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의 또다른 진산, 광주광역시 제1호 광주공원 이야기

- 광주의 옛 사람들이 광주를 지켜준다고 믿었던 무등산과 함께 또다른 진산 성거산
- 광주공원은 주권을 찾기 위한 몸부림의 현장이었다
- 광주인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성거산은 광주시민들과 함께 고난을 겪었다.

김오현 선임기자 승인 2024.01.09 23:16 | 최종 수정 2024.01.10 11:13 의견 0

광주공원 광장 뒤 일제의 흔적인 광주신사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서 기아문화재지킴이 단체사진(사진촬영 박정세)

2024년 갑진년 첫 기사로 광주의 또다른 진산, 광주공원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광주광역시 남구에 위치한 광주공원은 광주의 옛 사람들을 지켜준 또다른 진산으로 불리던 곳으로 거북 형상의 성거산이 그것이다. 성거산은 거북처럼 생겼기 때문에 성구강이라고도 불렸다. 그래서 전설에 의하면, 성거산이 거북 모양이므로 상서로운 거북의 기운이 광주를 떠나지 못하도록 거북의 목에 5층 탑을 세우고 등에 절을 세운다. 그렇게 세워진 절이 성거사다. 성거사 건립 전설은 거북이 광주를 떠나서는 안된다는 광주인들의 염원을 잘 반영하고 있다. 광주 지킴이 거북 모습의 성거산이 광주인에게 또 다른 진산인 이유다.

광주공원에 묻어 있는 일제의 흔적인 광주신사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서 설명을 듣는 기아문화재지킴이들...(사진촬영 오현)

▶ 성거산(聖居山)
광주광역시 남구 구동에 위치한 성거산은 조선시대 이전에는 성거사라고 불리던 사찰터이다. 이곳의 지형이 거북의 형상을 닮았다고 하여 구동(龜洞)이라는 지명이 생겼으며, 성거산도 거북이가 사는 산이라는 뜻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된다.
성거산의 연원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 없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 광산현 불우조》에 "성거사는 성거산에 있다."라고 간단하게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보면, 고려 초에 창건되어 16세기까지는 존재했을 것으로 짐작한다.

광주문화유산지킴이 회원들이 광주공원 내의 정화활동과 성거사지 5층 석탑에서 기념촬영(사진촬영 고경임)

고려 시기, 광주 불교의 가장 큰 특징은 신라말에 미친 선종이 풍수지리설과 연결된다는 점이다. 이는 성거사지에 남아 전하는 5층 석탑의 건립 비밀이 잘 말해준다. 성거사지 5층 석탑(보물 제109호)이 있는 광주공원은 원래 성거산 또는 성구강이라 불렸다. 전설에 의하면, 성거산이 거북 모양이므로 상서로운 거북의 기운이 광주를 떠나지 못하도록 거북의 등에 절을 지으려고 했지만, 지을 때마다 무너져 지을 수 없었다고 한다. "거북의 목 부근에 탑을 세우면 절이 넘어지지 않을 것이다."라는 도승의 말에 따라 거북의 급소인 목에 5층 석탑을 세우고 거북을 움직이지 못하게 한 다음, 절을 세웠다고 한다. 그렇게 세워진 절이 성거사다. 실제로 광주공원이 된 성거산은 거북이가 광주천 물줄기를 향해 헤엄치는 형국이다. 안중근 의사비가 세워졌던(1987년 어린이 공원으로 움겨짐) 지점의 바위산이 거북의 머리이고, 5층 석탑의 자리는 거북의 목이며. 지금 현충탑이 서 있는 자리는 거북의 등에 해당한다. 광주문화재단(엿 구동체육관) 입구가 오른쪽 앞발, 어린이 놀이터 자리가 오른쪽 뒷발, 서동과 사직공원을 잇는 도로가 꼬리, 광주향교의 오른쪽 서동이 왼쪽 뒷발, 관상대 광주지대(옛 활터)의 구릉이 왼쪽 앞발에 해당한다. 그러나 지금 거북의 옛 모습을 찾기는 쉽지 않다. 1940년, 일제가 그들의 신사를 개수하면서 등허리를 파헤치고 길을 내어 발을 끊는 등 원형이 많이 변형되었기 때문이다. 광주는 지금 거북의 자세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북서진하고 있다. 멀리 첨단지구의 발전이 눈부시다. 해방 직후 8만이던 인구는 이제 150만이 넘는 거대 도시가 되었다. 전설대로라면 거북을 붙잡아 둔 결과다.

