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지킨 강화도의 돈대를

윤명철

역사의 선택이란 늘 혼돈스럽고 예측이 불가능하다. 그런데 역사의 평가라는 것은 더더욱 종잡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엉뚱한 결과를 낳기도 한다. 그래서 더더욱 신중할 수 밖에 없다.

바다와 육지가 만나 자기 성격을 최후로 드러내며 섞어가는 길다란 선을 해안이라고 부르는데, 물길도 복잡하고, 모든게 예사롭지 않은 곳이다. 조수 간만의 차가 아주 커서 9m에 이를 정도인데다가 한강과 예성강이 바다와 마주치면서 조류자체에 대한 변화도 막심하다. 김포반도와 강화도 상에서 벌어진 사건을 설화화한 ‘손돌목 이야기‘는 이러한 사정을 반영한다. 밀물일 때에는 한강물이 서울의 양화대교까지 영향을 줄 정도이다. 갯뻘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넒고 두텁게 발달하여 간조때에는 해안가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수로 안에도 곳곳에 뻘이 드러난다.

그 때문에 물길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복잡하지만, 물길을 제대로 찾았다해도 배들이 접근하고 상륙하는 일 자체가 고난도의 기술을 필요로 한다. 거기다가 길이가 481km로서 한반도 내에서는 제일 길고 수량이 풍부하면서 정치적으로도 의미가 큰 한강이 흘러오다가 바다와 만나는 곳이다. 마치 큰 괴물 아가리 속의 목젖에 해당하는 곳에 육지같은 섬이 딱 막아서고 있다. 그 곳이 강화도이다.

배를 타고가 아닌 자동차를 타고 육지에서 강화도로 들어가려면 갑곶나루에 설치한 강화대교와 대명나루와 초지진 사이에 개설된 초지대교를 건널 수 밖에 없다. 강화대교는 김포반도와 한강 예성강을 동시에 방어하는 요충지이고, 초지대교를 세운 곳은 서해에서 강화도와 김포반도 사이의 협수로로 들어오는 입구를 방어하는 요충지이다. 조선후기에 쓴 『甁窩集』에는 이러한 귀절이 있다. “강화는 거대한 진으로 바다의 문이 되어 있고, 육지와는 접해있지 않으며, 부의 북쪽에는 뱃길이 통하지만 단지 물이 너무 넓어서 혹시 풍랑이라도 만나서 막히면 건널 수가 없고, 조강에 배를 매어두어야만 한다.” 강화도가 병영의 조건을 갖추고 있음을 표현한 문장이다.

강화도는 여러모로 특별한 가치를 지닌 장소였다. 역사적으로도 많은 사연들을 간직하고 있을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가치가 있었고, 무엇보다도 해양전략적으로 가치가 너무 높았다. 적어도 황해가 존재하고 한반도가 있으면서, 한강이 경기만으로 빠져나오는 상황이 계속되는 한 강화도는 동아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요충지 가운데 하나였다.

한반도 서해안의 연안항로를 이용하고자 할 때 반드시 거쳐 가거나, 그 영향권을 통과할 수밖에 없다. 한반도 북부를 통해서 내려오는 길, 중국의 강남지방에서 들어오는 길, 제주도에서 올라오는 길, 한반도의 남부 동해안에서 오는 길, 그리고 일본열도에서 올라오는 길 등, 이러한 항로들이 상호교차하면서 거쳐야 할 물목이 바로 경기만이다. 먼 옛날부터 그랬지만 근대에 들어와서도 마찬가지여서 이 곳을 놓고 조선은 몰려든 외국세력들과 전투를 벌였고, 그 전투에서 패배한 결과 국권을 상실했다. 강화도는 경기만 북부에 있으며,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육지질서와 해양질서 모두 힘이 부딪치는 격전장이었다.

경기만의 한가운데인 강화도는 한강을 비롯하여 경기 이북을 흐르는 임진강이 김포반도에서 한강과 합쳐져 다시 내려오다가 바다와 만나는 곳이다. 특히 황해도 지역을 아우르며 개성과 이어진 예성강이 한강은 강화도의 북부에서 만난다.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예성강 뿐 만 아니라 載寧江과 연결되고, 대동강과도 이어질 수가 있다. 따라서 이러한 그물처럼 뻗은 하계망을 활용하면 한반도 중부 지역 전체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고 통합할 수 있는 유리한 고지를 확보할 수 있다. 그리고 강화도는 한강과 예성강이 서해와 만나 깔대기처럼 아가리가 퍼진 만의 한가운데를 막고 있으며, 북부의 동쪽에는 김포반도와의 사이에 강화수로(염하)라는 매우 좁고 협수로가 있다. 더구나 조수의 급하고 흐름이 불규칙하여 사료에는 급수문이라고 기록할 정도이다. 그러한 환경에다가 나라의 수도가 현재 서울지역에 있을 경우에는 강화도야 말로 가장 중요한 군사거점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강화도에는 일찍부터 인간이 살고 있었다. 하점면 삼거리에 있는 신석기시대의 주거지들, 牛島에 발견된 신석기시대의 패총 등이 증거이다. 그리고 우리민족의 역사가 정식으로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강화도의 정족산에는 성이 쌓여졌다. 단기 67년의 일인데, 단군께서 세 아들을 시켜 쌓았다고 전해진다. 또는 단군께서 ‘三郞’이라는 신하를 시켜서 쌓았다는 설도 있다. 역사적으로 사실인가 여부를 떠나서 강화가 그만큼 중요한 곳이었다는 상황을 알려준다. 하점면에 남아있는 큰 고인돌군을 비롯해서, 섬 안의 곳곳에 남아있는 숱한 고인돌들을 보면, 상당한 정도의 경제력과 정치력을 지닌 나라가 있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남북이 28km 동서가 16km 주위가 112km에 달하며, 그밖에 섬들까지 합하면 해양면적은 더욱 늘어난다. 이러한 크기라면 고대 이전에는 독립된 소국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기원전 10세기 경에 지중해에선 이 정도 크기의 섬인 크레타섬에서 문명이 탄생했다.

