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0년대의 우리나라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새로운 지식과 기술을 필요로 하였으며, 더욱이 일제(日帝)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켜야 하는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지식인(知識人)들은 위기에 처한 민족과 나라를 구하기 위해 교육사업을 하거나 교육 계몽운동에 앞장섰으며, 전국 각지에서는 자주 독립정신을 기르고 신지식 교육을 위한 학교들이 설립되었다. 우리 고장에서도 몇몇 마을에서 교육에 열성을 가진 독지가와 주민들에 의하여 사립학교가 설립되었다.
그중에서도 밀양의 선각자(先覺者) 문산 손정현(孫貞鉉, 1847~1905) 선생은 1897년(광무 원년) 내일동의 상설시장 터에 사립개창학교(私立開昌學校)를 세워 지금의 밀양초등학교를 있게 하신 분이다.
선생은 본관이 밀성(密城)으로 추천 손영제(孫英濟, 1521~1588)의 12세손이다. 밀양시 교동(校洞) 12 대문 집에서 태어났으며, 형(兄)이 안동 도산서원 도유사(都有司, 원장, 1913년)를 지낸 진사 손창현(孫昌鉉, 1844~1929)이다. 선생은 자가 문구(文九), 호는 문산(聞山)으로 1899년에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을 역임하였으며, 경세제민(經世濟民,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함)을 위하여 시국 개혁을 주창하였다. 성헌 이병희(李炳熹, 1859~1938), 심재 조경섭(曺兢燮, 1873~1933) 등과 함께 단연회(斷煙會)를 만들어 국채보상운동을 벌였으며, 상해임시정부 대통령을 지내신 겸곡 박은식(朴殷植, 1859~1925), 구한말의 우국지사 백하 송은성(宋殷成, 1836~1898), 독립운동가 계삼 김하락(金河洛, 1846~1896) 등과 교류하였다.
1899년 9월 황성신문과 독립신문에는 일본인이 울릉도에 불법으로 들어와서 산림을 벌채(伐採)하고 조선 사람과 잦은 마찰을 일으킨다는 보도가 연일 실렸다. 그리하여 대한제국 정부는 1900년 10월 27일 자 관보(제1716호)에 칙령 제41호를 게재(揭載)하여 울릉도와 독도의 영유권(領有權)이 대한제국에 있음을 세계에 널리 알렸다. 「밀양에 거주하는 선비 문산 손정현은 상소문 ‘논울도사(論鬱島事)’를 써서 왕에게 보내어, “이는 마치 도둑이 오히려 주인 행세를 시작하려고 한다.”라고 질타(叱咤)했다.」 변방의 유학자 눈에도 일제의 한반도 침탈이 동해의 울릉도에서 시작됐다고 생각했다.
선생은 당시의 개화(開化)운동에 영향을 받았으며, 세계의 흐름에 따라 민족의 앞날을 크게 걱정하여 모든 정성을 모아 오직 교육에 몸 바칠 것을 각오하고 국권을 회복하고 자주독립을 이룩하는 길은 교육을 통한 인재 양성임을 통감(痛感)하여 사립개창학교를 설립하였다. 이곳에서 선생은 우리 고장의 젊은이들에게 신문물을 익히게 하고 일제의 침략적 야욕(野慾)을 막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당시 젊은이들은 마음대로 공부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일제의 감시가 심해 선생이 바라는 교육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나라를 구할 훌륭한 인재를 양성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특히, 교육의 흥왕(興旺, 세력이 매우 왕성함)이 부국(富國)의 길임을 강조한 선생의 시국관(時局觀)을「문산 손정현에게 보낸 편지(與孫聞山-貞鉉-書), 겸곡문고(謙谷文稿)」에서 박은식은 편지를 보내어 찬탄(讚歎, 칭찬하고 감탄함)하였다.
