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태의 이슈! 문화유산] 조선의 북방 영토 인식: 백두산 정계비와 고이도 정계비

백두산정계비와 고이도정계비

김희태 전문기자 승인 2024.07.25 05:48 | 최종 수정 2024.07.30 04:52 의견 0

영토적 관점에서 현재 우리나라의 국경은 조선 세종(世宗, 재위 1418~1450) 때 사군육진(四郡: 여연군, 자성군, 무창군, 우예군 六鎭: 부령진, 회령진, 종성진, 온성진, 경원진, 경흥진)의 개척으로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조선의 북방 영토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는 흔적이 있어 주목되는데, 바로 백두산 정계비와 고이도 정계비다.

도문다리에서 바라본 두만강, 사진: 홍지선

그런데 많은 이들이 백두산 정계비에 대해서는 알아도, 고이도 정계비에 대해서는 연구자를 제외하면 찾기 어려운 편이다. 두 정계비 모두 청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고, 국경 관련 중요한 비석이지만, 결정적인 차이는 토문강(土門江)의 해석을 두고, 영토 분쟁의 여지가 있는 백두산 정계비와 달리 고이도 정계비의 경우 명백히 고이도가 조선의 땅인 것이 확실하기에 논란의 여지가 없었다는 점이다.

■ 백두산 정계비와 토문강

백두산 정계비는 1712년(숙종 38) 5월 15일에 세워졌다. 위치는 백두산의 동남쪽(장군봉과 대연지봉 사이)으로, 북한에서 백두산으로 올라가는 등산로인 동파 코스(주차장 시설, 동경 128.09 북위 41.992)에 있었다. 백두산 정계비는 조선과 청나라의 국경 관련 비석으로 주목되는데, 먼저 비문에 적힌 내용은 다음과 같다.

“大淸
烏喇摠官穆克登奉/旨査邊至此審視西爲鴨綠東/爲土門故於分水嶺上勒/石爲記
康凞五十一年五月十五日
筆帖式蘇爾昌通官二哥
朝鮮軍官李義復趙台相
差使官許樑朴道常
通官金應瀗金慶門”

정계비의 상단에는 대청(大淸)이 새겨져 있고, 그 아래에는 오라총관(烏喇摠官) 목극등(穆克登)이 변경을 조사한 뒤 두 강의 분수령이 되는 곳에 비석을 세웠음을 기록하고 있다. 또한, 비를 세운 시기(康凞五十一年五月十五日)와 비를 세울 때 참여한 관리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조선에서는 조선군관(朝鮮軍官) 이의복(李義復)과 조태상(趙台相), 차사관 허량(許樑)과 박도상(朴道常), 통관(通官) 김응헌(金應瀗)과 김경문(金慶門) 등 6인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백두산 정계비 탑본,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그런데 정작 조선 측 대표였던 접반사(接伴使) 박권(朴權)과 함경도 순찰사 이선부(李善溥)는 목극등이 나이가 많다 하여 동행을 허락하지 않아 정계비를 세우는 현장에 가지도 못했다. 이러한 정계비에서 논란이 되는 명문은 ‘서위압록(西爲鴨綠)’과 ‘동위토문(東爲土門)’이다. 뜻 그대로 정계비를 기준으로 서쪽 경계는 압록강(鴨綠江), 동쪽 경계는 토문강(土門江)으로 해석된다. 그런데 동쪽 경계인 토문강의 해석 범위를 두고 논란이 벌어졌다.

먼저 알고 넘어가야 할 점은 토문강을 해석하는 데 있어 시기별로 조선의 입장이 달랐다는 점이다. 숙종(肅宗, 재위 1674~1720) 때만 해도 조선의 국경 인식은 ‘압록강-백두산 천지-두만강’이었다. 이는 국경 획정 과정에서 목극등이 조선 측에 두 나라의 경계에 대해 물었는데, 이에 “장백산 산마루에 큰 못이 있는데, 서쪽으로 흘러 압록강(鴨綠江)이 되고 동쪽으로 흘러 두만강(豆滿江)이 되니, 큰 못의 남쪽이 곧 우리나라의 경계”라고 답한 부분에서 알 수 있다. 또한, 청나라 역시 토문강을 두만강으로 인식했는데, <숙종실록>을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토문강(土門江)의 근원은 백두산 동변(東邊)의 가장 낮은 곳에 한 갈래 물줄기가 동쪽으로 흘렀습니다. 총관이 이것을 가리켜 두만강(豆滿江)의 근원이라 하고 말하기를, 이 물이 하나는 동쪽으로 하나는 서쪽으로 흘러서 나뉘어 두 강(江)이 되었으니 분수령(分水嶺)으로 일컫는 것이 좋겠다...<후략>”
- <숙종실록> 숙종 38년(1712) 5월 23일 기사 중

따라서 조선과 청나라 모두 토문강을 두만강으로 인식했다는 점은 이견이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그런데 문제는 정작 다른 곳에서 터졌다. 목극등이 ‘토문강=두만강’의 발원지라고 생각하고 세운 정계비의 위치가 사실 두만강이 아니라 송화강으로 흘러가는 물줄기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훗날 간도 귀속을 두고 논란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처음 이 같은 사실을 인지한 조선에서는 이 문제가 외교적으로 번질 것을 우려해 소극적으로 대처했다.

