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끝자락에 벽진서원에 모여 선조들이 즐기던 다식만들기 체험과 지킴이 활동

- 자연에서 얻은 재료를 활용한 탄소 배출 없는 건강한 삶
- 막바지 무더운 여름 벽진서원 정화활동 및 모니터링 활동전개

한병기 선임기자 승인 2024.08.18 20:49 의견 0
청소년들과 함께 다식만들기 체험과 벽진서원 모니터링 및 정화활동

■ 벽진서원(壁津書院)

벽진서원(壁津書院)은 조선 선조 때의 문신인 회재 박광옥(懷齋 朴光玉, 1526~1593)의 영정과 문집 목판 등을 보관하기 위해 1999년에 완공된 서원이다. 이 서원은 원래 운리사(雲裏祠)로 개원하였으며, 2018년 6월 벽진서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박광옥은 조광조의 문인이었던 정황(丁潢)에게 수학하며 성장했으며, 21세에 생원 진사시에 합격했다. 그는 윤원형의 죄상을 공격하는 상소를 올리는 등 직언을 잘하는 선비로 알려졌다. 선조가 즉위한 후, 학행으로 천거되어 내시 교관이 되었고, 이후 여러 관직을 거쳤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는 의병을 모집하고 군량을 조달하는 등 큰 역할을 했다. 권율의 추천으로 나주 목사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취임하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1602년, 지역 유림들이 박광옥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벽진동에 사우를 짓고, 1604년 벽진서원이라 명명하였다. 이후 벽진서원은 사액서원이 되었으나, 1868년 서원훼철령에 의해 철거되었다. 그의 영정은 1927년 운리영당에 보존되었고, 1999년 운리사로 재건되었으며, 2018년 벽진서원으로 개명되었다.

현재 벽진서원에 회재 문집 목판은 광주시 유형문화재 제23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벽진서원 사랑채에 모인 기아국가유산지킴이와 광주서구자원봉사센터 임영희센터장과 직원 그리고 청소년이 함께한 다식만들기 체험

◆ 광주광역시 서구자원봉사센터 우수프로그램 공모사업 3차 시(자연에서 얻은 재료를 활용한 탄소 배출 없는 건강한 삶(다식 만들기 체험)

■ 한국 전통 다식의 유래와 발전

삼국시대부터 시작된 한국의 전통 한과인 다식(茶食)은 차 문화와 깊은 연관을 맺으며 발달해왔다. 다식은 붉은 곡식이나 천연재료의 가루를 꿀로 반죽해 특별한 틀에 넣어 문양을 새겨낸 유밀과(油蜜菓)로, 제사상에 오르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차와 다식을 체험하는 기아국가유산지킴이

다식의 기원은 "삼국유사"와 "성호사설"과 같은 고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다식은 삼국시대부터 차인 가루를 이용해 만들어졌고, 제사상에 올리면서 널리 사용되었다고 전해진다. 또한, "성호사설"에서는 다식이 송나라에서 전래한 "대소용단(大小龍團)"의 영향을 받아 발전한 것이라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기록들은 다식이 오랜 역사를 통해 어떻게 발전해왔는지를 보여준다.

청소년들과 함께 다식에 대해 알아보고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다식은 다양한 형태로 발전했다. 삼국시대에는 중차식(中茶式)으로 병차(餠茶)나 조선 시대 중차식의 다차(茶餠)로 만들어졌으며, 이후 기계의 도입으로 현재와 같은 형태로 발전했다. 다식은 중국의 전통 과자와도 유사한 점이 많지만, 고유의 맛과 문양을 통해 한국만의 독특한 문화를 유지해왔다.

다식틀과 완성된 다식

다식은 한자로 "茶食"이라 쓰며, 이는 "차로 만들어졌다"라는 의미와 "차와 함께 먹는 음식"이라는 의미를 동시에 지닌다. 흑임자, 송화가루, 녹말가루 등을 이용해 만든 다식은 오늘날까지도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조선시대 문헌인 "음식디미방", "규합총서", "임원경제지" 등에서도 다식에 대한 기록을 찾아볼 수 있으며, 이들 문헌을 통해 다식의 재료와 만드는 방법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처음 접하는 다식을 열심히 체험하는 청소년

다식은 단순한 과자를 넘어, 한국의 차 문화와 결합한 전통의 상징으로 자리 잡아 왔다. 오늘날에도 다식은 명절이나 제사와 같은 중요한 행사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며, 우리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배수로에 많이 자란 잡풀을 제거하년
기아국가유산지킴이 벽진서원 정화활동1
기아국가유산지킴이 벽진서원 정화활동2
기아국가유산지킴이 벽진서원 정화활동3

ICPSCⓒ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