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향교(光州鄕校) 옆 언덕에는 '사적비군(事蹟碑群)'이 있다. 이 비석(碑石)들은 원래 이곳에 있던 것이 아니라 광주 시내 곳곳에서 훼손되어 가고 있던 비를 1957년 광주공원 입구로 옮겼다가 1965년 다시 이곳으로 옮겨 세운 것이다. 주로 옛 관찰사(觀察使)와 도지사(道知事), 목사(牧使), 찰방(察訪)의 선정비(善政碑)와 불망비(不忘碑)가 대부분이다. 현재 26기의 사적비 중에서 행군수권공재윤청덕불망비(行郡守權公在允淸德不忘碑)를 살펴보고자 한다.
▶ 권율장군(權慄將軍) 후손 권창섭(權昌燮)과 권재윤(權在允)
◾️권율(權慄)의 9세손 권창섭(權昌燮)
권재윤(權在允)의 부친인 권창섭(權昌燮)은 영암군수로 1880년부터 1881년까지 재임하였는데 군수권공창섭청백선정비(郡守權公昌燮淸白善政碑)가 영암 향교 공적비군에 있다.
1885년 권율 장군의 시문집 '만취당유적(晩翠堂遺蹟)'을 편집하고 간행하여 그의 문학적 업적을 세상에 알리는 데 기여했다. 시문집은 7권 3책, 목 활자본으로 1885년(고종 22)에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에 홍직필(洪直弼)의 서문과 권말에 후손 창섭(昌燮)·우현(禹鉉)의 발문이 있고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있다. 또한 절제사권창섭영세불망비(節制使權昌燮永世不忘碑)는 1889년(고종 23)에 조선시대 절제사였던 권창섭의 영세불망비이다. 이 비석이 언제부터인지 군산시 미장동 서래포구에 있던 나무다리(현 경포교 인근) 받침으로 이용되다가 경포천 정비사업으로 매몰될 상황에 처하자 기증자(최정욱)가 본인의 집으로 이전하여 보관하다 기증하였다고 한다. 현재는 군산근대역사박물관 앞 마당에 세워져 있고 정확한 자료는 없지만 군산지역(군산진, 고군산진)의 수군을 지휘하던 절제사였던 것 같다.
◾️권율(權慄)의 10세손 권재윤(權在允, 중은)
도원수충장권공창의비(都元帥忠壯權公倡義碑) 는 권율 장군의 11세손 되는 권재윤(權在允, 중은)이 1901년 신축년에 전라도 광주군수로 부임하여 그 이듬해 1902년에 세운 것이다. 임진왜란 때 광주목사와 전라감사를 거쳐 조선 최고 사령관 도원수를 지냈던 권율장군(權慄將軍)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그리고 1906년(순종 1) 경상도 양산(梁山)군수로 부임하여 양산 최초의 근대학교인 양성학교(養成學校)를 세웠다. 그 공으로 1906년에 세운 권중은영세불망비(權重殷永世不忘碑)가 있다.
▶ 행군수권공재윤청덕불망비(行郡守權公在允淸德不忘碑) - 권중은(權重殷)
이 행군수권공재윤청덕불망비(行郡守權公在允淸德不忘碑)는 광주군수(光州郡守) 권재윤(權在允)의 불망비(不忘碑)로 계묘년(癸卯年,1903년)에 건립되었다. 권재윤(權在允)은 1901년에 광주군수로 부임하였고, 비의 앞면에 중은(重殷)으로 개명(改名)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권재윤(權在允)은 1900년(고종 37) 12월 광주군수로 임용되었다. 1903년 8월 조선왕조실록 기사에 ‘광주군수 권재윤의 이름을 권중은(權重殷)으로 고치겠다’고 내부 대신이 계를 올린 점으로 미루어 그때까지는 군수로 재임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만취(晩翠) 권율(權慄)의 후손으로 청렴결백하였고 일심(一心)으로 다스려 칭송이 자자하였다는 내용의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다.
권창섭(權昌燮)과 권재윤(權在允)은 권율장군(權慄將軍)의 유산을 보존하고 기리고자 노력함으로써 선조의 숭고한 정신을 이어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아무리 위대한 사람이라도, 제자(弟子)나 후손(後孫)이 잘 되어야 세상에 널리 알려지는것 같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도 혼자서는 세상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기 어렵고, 후손(後孫)들이 선조(先祖)의 업적을 기억하고 이어가야만 진정한 빛을 발할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 참고문헌
1. 김희태, [영암 향교 공적비군], 디지털영암문화대전, 2013.
2. 정인서, [권재윤-행군수권공재윤청덕불망비],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 2018.
3. 베란다정글, [군산근대역사박물관 앞 마당과 뒷마당], 네이버 블로그,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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