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영정(風詠亭)과 극락강에 흐르는 애절한 사랑이야기

- 극락강변 언덕배기에 자리한 "자연을 즐기며 시가를 읊조린다."는 풍영정(風詠亭)
- 풍영정(風詠亭)에 남아있는 애절한 사랑 이야기

김오현 선임기자 승인 2024.06.21 00:11 | 최종 수정 2024.06.22 06:10 의견 2

신창동 광신대교 옆 언덕에 있는 김언거 선생의 정자 풍영정 전경과 소금장수와 장씨 처녀의 애절한사랑 이야기 유튜브 영상 사진(사진촬영 김낙현)

광주광역시 광산구 수완지구 풍영정 천변길공원에는 조선중기 칠계 김언거(漆溪 金彦琚)선생과 교류하던 7인의 당시 교류하였던 문인의 시비, 소금장수와 장씨처녀를 기리는 조형물, "장씨처녀와 소금장수의 풍영정 애사" 입간판이 서 있다. 여기에서는 1985년 광산군지에 실려 있는 "장씨 처녀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를 살펴보고자 한다.

광주광역시 광산구 수완지구 풍영정 천변길공원에 있는 풍영정 전경과 유튜브 영상 사진(사진촬영 김오현)

▶ 풍영정(風詠亭)

광산구 신창동 광신대교 옆 언덕위에 "자연을 즐기며 시가를 읊조린다."는 이름의 정자 '세상의 모든 잡념을 버리고 오로지 자연을 벗삼아 심신을 다스리겠다.'라는 뜻으로 지었다는 풍영정(風詠亭)이 영산강을 바라보며 서 있다. 풍영정(風詠亭)은 칠계 김언거(漆溪 金彦琚)가 지은 정자로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4호로 지정되었으며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다.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가동에 있는 이 누정은 앞으로는 극락강이, 뒤로는 선창산이 자리한다. 사람들은 풍영정 인근의 강줄기를 극락강(極樂江)이라고 부른다.

풍영정에는 한석봉(韓石棒)이 썼다는 제일호산(第一湖山)이라는 편액을 비롯해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 퇴계 이황(退溪 李滉), 남명 조식(南冥 曺植), 회재 박광옥(懷齋 朴光玉), 제봉 고경명(霽峰 高敬命)등 이곳에 시문을 남긴 이들의 면면만 봐도 풍영정의 위상이 어떠했는지를 가늠 할 수 있다. 그 당시 풍영정의 모습은 많이 변했지만 지금도 정자에서 바라보는 강의 풍경은 한 폭의 수채화 같다.

광주광역시 광산구 수완지구 풍영정 천변길공원에 새로 세운 풍영정 주변 전경과 풍영정에 시문을 남긴 7인 문인 시비들의 모습들...

▶ 칠계 김언거(漆溪 金彦琚)

풍영정(風詠亭)의 주인 칠계 김언거(漆溪 金彦琚, 1503~1584)의 자는 계진(季珍)이고, 호는 칠계(漆溪)·풍영(風詠)·관포당(灌圃堂)이며, 본관은 광산이다. 광주의 마지면(馬池面) 선창리(仙滄里, 현재의 풍영정이 있는 곳)에서 증사헌부집의(曾司憲府執義) 김정(金禎)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531년에 문과중시에 오른 뒤 옥당에 뽑혀 교리·응교 등 내직을 거쳐 상주·연안 군수와 승문원 판교(정3품)를 마지막으로 1560년(명종 15)에 정년 퇴임하여 정계를 떠나 꿈에 그리던 고향으로 돌아온다. 김언거(金彦琚)는 고향에 있는 극락강의 옛 이름인 '칠계(漆溪)'를 자신의 호로 사용할 정도로 이곳을 그리워했다. 칠계는 옻나무 ' 칠(漆)'과 시냇물 '계(溪)'의 합성어다. 칠계는 예로부터 극락강의 이름이고 강 인근에 옻나무가 많이 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풍영(風詠)'은 <논어>의 '선진(先進)'편에서 차용해왔다. 아마도 이 정자를 지은 김언거가 평생 꿈꾸던 '이상향' 같은 곳이었을 것이다. 향년 82세로 눈을 감아 강이 바라보이는 선창산의 언덕에 묻혔다. 칠계(漆溪)는 그렇게 고향 산천을 벗 삼아 시문을 짓고 풍류를 즐기며 도인 같은 삶을 살았다.

