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림동은 사직산과 양림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의 동남사면에 자리 잡은 전통 주거지역으로 버드나무가 많은 곳이라고 하여 양림(楊林), 볕이 잘 드는 숲이라고 하여 양림(陽林)으로 불렸다고 하며 일제강점기 때는 선교사가 들어와 학교와 병원을 세우고 이곳에 거주하여 세칭 ‘서양촌’으로 불렸다. 현재는 문화예술마을 펭귄마을이라 불린다.
◆양림(陽林) 양림(楊林) 버드름
옛날부터 양림산에 대숲이 무성했으며, 이 대숲은 광주 관아에서 특별히 관리를 했고, 대나무를 베어 관과 국가의 수요에 응하였고 조선 4대 죽산품 산지 중 한 곳이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양림이란 나무들이 잘 자라는 햇볕이 따뜻한 숲, 즉 햇살이 깃드는 숲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볕 양의 양림이 동음이의어인 버들 양의 양림으로 후대에 변했다고 미루어 생각할 수 있다. 1481년 신동국여지승람 산천조를 보면 양림산(陽林山)의 기록이 보이는데, 현의 서쪽 2리에 있다고 한 것으로 보아 바로 사직공원이 자리한 양림동 뒷산으로 추정된다. 이를 보아 조선 초기에 양림이란 이름이 불리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때의 이름은 버들숲이 아닌 햇볕숲이다. 양림동이라는 이름이 버드나무 숲에서 왔다고 보는 사람들은 말한다. 광주천이 범람하거나 물결에 주변의 토지가 침식되어 사태가 일어나는 일이 없도록 제방 공사를 하며 버드나무를 계획적으로 심었는데 양림동은 광주천변에 위치하고 있어 버드나무가 많은 동네였고, 자연스럽게 버들숲이라는 이름이 붙었을 것이다. 기록을 살펴보아도 1611년 정엄의 효행을 기리기 위한 정려비문에 양촌(楊村) 정선생이란 표기로 보아 당시 마을 이름을 양촌(楊村) 혹은 양림촌(楊林村)이라고 했을 것이라 추정할 수 있다.
또한 버드름에서 왔다고 보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양림동 마을의 생김새가 양림산에서 시작된 산 능선이 양파정 능선으로 이어져 광주천에 닿은 모습을 표현한 것이 버드름이다 버드름은 ‘뻗다(延)+으름(접미사)‘로 구성된 말이다. 이 버드름을 한자를 이용하여 이두식으로 표기하면 버드는 ‘버드=버들=왕버드나무=楊’으로 적을 수 있고, 름은 발음이 비슷한 ‘름=림=林’을 취하여 양림이라고 적을 수 있다. 전통적으로 柳는 대개 지명에서 버드나무가 아닌 뻗어나간 산버들을 의미한다. 버드름을 한자를 빌어 이두식으로 표기한 것이 양림이라는 것이다.
◆ 광주의 정신이 숨 쉬는 양림동
독립운동의 거점인 수피아 여학교 수피아여고 정문을 들어서면 1919년 3.1 만세운동을 선도하였던 수피아여고생의 넋을 기리는 기념비가 있다. 기념비는 3.1 운동 때 여학생들이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는 형상을 하고 있으며, 기념비 뒷면에는 옥고를 치른 수피아 여학생 23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기념비 옆면에는 <역사의 별이 되어>라는 추모시가 적혀있다. “천추에 이름 석 자 누구나 남기는가, 기미년 3.1 운동 선두에 서서 구국의 일념으로 충성을 맹세하고 태극기 앞에 두고서 독립만세를 외쳤네. 일제의 총칼 앞에 나라가 합병되자 자유 없는 속박에서 사느니 보다 사슬을 끊기 위해 목숨 걸고 싸웠네. 모진 고문을 당하여도 이겨낸 고결한 애국 얼이 역사의 별이 되어 무궁토록 빛나네.”
3월 10일 만세운동에 참여한 수피아 여학생 윤혈녀는 일제의 유혈진압으로 한쪽 팔이 잘려나갔으나 끝까지 만세를 불렀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또한 5.18 민주화 운동 당시 부상자들을 치료했던 기독병원도 이곳에 있다.
◆ 광주 5대 부자가 살았던 전통가옥
이장우 가옥(광주광역시 민속자료 1호)은 일자형이 주를 이루는 남부 지방의 가옥과 달리 한양의 가옥처럼 ‘ㄱ’ 자 구조다. 나름 부를 과시하고 멋을 부린 것이다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 곳간채, 대문간으로 구성된 전통 상류가옥이다. 1899년 정병호가 안채와 대문간을 건축하였고, 1959년 이장우(동신대 설립)가 매입한 후 사랑채와 행랑채, 곳간 채까지 완성하며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안채는 1989년 시 민속자료 제1호로 지정되었으며 곳간채는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2009년에 복원되었다. 마당에는 큰 연못이 있고 수령 100년이 넘은 은행나무도 있다. 봄에는 살구꽃과 매화, 여름에는 철쭉, 가을에는 팽나무의 단풍, 겨울에는 하얀 차나무꽃이 피어 사계절 모두 다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널찍한 후원의 팽나무도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이다.