기아문화재지킴이 회원들이 성거사지 5층석탑을 모니터링 하는 모습

구강의 전설은 성거사에 대한 문현상의 부족을 메우는데 큰 도움을 준다. 창건 동기가 풍수지리설과 밀착된 비보 사찰(이름난 곳이나 명산에 절을 세우면 국운을 돕는다는 도참설과 불교 신앙에 따라 세운 절)의 성격을 지닌 사찰임을 알려줄 뿐 아니라 창건 시기 또한 풍수지리설이 크게 유행했던 고려 초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고려 초기에 창건되었음은 탑의 양식 및 1961년 출토된 사리갖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성거사가 언제 폐사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증심사나 원효사가 정유재란 당시 소실되었던 점을 고려하면 그 무렵 피해를 입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거사터 5층 석탑은 한때 신라 하대에 제작된 법원 앞의 보물 제110호인 동 5층 석탑과 짝하여 서 5층 석탑으로 불리기도 했다. 화강암으로 만든 8.5미터 크기의 이 탑은 기단부와 탑신부는 잘 보존되어 있으나 상륜부는 모두 없어졌다. 신라시대 탑의 특징인 2중 기단과는 달리 높은 단층 기단과, 탑신부에서 1층 몸돌에 비해 2층 이상의 몸돌 체감율이 적어 다소 높고 가늘어 보이는 고려 석탑의 전형을 보여준다. 1층 몸돌은 4매의 석재를 상.하 2단으로 짜 맞춘 독특한 모습이다. 1961년 이 답을 해체 보수할 때 2층 몸돌에서 사리 갖춤과 함께 많은 유물이 발견되었다.

광주공원 비석군에서 비석들에 얼힌 이야기를
듣고 있는 광주시민들과 설명하는 김오현 회원

▶ 광주공원에 묻어 있는 일제의 흔적
광주인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성거산은 대한제국의 운명과 함께 고난을 겪었다.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난 직후인 1906년, 일제는 사직산과 성거산을 점령하고 포대를 설치했다. 사직산과 성거산은 광주 시내를 한눈에 굽어보는 곳이어서 일종의 위협이었고 협박이었다. 1년 전 서울 남산에 대포를 걸어놓고 외교권을 내놓으라고 협박했던 일을, 일제는 광주에서 재현하였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908년 일제는 한말 호남 의병과의 전투 중에 죽은 일본 병사를 애도한다며 충혼탑을 세웠다. 그런데 그장소가 광주인들이 진산으로 생각하고 있는 성거사지 5층 석탑 부근의 돌산이었다. 광주인들의 지킴이였던 거북, 그 머리에 일제에 저항했던 호남 의병들 대신 일본군을 위한 충혼탑을 건립하다니 만행이 아닐 수 없다. 해방 후 우리 손으로 그 장소에 해방 기념탑을 세우고 안중근 의사 동상을 세웠지만 안 의사 동상은 1987년 중외공원으로 옮겨졌다.

비가 오는데도 성거사지 5층 석탑 앞에서 광주시민들에게 설명하는 광주문화유산지킴이 고경임 회장과 회원들...(사진촬영 박정세)

맨 먼저 일제는 광주~남평 간 신작로를 낸다며 성거산을 두 동강을 냈다. 그리고 1913년, 성거산 일대 1만여 평을 공원으로 만들기 위해 여기저기를 자르고 팠다. 일본 국화인 벚꽃을 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성거산이 당시의 지명을 따서 구강공원으로 불리게 된 연유다. 1924년 사직공원에 일본 왕태자 히로히토(뒤에 쇼와 천왕)의 결혼을 기념하기 위한 공원을 조성한 후 구강공원은 구공원, 사직공원은 신공원으로 불리기도 했다. 아무튼 성거산에 공원을 조성하면서 1914년 일제는 자신들의 개국 시조인 천조대신을 받드는 신사를 광주공원 정상, 지금의 충혼탑 자리였다. 1940년, 신사의 관리권이 전남도에서 총독부로 넘어가면서 광주신사는 총독부에서 신사 운영 비용을 부담하고 관할하는 이른바 국폐신사로 승격된다. 국폐신사로 격상되면서 광주신사는 올라가는 계단이 정비되고 광장이 확장되는 등 재정비된다.
신사로 인해 조선인이 겪었던 가장 큰 고역은 참배였다. 특히 많은 기독교인들이 종교적 이유로 이를 거부했고, 숭일ㆍ수피아 학교는 문을 닫는 수난도 겪었다.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났던 날도 일제는 조선 학생들의 신사 참배를 강요했다.
해방이 되자 광주 시민이 가장 먼저 했던 일은 30년 동안 성거산을 옥죄던 신사의 파괴였다. 이는 신사가 광주 사람들에게 얼마나 눈엣가시였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신사가 들어셨던 그 자리에는 한국전쟁 당시 순국한 경찰관을 기리는 충혼탑이 세워졌다. 일본 병사를 위한 충혼탑, 신사와 도리이, 오쿠무라 이오코 동상, 조선금융조합 창립 기념탑 등은 일제가 30여 년간 광주공원에 남긴 지배와 복종을 강요한 흔적들이다. 지금 이 흔적들은 광주 시민들의 분노에 의해 사라지고 없다.