소금장수와 장씨처녀의 풍영정 애사 이야기의 조형물과 소개하는 간판들...

▶ 소금장수와 장씨처녀의 풍영정 애사 이야기

풍영정(風詠亭) 아래로 흐르는 극락강의 폭이 지금보다는 넓고 수심이 깊었던 옛날에는 이 정자 아래 나루터가 있어서 나주 영산포에서 소금을 싣고 소금배들이 들어왔다고 한다. 풍영정(風詠亭)에 전해오는 애절한 사랑이야기는 바로 그 소금배 오가던 시절의 사연이다.

조선말기 쯤, 서자출신으로 남몰래 학문을 연마하며 전국을 떠 돌아다니는 소금장수가 있었는데 늦여름 어느날 광주를 찾게 되었고, 그는 이곳 풍영정에서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던 중, 우연히 지체높은 양반 집안의 아름다운 장씨 처녀를 운명적으로 만나 애뜻한 사랑을 키워나간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막을 수 없는 신분 차이의 벽이 존재했다. 소금장수 총각은 서자라는 천한 신분이었던 반면, 처녀는 명문 가문의 규수였다. 서로의 사랑을 간직하면서도, 현실적인 어려움을 깨달은 둘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결국 둘은 견우와 직녀처럼 일년에 한 번씩 남의 눈을 피해 짧게 만나는 것을 약속하며 서로를 위로했다. 그러나 소금장수로서 전국을 돌아다녀야 하는 총각의 삶은 불규칙적이었고, 약속을 지키는 것이 쉽지 않았다.

소금장수와 장씨처녀의 풍영정 애사 이야기의 유튜브 영상 중요내용 화면캡쳐 장면들...

실제로 총각은 약속을 지키지 못했고, 3년 동안 소식을 전혀 알 수 없었던 장씨처녀는 부모님의 성화로 다른 사람과의 혼인날에 몸종과 함께 풍영정으로 도망을 치고 뒤를 쫓는 머슴들을 피해 달아나다 발을 헛디더 추락하게 된다. 그 뒤 소금장수는 다음해에 풍영정을 찾지만 며칠이 지나도 장씨처녀가 나타나지 않자 그녀의 집을 찾아 추락사의 말을 듣고 비탄에 빠져 나날을 보내다 소금장수 총각 역시 이승에서 못다한 장씨 처녀와의 애절한 사랑을 안고 극락강에 몸을 던져 장씨처녀와 함께 한쌍의 백로로 환생하였다는 사랑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후 풍영정은 불가능한 사랑의 상징적인 장소로 여겨지게 되었고, 둘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는 후대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전해 내려오고 있다.

기아국가유산지킴이 회원들이 신창동 광신대교 옆 언덕에 있는 풍영정에서 해설사와 함께하는 모습들...(사진촬영 오현)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창동 광신대교 옆 언덕에 있는 김언거 선생의 정자 풍영정(風詠亭)을 모델로 하여 수완지구 풍영정 천변길공원에 현대적인 상징물로 설치한 풍영정은 조선시대 문인들의 교류 장소로서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소금장수와 장씨 처녀의 사랑 이야기는 신분 차이를 뛰어넘는 순수한 사랑의 아름다움과 비극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민담으로 자리 잡았다.

🔳 참고문헌

1. 광주광역시, [광주읍지], 태양사, 1990.

2. 지역문화교류호남재단, [광주 역사문화자원 웹툰 100], 심미안, 2018.

3. 김윤기, [풍영정], 광주광역시 광주문화재단, 2019.

4. 염승연, [풍영정 애화], 디지털광주문화대전,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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