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재(懷齋)선생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음성(陰城)이며 자는 경원(景瑗), 호는 회재(懷齋)이다. 해남의 윤선도(尹善道), 보성의 안방준(安邦俊) 집안과 함께 호남의 3대 부자였고, 광주 최고의 갑부였다. 지금의 광주 월드컵경기장, 풍암지구의 동부센트레빌 아파트 등이 음성박씨 문중 땅이었다.박광옥(朴光玉)은 그 많은 재산을 호국을 위해 아낌없이 내놓았으니, '노블리스 오블리주' 를 실천하면서 한 세상을 살았다. 그는 관직을 떠나 낙향해 있는 와중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경명(高敬命), 김천일(金千鎰) 등과 더불어 왜적 토벌에 나설 것을 결의하고 의병 모집활동을 주도한다. 회재는 고령과 노환으로 직접 출전할 수 없게 되자, 사재를 털어 '의병도청'을 설치하고 무기와 군량을 모아 조달하는 일을 맡는다. 1,2차 호남근왕병 출병 때도, 김천일(金千鎰)과 고경명(高敬命)의 거병 때도 병무지원을 도맡아 처리했다. 권율(權慄)의 '이치전투'와 '행주산성'의 전투 당시 연고가 없는 전라도 의병들이 대거 참여했는데, 회재(懷齋)가 의병들을 모집하고 군량을 지원함으로써 가능한 일이었다. 회재(懷齋)의 이름을 따서 길이 생기고, 벽진서원이 건립되는 등 오늘날 박광옥(朴光玉)이 우리에게 기억되는 이유다.
회재(懷齋)는 그 시대의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했던 사람 아닌가. 자신에게 엄격했고 남에게는 늘 베풀었던 선비 회재 박광옥(懷齋 朴光玉). 명예와 지위보다 나라를 위한 우국충정과 백성을 향한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삶과 무관하지 않다. 이제 사람들은 '회재로'라는 이름으로 회재 박광옥(懷齋 朴光玉)의 삶을 오래 기억할 것이다.
▶ 회재(懷齋)의 둘째딸은 '주역(周易)각시'
회재(懷齋) 선생의 둘째 딸은 오늘날 주역에 신통하고 동물들의 말을 알아 듣는다는 '주역각시' 설화로 많이 알려져 있다. 어려서부터 사서삼경[사서(四書)인 논어(論語)ㆍ맹자(孟子)ㆍ중용(中庸)ㆍ대학(大學), 삼경(三經)인 시경(詩經)ㆍ서경(書經)ㆍ역경 (易經) 또는 주역(周易)을 통틀어 이르는 말]에 통달하고 동물 소리까지 알아듣는 총명한 재주를 지닌 영특한 딸이 있었다. 전북 남원의 명문가로 이조판서를 지낸 옥계(玉溪) 노진(盧禛, 1518-1578)의 7남 중 여섯 째 아들인 사인(士人) 노사첨(盧士詹)에게 시집갔다.
그런데 첫날밤에 새 신부가 천장에 있는 쥐들의 대화를 듣고는 웃고 말았다. 이 일로 시집 사람들의 오해를 받아 결국 소박을 맞아서 친정으로 돌아왔다. 그로부터 몇 년의 세월이 흘러 시아버지 노진(盧禛)이 불쑥 사돈대을 찾아왔다. 정말로 며느리가 쥐들의 이야기를 들은 것인지 시험해 보기 위해 일부러 도포 자락 안에 제비새끼를 한마리 담고 집안에 들어 왔다. 회재(懷齋)의 딸은 시아버지의 도포 속에 있는 제비 새끼를 언급하면서, 어미 제비가 새끼를 따라왔으니 놓아 달라고 했다. 노진(盧禛)은 며느리의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라서 제비 새끼를 놓아 주었고, 빨랫줄에 있던 어미 제비가 새끼를 물고 날아갔다. 그래서 회재의 둘째 딸에 대한 오해는 완전히 풀리고 신원되었지만 노씨 문중으로 돌아가기에는너무 때가 늦어 일생을 친정에서 지내며 아버지를 도와 막대한 가산을 이루게 하고 그 재산으로 임진왜란 당시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군량미를 제공했으며 개금산에 노적가리(한데에 수북이 쌓아 둔 곡식 더미)를 쌓아 군량미가 많은 것처럼 보이게 하는 등 나라를 구하기 위해 힘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회재 박광옥 선생의 둘째 딸(주역각시)은 사서삼경(四書三經)는 물론 주역(周易)까지 통달하여 만물을 꿰뚫어 보고 심지어 동물의 말소리 까지 알아듣는 재능을 추앙하여 '주역각시'라는 칭호로 지금도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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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현
1. 정중수 . 정인서, [진정한 광주인 회재 박광옥],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 2019.
2. 백옥연, [광주 벽진서원-회재 박광옥], 전남일보, 2019.
3. 김이강, [서구의 구전설화 서창동 주역각시], 광주광역시 서구청,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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