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제국주의 침략 전쟁의 산 증거물

「밀양 구 비행기 격납고」를 찾아서

장창표 논설위원 승인 2024.03.14 13:18 의견 12

우리나라가 일제(日帝)로부터 해방이 된 지가 80년이 다 되어가지만, 아직도 생활 주변에는 일제 식민지의 상흔(傷痕)이 곳곳에 남아 있다. 주말을 이용해 밀양시 상남면에 건설된 일본제국주의 침략 전쟁의 산 증거물(證據物)인 「밀양 구 비행기 격납고」를 찾아 나섰다.

상남면 기산리(1378번지)와 연금리(1072번지)에 있는 비행기 격납고(格納庫, 비행기 등을 넣어 두거나 정비하는 건물)는 전투기 보관을 목적으로 건설한 군사시설이다. 이들 격납고는 일본이 도발한 태평양전쟁이 한창인 1940년대 초에 만들어졌는데, 일제는 이들 격납고 앞쪽의 넓은 상남 들판에 비행을 위한 활주로를 건설하고 적의 레이더(radar)와 폭격을 피할 수 있는 배후 구릉지(丘陵地, 높이 300m 미만의 완만한 경사면과 골짜기가 있는 지역)에 격납고를 건설하였다. 일정한 거리를 띄워 격납고를 짓고는 그사이에 비행기가 이동할 수 있도록 콘크리트 포장길도 만들어 놓았다.

당시 일제는 밀양(상남면)에 총 4기의 격납고(기산리 3기, 연금리 1기)를 건설했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기산리의 2기는 파괴되고 현재는 기산리와 연금리에 각각 1기씩의 격납고가 남아 있다. 이들 격납고가 위치한 곳은 지형적으로 비슷한 조건을 이루고 있다. 밖에서 보이지 않게 마을 안쪽의 깊숙한 곳에 있으며, 격납고를 중심으로 좌우 양쪽이 산으로 둘러있고, 앞쪽은 길게 직선을 이루어 비행기가 확 트인 상남 들판으로 나가게 되는 최적의 공항 입지(立地) 조건을 갖추고 있다. 이들 격납고는 1945년 일제의 패전(敗戰)으로 다 완성되지는 못했지만, 일제 말기 밀양지역에서의 태평양전쟁 준비상태를 보여주는 역사적·문화적으로 귀중한 근현대사 교육자료로 그 가치가 높은 역사 유적(遺蹟)이다. 2005년에 이들 2기의 격납고는 「밀양 구 비행기 격납고」라는 이름으로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등록문화재 제206호)으로 지정되었다.

비행기 격납고 1(상남면 연금리)
비행기 격납고 2( 상남면 기산리)

남아 있는 2기의 「밀양 구 비행기 격납고」는 모두 1층 터널형으로 길이 약 13m, 지름 약 13.6m, 높이 약 3.1m의 철근콘크리트 구조물로 곡면형(曲面形) 구조에 앞쪽에는 아치형 입구를 설치하였다. 콘크리트 두께는 일정하지는 않지만 대략 25cm 정도이며, 격납고 내부의 콘크리트 표면에는 가마니 무늬가 선명하게 남아 있다. 이것은 격납고를 만들 때 먼저 흙을 반원형으로 모으고 그 위에 가마니를 덮은 다음 콘크리트를 붇고는 굳은 뒤에 내부의 흙을 제거(除去)했기에 생긴 흔적으로 당시의 어려운 경제 사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1940년 초(初)에 상남면 대성동 마을의 남쪽 들판(대흥동과 광탄마을 사이 일대)에 건설하던 일본군의 비행장도 일제의 패전(敗戰)으로 중도에 폐지(廢止)되었다. 이후, 그곳에 남아 있던 비행장 터에는 1947년경 해방을 맞아 고국으로 돌아오는 동포들을 수용하기 위한 주택을 지어 마을 이름을 ‘후생촌(厚生村, 상남면 연금리)’으로 불리다가 1970년대 말 무렵에 주민들이 떠나가면서 다시 농경지로 변했다. 지금도 일부 상남면 주민들은 이곳 들판 일대를 ‘비행장’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현재 이들 「밀양 구 비행기 격납고」의 소유자와 관리자는 개인이다. 상남면 기산리에 있는 것은 격납고 안쪽에 농사에 필요한 기구들을 넣어두고 있는데, 앞쪽 밭에 울타리가 있어 접근하는 길조차 없는 상태이다. 연금리에 있는 것은 1970년대까지 격납고 안쪽 부분을 개량하여 주택으로 사용하였고, 최근까지 농업용 창고로 쓰다 현재는 방치된 상태로 남아 있다. 이러다 보니 이들 「밀양 구 비행기 격납고」는 훼손된 흔적도 일부분 눈에 띈다. 더구나 이들에 대한 이정표(里程標)조차 하나 없는 현실로, 향후 이들에 대한 보존과 관리를 위한 별도의 행정적인 조치가 꼭 필요하다.

이들 「밀양 구 비행기 격납고」는 일제가 한반도를 병참기지(兵站基地)로 삼은 침략 전쟁의 명백한 증거물로 지난날 우리의 치욕적 역사를 돌아보게 하는 소중한 사료(史料)이다. 일본은 지금까지도 과거 한반도와 주변국에서 저지른 무수한 만행(蠻行)에 대한 사과나 반성은커녕 오히려 침략의 역사를 왜곡(歪曲)하고 숨기기에 급급하다. 이런 시설물이 망국의 민족적 슬픔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다짐하는 교육의 장(場)으로 활용되었으면 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경구(警句)를 가슴 깊이깊이 새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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