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성당(集成堂),‘창건 제126주기 갑진년 추기 석채례(釋菜禮)’ 성황리 마쳐

道유형문화유산 승격 기원, 남포향교 유림중심 숭고한 역사와 정신 기려

임인식 선임기자 승인 2024.09.20 19:55 의견 0

충남 보령시 웅천읍 대천리 산14번지(구장터 3길 108)에 소재하고 있으며 1991년에 보령시 향토문화유적 제2호 지정된 집성당(集成堂) 창건 126주기 갑진년 석채례(釋菜禮)가 김완집 도유사, 한영탁 남포향교 전교의 주관으로 박상모 전시의장, 김충호 전부의장, 백명균 웅천읍장, 이영우 .명성철 전도의원, 엄승용 보령시발전협의회 회장, 임인식 보령국가유산지킴이 봉사단장 , 임명검 보령문화원 부원장, 윤서연 보령시 관광과 국가유산관리팀장, 김태익 학예 연구관, 지역유림 .주민등 3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황리 개최됐다.

전통 성균관 제례 의식따라 남포향교 한영탁 전교의 집례로 초헌관에 백명균 보령시 웅천읍장, 아헌관에 김문겸 남포향교 의전장의, 종헌관에 황규종 남포향교 재무장의 축관에 이종호 남포향교 장의, 찬인에 한상준 남포향교 총무장의가 맡아 엄숙하게 진행됐다.

김완집 도유사는 인사말에서 “특히 금년은 도지사 방문시 집성당 활성화 방안 건의와 무더위로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집성당 창건자이신 삼희당(三希堂) 윤석봉(尹錫鳳)선생의 뜻을 기리고 창건 제126주기 석채례를 보령문화재지킴이 봉사단에서 주변정리를 말끔히 한 상태에서 행사를 열게되어 정말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보령시의 집성당 처럼 문화유산은 우리 계레의 삶의 예지와 숨결이 깃들어 있고 소중한 보배이자 인류문화의 자산이다. 국가유산은 모두 민족 문화의 정수이며 자산이고 그 기반이라 하지만 유독 역사적 가치에 비해 이처럼 등한시 되어 있는 보령의 집성당(集成堂)은 3.1운동 115주년과 함께 6명의 독립운동가를 중심으로 새롭게 주목받고 있지만 지역민들의 무관심속에 오직 몇몇 뜻있는 인사들에 의해 보령의 전체성 확보와 웅천읍의 생명감을 찾기 위해 맥을 이어가고 있다.

한편 집성당은 보령 독립운동의 산실이며 구심점으로 유일한 보령의 강학기관으로 존재했던 집성당은 현재 보령시 향토문화유적 2호로 1991년 등록 되었으며 보령시 웅천읍 대천리 산 14번지에 자리 하고 있다.

연혁으로는 1898년3월 화서학파 삼희당 윤석봉 선생의 주도하에 옛 남포현을 중심으로 보령, 서천, 홍성, 청양, 부여등 인근 지역유림들에게 통문(通文)을 발하여 350여명이 참가(동참록(同參錄 참조)하여 주자의 영정과 우암송시열의 사상을 집대성하여 기리고자 제례를 갖추기 위한 사당으로 시작 되었다.

1905년8월 남포군수 이석재(李錫宰)는 초가집에서 기와집으로 개축도 하였고, 당직1명 과 유사1명, 공납[호포와 환곡]과 잡세[도정과 무명잡세]등을 일체면탈(세금면제) 한다는 완문책자(完文冊子:이조때 관아에서 부동산 따위의 처분에 관해 발급하던 증명서) 를 발급하였다.

또한 후학들을 강학(講學)하기위한 수칸의 한화당(寒華堂)을 건립하였는데, 특히 이곳에서는 항일위정척사 사상을 강론 하였다.

1906년 민종식이 주도한 홍주의병에도 이곳출신 문도들이 많이 참가하였다

1910년 11월 집성당 창건자 윤석봉은 홍주의거에 참여했다 피체되어 투옥으로 인한 지병이 악화되어 사망케 되었는데, 일제 강점기때는 민적부(호적부)에도 신고를 기피하여 무적자(無籍者)로 일생을 마쳤다.

1919년에는 집성당 배출인물중 옥재 백관형이 파리장서운동에 김지정과 참여 서명하였다. 특히 백관형은 1916년 만동묘에서 항일연설로 3개월간 옥고도 치렀고, 3.1운동에도 참여는 물론, 조선독립 애원서 작성서명 등등으로 피체되어 서대문 감옥에서 수형한 기록들이 남아있다.

아울러 1926(병인)년 8월에는 돈암이응복이 집성당 유지보수를 위한 속수계를 결성하여 석채례 제수나 기타 집성당 유지보수에 힘썼으며 1929(기사)년 2월 이교헌의 2차중수기가 있고 1957(창건후재정유)년 9월 임성순의 3차중수기가 있으며 1991(신미)년12월10일 보령시향토유적 제2호(313-83-0612)로 지정됐다.


이후 집성당은 부동산등기등록번호=>3438-00612를 취득후 1993(공부자탄강2544계유)년 오재섭의 중수(4차)기에 의하면 김학현군수가 주축이 되어, 중수 단청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전한다.

그리하여 집성당은 단순한 주자, 송자를 모시고 제사만을 지내는 사우(祠宇)가 아니고, 항일의 병의 사상을 가진 보령 서천 홍성 청양 등 인근의 선비들이 모여 활동하던 곳으로 일제강점기에 지역의 유일한 정신적 지주역활을 한 곳으로 평가 할만 하다.


특히 일제강점기에 윤석봉, 백관형, 유준근, 김복한, 유호근, 조구원, 신응선등 항일 유림들이 서로 교류하며 항일 의지를 심화(深化)하였던 곳으로서, 현재는 매년 2회 석채례(釋菜禮)을 올리며 옛 선열들의 숭고한 덕을 기리는 곳으로서, 오늘날 후손들이 선조들의 애국심을 선양(宣揚)하는 교육 장소로도 가꾸어 나가야 할 것이다.

한편, 이곳 집성당(集成堂)을 조명 하기 위해 2023년 제13차 서해문화포럼 학술대회에서 이해준 (현)공주대학교 명예교수의 23.11.30. 웅천 집성당 발제문 “웅천 집성당(集成堂)의 창건과 역사”에서 창건연혁, 창건주역과 활동인물, 집성당의 운영과 활동, 집성당 관련기록이 발표되어 집성당의 학술적 의미를 대내외에 선포했다.



*사진 : 박용서 보령문학관 운영실태 조사연구소장, 보령문화재지킴이 봉사단 홍보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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