1901년에 사립개창학교는 공립으로 인가(認可)되어 공립개창학교(公立開昌學校)로, 1906년에는 교육령으로 밀양공립보통학교(密陽公立普通學校)로 개칭되었다. 1921년에는 지금의 삼문동 밀양초등학교 터로 교사(校舍)가 옮겨갔으며, 1938년에는 밀양제일공립심상소학교(密陽第一公立尋常小學校)로, 1941년에는 밀양국민학교(密陽國民學校)로 교명이 바꿨다. 해방 후인 1946년에는 밀양공립초등학교(密陽公立初等學校)로, 다시 밀양국민학교(密陽國民學校)로 교명이 바꿨다가 1996년에야 지금과 같은 밀양초등학교(密陽初等學校)로 개칭(改稱)되었다.
밀양공립보통학교는 일제강점기에 밀양지역 민족(民族) 교육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던 교육기관으로 약산 김원봉(金元鳳, 1898~?), 석정 윤세주((尹世胄, 1900~1942), 최수봉(崔壽鳳, 1894~1921), 초산 김상윤(金相潤, 1897~1927) 등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하였다. 1919년 3‧14 만세운동 당시 학생들은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손에 들고 만세를 부르며 행진하였는데, 이에 수많은 지역민이 호응하여 동참하였다. 또한, 1922년 학생들은 일본인 교사를 배척(排斥)하기 위한 동맹휴업투쟁(同盟休業鬪爭)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학생들의 행동은 일제의 무단적 폭압 통치 아래에서도 밀양공립보통학교가 대표적인 민족 교육기관으로 그 역할을 견지(堅持, 굳게 지킴)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또한, 밀양공립보통학교는 19세기 말 국권 회복을 위하여 문산(聞山) 선생이 지향했던 학교설립의 취지, 즉 민족의식을 함양(涵養)하여 독립의 기초를 다지겠다는 목적을 계승‧발전시키고자 했다. 이 학교가 우리 고장에서 가장 역사가 깊고 자랑스러운 전통을 가진 오늘날의 밀양초등학교가 된 것은 선생의 위대한 업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는 손정현기념비(孫貞鉉記念碑)가 교정에 세워져 있다.
이 비(碑)는 1910년 6월 10일에 발기인 손지현, 박정규 등 4명(다른 2명은 일본인으로 추정되는 대정(大正)이란 글자가 지워졌다)에 의하여 세워졌다. 비석의 뒷면에 새겨진 비문(碑文)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는 고(故) 문산(聞山) 선생의 기념비이다. 선생은 우리 민족의 어리석음을 개탄(慨歎)하고 우리나라 교육제도의 몽매함을 탄식하다가 드디어 정유년(丁酉年, 1897년)에 주위의 꾸짖고 모욕함을 돌보지 않고 분연히 몸을 던져 외로이 개창학교(開昌學校)를 세워 일으켜 후생들을 가르쳤으니 선생의 공(功)이 참으로 클 뿐만 아니라 선생의 식견(識見) 또한 참으로 높다 하겠다. 이에 오늘에 이르러 이를 기념하여 잊지 않으려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개창(開昌)이라는 이름은 비록 없어졌으나 지금의 공립보통학교가 옛 개창학교로 인하여 크게 번창해진 까닭으로 이 비(碑)를 세워 기념하는 것이다. 지난해에 보통학교를 이전(移轉)하였는데 비석을 옛터에 그대로 남겨 두면 장차 이끼가 낄 뿐만 아니라 글자도 희미해질 것이니 이를 두려워하여 교장인 우에하라 사카에(上原榮)와 학무위원 손낙현(孫洛鉉) 양씨(兩氏)가 힘을 다하여 자금(資金)을 마련하여 이 자리에 옮겨서 세우고 다시 이 일을 기념하게 되었다. 이러한 일을 사람이라면 어찌 반대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일을 계기로 우리는 더욱 선인들의 유풍을 기리어 백세(百世)토록 이어 가리로다. 이 비를 스쳐 가는 자 어찌 존경하는 마음이 생기지 아니하리오! (1922년 10월 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