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1488년(성종 19), 젊은 선비 최부(崔溥)는 예상치 못한 풍랑에 휩쓸려 중국으로 표류하게 된다. 148일이라는 긴 시간 동안 중국 대륙을 떠돌며 보고 느낀 모든 것을 상세히 기록한 것이 바로 '표해록(漂海錄)'이다. 그러나 표해록(漂海錄)은 일반인은 볼 수 없는 금서(禁書)로 남아 있다가 1569년(선조 2)에 외손인 미암 유희춘(眉巖 柳希春) 선생이 목판본을 발간하여 세상에 내놓았다. 미암 유희춘(眉巖 柳希春)은 최부(崔溥)·임억령(林億齡)·윤구(尹衢)·윤선도(尹善道)·박백응(朴伯凝)과 함께 '해남육현(海南六賢)'이라 일컬어진다.
▶ 미암 유희춘(眉巖 柳希春)선생
미암 유희춘(眉巖 柳希春, 1513~1577)선생은 아버지 선산유씨(善山柳氏) 유계린(柳桂鄰, 1478~1528)의 2남 3녀 중 차남으로 전라남도 해남에서 태어났다. 그가 살았던 집 뒤의 바위가 눈썹의 모양이라고 해서 호를 미암(眉巖)이라고 지었다. 미암 유희춘(眉巖 柳希春) 집안은 아버지인 유계린(柳桂鄰)이 금남 최부(錦南 崔溥)의 딸과 결혼을 하게 됨으로 인해 처가 고향인 해남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또한 여류문인 홍주송씨 송덕봉(宋德峯)이 유희춘의 처이다. 20세 때 최산두(崔山斗)·김안국(金安國)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대흥사(大興寺), 도갑사(道岬寺)에 머물며 학문에 정진하였다.
1538년(중종 33)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544년 사가독서(賜暇讀書)한 다음 수찬(修撰)·정언(正言) 등을 지냈고 한 때 시강원 설서로 동궁(東宮)이었던 인종(仁宗)의 사부였다. 1547년(명종 2)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 을사사화의 뒤 윤원형이 이끄는 소윤이 대윤 일파의 잔당을 숙청한 사건)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유배되었고 18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였다. 1567년 선조가 즉위하자 사면되어 성균관 직강(直講) 겸 지제교(知製敎)에 재등용되었다. 이어 대사성(大司成)·부제학(副提學)·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대사헌(大司憲) 등을 역임하고 1575년(선조 8) 이조참판(吏曹參判)을 지내다가 1576년 선조에게 사직을 청하기 위해 서울에 올라와 머물다가 사망하였다. 유희춘(柳希春)은 최부(崔溥)·임억령(林億齡)·윤구(尹衢)·윤선도(尹善道)·박백응(朴伯凝)과 함께 '해남육현(海南六賢)'이라 일컬어진다.
▶ 표해록(漂海錄)
세계 3대 중국 기행문 중 으뜸으로 꼽히는 표해록(漂海錄)은 1488년(성종 19)에 제주도에서 배를 타고 전라도 나주로 향하던 중 풍랑을 만나 14일간 표류하다가 명나라 태주부(台州府) 임해현(臨海縣)에 도착하였다가 영파 - 소흥 - 항주 - 소주 - 양주를 거쳐 북경으로 보내졌다가 148일만에 조선으로 돌아온 행적을 '출항 - 표류 - 귀국'이라는 시간 흐름에 따라 서술하는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여행기이다.
미암 유희춘(眉巖 柳希春)은 외할아버지 최부에 대한 자부심과 존경심이 컸던 이유로 외조부인 최부의 생애를 찬(撰)한 금남선생사실기(錦南先生事實記)를 남겼는데, 이 기록에서 최부에 대해 말하기를 "경술과 기절이 뛰어나 성종대왕에게 발탁되어 시종신(侍從臣)이 되었고 박학과 씩씩한 기절로 온 세상에 이름이 났었다"라고 평한다. 미암일기(眉巖日記)에서는 유희춘이 표해록을 간행하기 위한 일을 꾸준히 추진해 왔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금남집(錦南集)을 직접 편집 간행하였으며, 최부 사후 1569년 승정원에서 중조견문일기(中朝見聞日記) 원본을 찾아 발문을 써서 금남표해록(錦南漂海錄)을 발간하여 세상에 내놓았다. 그의 표류기는 우리나라에서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널리 읽혀진 책이다. 도쿠가와시대(徳川時代)에는 여러 판본과 사본이 통용되었으며 당토행정기(唐土行程記)라는 이름으로 일본어 번역본까지 간행된 바 있다. 미국에서는 1965년에 존 메스킬(John Meskill)에 의해 영어번역본이, 한국은 1979년 최기홍 선생에 의해 우리말 번역본이 발간되었다. 중국에서도 1992년 북경대학 갈진가(葛振家)교수의 소개로 '표해록(漂海錄)'이 세상에 나왔다. 또 지난 2005년 강소성 무석시 석혜공원에는 '최부표류사적비(崔溥漂流事迹碑)'를 건립한 바 있다. 현재 중국 지식인들이 한국인 중에서 존경하는 인물로 첫 번째를 이순신 장군, 두 번째를 최부(崔溥) 선생이라고 꼽는다. 최부(崔溥)선생의 표해록(漂海錄)은 조선의 존재를 서양에 알린 하멜의 표류기(漂流記)보다 200년 정도 앞 선 표류기(漂流記)로 당시 명나라의 선진문물에 관심이 많았던 조선은 물론 일본에까지 널리 알려진 표류기(漂流記)로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東方見聞錄), 일본 승려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와 함께 세계 3대 중국 기행문 중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된다.
미암 유희춘(眉巖 柳希春)의 기록에 의하면 16세기 조선 사림의 한 축을 형성한 것은 최부에게 배운 대표적인 사람이 해남윤씨(海南尹氏) 해남 입향조 어초은 윤효정(漁樵隱 尹孝貞, 윤선도의 고조부), 석천 임억령(石川 林億齡)의 숙부인 임우리(林遇利), 유희춘(柳希春)의 아버지 유계린(柳桂鄰) 등이다. 이 때문에 최부(崔溥)를 해남 인물사의 서막을 연 사람이라 하여 해남유학의 '비조(鼻祖)'라 부르기도 한다.
🔳 참고문헌
1. 문광훈, [해남윤씨와 금남최부선생], 네이버블로그 '녹우당의백련', 2007.
2. 최병호, [미암일기를 남긴 해남 출신 전라감사 유희춘], 전라일보, 2022.
3. 정윤섭, [세계 3대 중국 기행문, 최부의 '금남표해록'], 오마이뉴스, 2022.
#표해록 #최부 #임억령 #박백응 #윤구#윤선도 #유계린 #송덕봉 #유희춘 #조선시대 #해남육현 #표류기 #중국 #김오현선임기자
ICPSCⓒ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