광주공원에 건립되었던 안중근 의사 숭모비 위치 주변에서 참가자들에게 설명하는 김오현 회원과 현재 중외공원에 있는 안중근 의사의 동상과 숭모비 사진(사진제공 국가보훈부 )

▶ 광주공원에 깃든 의로움 이야기
광주공원은 일제의 잔제만이 남아 있는 공간은 아니다. 그곳은 주권을 찾기 위한 몸부림의 현장이었고, 민주주의를 지켜내기 위한 포효의 현장이기도 했다.
1895년 일제에 의해 민비가 시해되자 장성 출신 기우만은 광주항교에 본영을 두고 의병을 모집한다. 고종의 해산 조칙에 의해 해산되고 말지만, 일제를 몰아내겠다는 의지는 의로움의 실천이었다.
광주공원에는 호남 제일 의병장이었던 함평 출신인 심남일 의병장을 기리는 의병장남일심공순절비도 서 있다. 1962년 심남일은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게 되고, 그 며느님은 꼬박꼬박 받은 연금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 광주향교에 가져온다. 그 연금에 향교 유림들이 돈을 보탠다. 함평 출신인 심남일 의병장의 순절비가 광주공원에 세워진 연유가 감동이다.
광주는 서울. 마산과 더불어 4.19혁명 전국 3대 발상지 중 하나다. 또한 광주는 4.19혁명의 단초가 된 3.15 부정 선거에 대한 전국 최초의 항쟁지이기도 했다. 광주고등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된 혁명의 불길이 치솟았고, 금남로에서 피를 흘리고 쓰러졌다. 구한말 광주에 온 일본인 오쿠무라 이호코의 동상이 있던 자리에 쓰러진 영령들을 기리는 4. 19의거 영령 추모비도 세워졌다.

​​​​광주공원에 묻어 있는 역사 흔적을 살펴보면서 정화활동을 진행하는 광주문화유산지킴이 회원과 광주시민들...(사진촬영 박정세)

또한 광주공원(5.18 민중항쟁 사적 제20호로 지정)은 5.18 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의 훈련장이자 시민군 편성지였다. 5월 21일 전남도청 앞에서 자행된 계엄군의 집단 발포로 많은 사상자가 나오자 오후 4시경 자위 수단으로 인근 시군 지역에서 총과 탄약을 가져와 시민군을 편성하고 사격 훈련을 실시한다. 그리고 지도부가 결성되어 24일 도청으로 통합될 때까지 시민회관을 본부로 삼고, 시내를 순찰하고 시민군 차량에 번호를 써서 등록하는 등 치안 업무를 맡는다. 해태상을 지나면 당시의 모습을 기리는 5.18 표지석이 서 있다. 5.18 민주화운동 당시 수많은 열사들이 민주주의의 제단에 몸을 바친다. 지금 어린이헌장탑이 서 있는 곳 아래에 있던 신광교회 목사의 아들 류동운(당시 20세)도 그중 한 분이다. 도청을 향하면서 "나는 이 병든 역사를 위해 갑니다."라는 일기를 남기고 5월 27일 도청에서 숨
을 거둔다. 지금 그곳에는 그를 기억하는 작은 비 하나만 남아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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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사적지 탐방 코스인 양동시장부터 광주공원까지 정화활동을 하면서 광주천과 광주공원이야기를 하는 박미경 회원과 기아문화재지킴이 회원들...(사진촬영 오현)

광주공원은 광주시민들의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살아있는 역사의 현장이고 무등산과 함께 광주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닌 곳으로, 광주시민들의 뜻을 담은 조형물과 시설물이 곳곳에 있다. 또한, 광주공원은 광주 시민들의 삶과 애환이 깃들어 있는 곳이다.

🔳 참고문현
1. 노성태, [광주의 기억을 걷다], 살림터, 2014.
2. 박선홍, [광주 1백년 3], 광주문화재단, 2015.
3. 구용기, [광주문화원형을 품은 사직골을 거닐다], 꿈꾸는 거북이, 2016.
4. 안병우, [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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