하지만 고종 시기가 되면 사정이 달라졌다. 청나라가 자신들의 발상자라며 출입을 금지한 봉금지대로 두만강을 건너 조선인들이 황무지를 개간하고, 정착하면서 국경과 관련한 분쟁이 발생했다. 이때 조선은 정계비의 토문강을 분계강(分界江)이라 주장하면서 이는 조‧청간 외교 문제로 비화 되었다. 결국 조선과 청나라는 간도 영유권과 국경 문제를 다룰 두 차례의 감계회담(1885, 1887)이 열었는데, 이때 조선 측 대표였던 이중하(李重夏)는 기존 주장을 되풀이하며 맞섰지만, 이후 타협해 두만강의 최상류인 홍토수(紅土水)로 국경을 정하자며 수정 제안을 했다. 하지만 청나라는 이마저도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중하 역시 더 이상의 양보를 거부하며 회담은 결렬되었다.

백두산 천지, 사진: 김진숙
백두산 천지에서 만날 수 있는 국경 표석, 북한과 중국은 천지의 반을 분할, 국경으로 삼고 있다. 사진: 김진숙

하지만 을사늑약(1905)을 통해 조선의 외교권은 일제에 넘어가게 되었고, 우리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일제와 청나라는 간도협약(1909)을 체결, 그렇게 조선과 청나라의 국경은 석을수(石乙水)로 확정되었다. 한편, 현재의 국경은 1962년 체결된 조중변계조약을 통해 확정되었다. 해당 조약에 의하면 북한과 중국은 백두산 천지를 반씩 분할해 국경으로 삼고, 천지에서 홍토수까지 직선으로 그어진 국경이 만들어졌다. 다만, 조중변계조약은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 평가는 엇갈린다. 그렇지만 현재의 국경이 이중하가 수정 제안한 홍토수가 반영된 것과 정계비의 위치와 내용으로 볼 때 사실상 영토 밖에 있었던 천지의 절반을 가져온 부분은 북한에 유리하게 체결된 조약으로 평가할 수 있는 부분이다.

■ 또 하나의 정계비, 고이도 정계비

고이도(古珥島)는 두만강을 경계로 조선과 청나라의 국경인 곳으로, 함경북도 경흥군에 속했다. 본래 육지였으나 두만강의 물이 범람하며 섬이 되었으나, 이후 퇴적 작용으로 북한 쪽 땅에 붙어 지금은 육지나 다름이 없는 곳이다. 또한, 고이도에서 국경까지는 불과 5~6보에 불과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가까웠다.

이러한 고이도는 주로 꿩이나 토끼 등을 사냥하는 장소로 활용되었다. <북관기사>에 따르면 고이도에서 연례행사로 큰 사냥 대회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채제공의 시문집인 <번암집>에도 경원으로 순시하러 갈 때 고이도에서 사냥 약속을 하는가 하면, <고이도대렵가(古珥島大獵歌)>를 남기는 등 당시 고이도와 사냥 관련 기록을 여러 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퇴적 작용으로 고이도가 육지에 붙으면서, 백성들이 고이도에서의 개간을 허락해줄 것을 청원했다. 이 같은 내용이 전해지자 고종(高宗, 재위 1864~1907)은 1877년(고종 14) 김유연(金有淵)을 불러 고이도의 크기와 백성들이 개간하기를 원하는 넓이 등을 확인했다. 이때 김유연은 “우리 국경과 저쪽 경계가 강을 한계로 분명하고, 읍지(邑誌)와 비문(碑文)에 기록된 사실이 확실합니다.”라며, “이 기름진 땅을 꿩이나 토끼의 터전으로 버려두기는 실로 아까우니 백성들의 소원대로 경작하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김유연이 고이도가 우리 땅임이 명백하다고 근거를 제시한 것 중 비문(碑文)은 강희 갑인(현종 15, 1674) 3월에 3개의 석비(上,中,下)로 추정된다. 고이도에는 현종 때 세운 석비가 있었는데, 고이도를 둘러싼 조선과 청의 국경 관련 분쟁이 있던 1883년(고종 20)에 서북경략사(西北經略使) 어윤중(魚允中)은 고이도에 세워진 3개의 석비 중 상비(上碑)가 남아 있는 사실을 언급하며, 나머지 비석인 중비(中碑)는 강수에 쓸려가고, 하비(下碑)는 훈춘인이 파괴했음을 밝히고 있다. 해당 석비의 존재는 1674년 이래 고이도가 조선의 땅임을 입증하는 근거가 되었기에 청나라에서도 더 이상의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고이도 정계비, 함북경원 한청정계비라는 이름으로 소개되고 있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이후 어윤중은 1883년 9월에 이 같은 사실을 기록한 정계비를 고이도에 세웠는데, 이것이 바로 고이도 정계비인 것이다. 다만, 고이도가 있는 지역이 북한이다 보니 고이도 정계비의 존재 여부와 보존 상태 등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고이도 정계비의 사진은 남아 있는데, 일제강점기인 1914년 일제의 ‘조선고적조사’ 중 촬영된 사진이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 중인 고이도 정계비의 사진은 총 5장으로, 비석의 전경과 각 면을 촬영한 사진이 남아 있다. 이처럼 지금은 사라지거나 존재 여부를 확인하기 어려운 백두산 정계비와 고이도 정계비는 조선의 북방 영토에 대한 인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잊지 말아야 할 역사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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