명(李洺)이 1515년(중종 10)에 건립한 주택이며, 상해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石州 李相龍)선생의 집이기도 하다. 이 집은 영남산(映南山) 동쪽 기슭에 앉아 낙동강을 바라보는 배산임수의 명당에 남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중앙선 철도부설 때 50여간의 행랑채와 부속채가 철거되어 현재의 규모로 줄어들기는 하였으나, 길에서 보면 맞담 너머로 보이는 웅장한 모습의 행랑채가 이 집이 소위 말하는 99칸집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준다. 이 중 보존상태가 양호하여 보물로 지정된 군자정은 임청각의 별당으로 조선 중기에 지은 ‘丁’자 평면의 누각형 건물이다. 앞면 3칸·옆면 2칸 크기이고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중심은 남향의 대청이고, 그 서쪽에 이어서 지은 T자형의 온돌방이 부설되어 있다. 내부는 4개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건물 둘레에는 툇마루를 돌려서 난간을 세웠으며, 출입은 두 군데에 마련해 놓은 돌층계를 이용하게 되어 있다.
원래는 99칸의 집이었다고 하나 지금은 50여 칸만 남아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민가 중 하나인 이 집은 독립운동가이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石州 李相龍, 1858~1932년)의 생가이다. 석주 이상룡 선생을 비롯하여, 선생의 아들, 손자 등 독립 운동가 11명을 배출하는 등 3대에 걸쳐서 독립 운동을 한 독립운동의 산실이다.
석주 이상룡 선생은 경술국치 이듬해인 1911년 1월 전 재산을 처분하여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여
만주 망명길에 올라 독립운동기지인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를 세웠으며, 1925년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맡아 독립운동계 분파 통합을 위해 노력하였다.
망명 직전에는 "공자와 맹자는 시렁 위에 얹어두고 나라를 되찾은 뒤에 읽어도 늦지 않다"며 독립 운동에 매진할 것을 다짐하였다. 또한 선생은 망명 직전 임청각에 있는 사당으로 올라가 신주와 조상 위패를 땅에 묻고 나라가 독립 되기 전에는 절대 귀국하지 않겠다는 비장한 각오를 다지기도 하였다. 만주 망명길에 오른 2년 뒤인 1913년에는 아들 이준형에게 “조선으로(국내로) 들어가 임청각을 처분하라”고 하였으며, 그 후 국내로 들어온 아들 이준형이 “임청각을 팔겠다”고 하자, 문중에서 이를 말리면서 독립운동 자금 500원을 만들어 주기도 하였다.
▶ 봉정사(鳳停寺)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고운사(孤雲寺)의 말사이다. 672년(신라 문무왕 12) 능인대사(能仁大師)에 의하여 창건되었다는 전설이 전하는데,<극락전 중수상량문>등 발견된 구체적인 자료를 통해 보면 7세기 후반 능인대사에 의해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전쟁으로 대부분의 자료들이 소실되어 창건 이후의 사찰역사는 전하지 않는다. 1972년 봉정사 극락전을 해체하고 복원하는 공사를 진행할 때 상량문에서 고려시대 공민왕 12년인 1363년에 극락전을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발견되었다. 이런 사실이 발견되어 봉정사 극락전이 현존하는 최고의 목조건물로 인정받게 되었다.
깊은 산속의 절이었던 봉정사(鳳停寺)가 세상의 주목을 받은 것은 1972년 극락전을 해체·수리하는 과정에서, 1363년에 지붕을 중수했던 사실을 담은 묵서(墨書)가 발견되면서부터이다. 목조건물을 대략 150년마다 중수한다고 가정하면, 극락전은 적어도 1200년대 초반에 건립된 건물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때부터 부석사(浮石寺) 무량수전(無量壽殿)이 가지고 있던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이라는 명성은 봉정사 극락전이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봉정사의 건축적 가치는 극락전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극락전 외에도 대웅전, 고금당(古今堂), 화엄강당(華嚴講堂)은 각각 한 시대를 대표하는 구조 형식을 가진, 봉정사를 목구조 박물관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중요한 유구들이다.
천등굴에서 수학하던 능인대사가 도력으로 종이로 봉(鳳)을 만들어 날렸는데, 이 봉이 앉은 곳에 절을 짓고 봉정사라 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창건 후 능인은 이 절에다 화엄강당(華嚴講堂)을 짓고 제자들에게 전법(傳法)하였다 한다. 또 일설에는 능인이 화엄기도를 드리기 위해서 이 산에 오르니 선녀가 나타나 횃불을 밝혔고, 청마(靑馬)가 앞길을 인도하여 지금의 대웅전 자리에 앉았기 때문에 산 이름을 천등산이라 하고, 청마가 앉은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절 이름을 봉정사라 하였다고도 한다. 창건 이후의 뚜렷한 역사는 전하지 않으나, 참선도량(參禪道場)으로 이름을 떨쳤을 때에는 부속암자가 9개나 있었다고 한다.
2000년 2월 대웅전 지붕 보수공사 때 발견된 묵서명을 통해 조선시대 초에 팔만대장경을 보유하였고, 500여 결(結)의 논밭을 지녔으며, 당우도 전체 75칸이나 되었던 대사찰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영국의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한국을 방문하면서 1999년 4월 21일에 봉정사를 방문하기도 하였다.
현재 이 절에는 부석사의 무량수전(無量壽殿)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로 알려져 있는 1962년 국보로 지정된 봉정사 극락전을 비롯하여, 2009년 국보로 지정된 봉정사 대웅전, 1967년 보물로 지정된 봉정사 화엄강당과 봉정사 고금당 등의 지정문화재와 무량해회(無量海會 : 僧房)ㆍ만세루(萬歲樓)ㆍ우화루(雨花樓)ㆍ요사채 등 21동의 건물이 있다.
이번 안동 문화재 탐방은 기아문화재지킴이 회원들과 가족들에게 안동의 아름다운 문화유산을 직접 보고 느낄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다. 안동문화지킴이 김호태 이사장님의 따뜻한 환대와 친절한 설명에 감사하며, 더욱 열심히 문화재를 지키고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특히 이형만 회원은 "안동문화재지킴이 김호태 이사장님의 풍자와 위트로 해설을 해주셔서 너무도 좋았고 안동의 문화유산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고 말했다.
기아문화재지킴이 회원들과 가족들은 안동의 아름다운 문화유산을 직접 보고 느낄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을 보냈으며, 앞으로도 더욱더 열심히 지역 문화재를 지키고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다짐해본다.
🔳 참고문현
1. 김호태, [사람과 문화], (사)안동문화지킴이, 2022~2023.
2. 권기창, [감성충전 안동여행], 안동시 홈페이지 자료, 2023.
3. 최응천, [나만의 문화유산 해설사 자료], 문화재청 모바일자료,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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