최승효 가옥(광주광역시 민속자료 2호)은 1920년에 지어진 독립운동가 최상현의 집이다. 한말의 전통가옥에서 개화기의 한옥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살펴볼 수 있어 건축사적으로 의미가 큰 집이다. 경사진 부지를 그대로 활용하여 좌측에 반지하층을 형성한 것이 특징이다. 이곳은 당시 일본 요정으로 운영하며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하고 본채에 비밀 다락을 두어 독립운동가들의 은신처로 활용됐다고 전해진다. 이후 1968년 광주 MBC 창립에 주도적으로 나선 최승효가 사들였으며 현재는 최승효의 3남 최인준이 관리하고 있다.
◆ 양림동의 문화예술인
양림동 곳곳에는 김현승 시인의 자취가 남아있다. 김현승은 평양에서 태어나 아버지의 선교활동으로 제주도와 광주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평소 커피 애호가인 김현승은 호마저 ‘다형(茶兄)’이다. 1913년 숭실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였고, 교지에 ‘쓸쓸한 겨울 저녁이 올 때 당신들은’이라는 시를 발표하였다. 이 시가 <동아일보>에 발표되어 등단하게 된다. 그는 등단 이후 위장병의 재발과 신사참배 문제로 학교가 폐쇄되자 광주로 돌아와 모교인 숭일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러나 일제로부터 신사참배를 거부한 이유로 아버지와 누이동생과 함께 투옥돼 고문을 당했고, 누이동생은 그 일로 사망했다. 김현승은 일제의 문화말살정책으로 인해 1945년 광복까지 시작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광복과 더불어 모교인 숭일학교 교감으로 취임한 김현승은 교육자로서의 직책에도 충실하지만, 시작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 무렵 여러 신문과 잡지에 많은 시편을 발표하며 서정주, 김동리, 조연현과 교류하며 문단 활동의 폭을 넓힌다. 그의 많은 업적 중에 특히 전쟁의 와중에서도 <신문학>을 발간한 것이다. 김현승은 광주가 배출한 대표적 시인이면서 한국의 시문학사에서 한국 현대시의 지성적 감성 세계를 개척한 인물로 평가된다. 그가 사랑하던 양림동과 무등산이 한눈에 보이는 곳에 펜촉 모양의 시비가 있다. 살던 집, 고향 언덕, 다니던 양림교회와 숭일학교 터, 신사참배 반대로 잡혀간 경찰서, 근무하던 조선대학교가 내려다보이는 곳이다. 시비에는 대표작 <가을의 기도>가 적혀있다.
최흥종 목사 누이의 아들인 정율성도 이곳 양림동 숭일 소학교를 졸업했다 ‘중국의 악성’이라 불리며 중국혁명가곡의 최고봉 '옌안송’과 중국 인민해방군가가 된 ‘팔로군 대합창’을 작곡하고 베이징인민예술극원, 중앙가무단, 중앙악단에 종사하면서 일생동안 모두 400여 편의 작품을 남긴 정율성은 중국에서 더 명성을 남긴 사람이다.
김현승 이수복 곽재구 문순태 조소혜의 작품을 회화로 표현하여 양림동의 문인들을 최초로 알렸고 양림동을 주제로 전시회를 개최하여 양림의 정신을 예술로 승화시킨 한희원 작가는 유년시절 정착했던 양림동에 미술관을 개관하여 양림동에 드리는 헌사라고 하였다.
◆ 펭귄텃밭에서 펭귄마을로
불이 나 전소된 빈집이 흉물처럼 자리하면서 방치된 곳에 쓰레기가 쌓이게 되자 동네 주민이었던 김동균 펭귄마을 촌장이 빈집을 깨끗이 치우고 그곳에 텃밭을 가꾸기 시작했다. 마을 주민들이 함께 텃밭에서 재배한 농작물을 나누며 친밀하게 되었다. 주민들은 불의의 교통사고로 불편한 걸음을 걷는 촌장의 모습이 펭귄 같다고 하여 펭귄마을로 이름 붙였다고 한다.
골목골목 아기자기한 공예품들이 전시되어 있고 마중물을 넣어줘야 품어져 올라오는 작두샘도 있다. 여기저기 뒤뚱뒤뚱 펭귄들도 보인다. 다 쓴 소화기 통도 펭귄으로 변신하였다.
◆ 과거와 현재를 잇는 역사문화마을 양림동
일제강점기에 판 방공호 뒹굴 동굴 원래는 가운데 광장을 만들어 네 곳에 입구를 둘 계획이었으나 지반이 단단한 화강암으로 구성되어 완공하지 못한 채 전쟁이 종료되어 네 개의 입구가 동굴로 남아있다 그중 뒹굴 동굴은 양파정 아래에 있는 동굴로 관람객이 직접 볼 수 있다.
양림동은 선교사 사택이 건설되며 광주에서 가장 오래된 서양식 주택 우일선 선교사 사택이 있으며 이곳엔 400년이 넘었다는 호랑가시나무, 피칸, 흑호두, 미국 은단풍 등을 볼 수 있다. 현재 양림동은 광주 남구 양림역사문화마을로 조성되어 각종 문화예술사업과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 과거와 현재가 함께 상생하는 양림동은 기독교문화, 독립운동, 시와 예술이 있는 마을로 거리를 걷다 보면 옛 조상들의 자취도 느끼고 개성 있는 카페에서 차 한잔의 힐링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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