이어 항구도시국가로 출발한 백제가 차지했는데, 한성을 수도로 삼은 그들에게 강화도가 얼마나 중요했으면 방패와 갑옷같은 존재라고 하여 갑비고차(甲比古次)라고 불렀을까? 물론 고유한 이름을 한자식으로 바꿔서 붙인 것이지만, 가능한 한 의미를 살린 것일 것이다. 갑곶이라하여 갑옷과 연관 시켰고, 관련된 설화가 전해온다. 고구려는 391년에 봉천산으로 추정되는 관미성을 점령한 후에 비중을 두었다. 장수왕은 고려산 기슭에 5개의 절들을 세웠고, 검증할 수는 없지만 연개소문이 하점면의 고려산 기슭에서 탄생했다는 설화까지 전해온다. 국가의 생사를 가를만한 혈(穴)자리에 해당한다고 생각해서 혈구군(穴口郡)이라고 명명했고, 3개의 현을 설치했다. 그리고 봉천산성(관미성 추정), 혈구성 등의 산성들을 쌓았다. 고구려에게 아주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던 것이다. 신라는 바다와 이어진 입출구라고 하여 해구(海口)라고 불렀다. 하지만 수도가 경주였고, 중국지역으로 가는 항로 또한 경기만의 남쪽인 남양만을 사용했기 때문에 비교적 강화도를 덜 소중하게 여겼다. 그래도 원성왕 때에는 이 곳에다 혈구진(穴口鎭)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고려에 오면 또 달라진다. 왕건 집안은 강화도와 주변지역을 배경으로 성장한 해양호족이다. 수도를 개경으로 삼고, 강화도를 외항으로 삼았다. 강화만을 ‘咽喉之處’로 삼은 것이다. 이렇게 해서 강화도는 중국지역의 전 해안과 동남아시아, 심지어는 아라비아까지 이어지는 6000km의 항로가 이어지게 되었다. 강화도는 말 그대로 국제시장이 열렸던 곳이며, 일종의 경제특구와 유사한 기능도 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세계 최강의 군대인 몽골군의 공격을 받았을 때 39년 동안이나 임시수도 역할을 하면서 항전의 본거지 역할을 맡았다. 그래서 고려인들은 강화도를 강도(江都)라고 불렀고, 나라가 멸망할 무렵에는 꽃같이 아름답고 소중한 존재라고 생각하여 강화(江華)라고 불렀다.

조선은 상업을 천하게 여겼고, 해양을 멀리했으며, 다른 나라와 교류하는 것을 매우 꺼렸으며, 군사력을 강화시키는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던 독특한 체제이다. 수도인 한양의 목이고, 모든 물류들과 공물들이 거의 대부분 강화도의 좁은 수로를 통과해서 한강으로 들어오는데도 강화도를 방어하는 일을 게을리 했다. 임진왜란 때에 참상들을 겪었고, 패배감에 휩싸였던 조선은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강화에 소속된 수군을 모아 강화와 육지 사이의 통로를 봉쇄하게 하였으며, 전국의 수군을 강화로 집결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조정은 허무하게 굴복하였다. 조선사회는 불안에 떨었다. 젊은 나이로 즉위한 자의식이 강한 효종은 이를 극복할 목적으로 북벌을 계획했지만 그 또한 불발로 끝났다. 이제 조선의 정치인들에게 다급해진 것은 수도인 한양을 어떻게 방어하느냐와 유사시에 비교적 안전한 피난장소를 마련하는 일이었다. 당연히 강화도가 주목의 대상일 수 밖에 없었다. 소중화를 자처하는 성리학자들이 오랑캐라고 업신여긴 여진족 또한 몽골군처럼 수전에 약할 것이라는 희망섞인 바램은 강화도는 아주 특별한 장소로 여기게 했다.

강화도가 이런 경험과 전략적인 가치가 높았다면 당연히 전쟁이 수시로 벌어지는 전장이었을테고, 그렇다면 수군을 거느린 해군본영과 함께 방어체제들도 세밀하고 촘촘하게 구축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드디어 조선정부로서는 야심찬 계획을 발표하고 실천에 옮기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돈대(墩臺)의 구축이다.

숙종 5년, 의 일이다. 그 무렵에 국방장관격인 병조판서 김석주(金錫冑)가 건의를 했다. 강화도는 군사요충지로 만들 필요가 있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돈대를 설치해야 한다고 다소 파격적인 주장을 한 것이다. 그는 탁상공론으로 돈대설치를 주장한 것이 아니었다. 직접 강화도의 지형을 관찰하고 어디가 전술적으로 중요한 가를 조사한 후에 구체적으로 그것도 구축하는 기술적인 방식도 함께 조언을 했다. 49개의 돈대를 설치할 것을 건의해서 쌓았고, 후에 다시 몇 개를 더 쌓았다. 강화도에는 결국 54개가 설치되었다.

물론 강화도에는 전 시대에 성들을 비롯해서 방어시설들이 많이 쌓았기 때문에 이를 토대로 삼아 치밀하고 조직적인 방어체제를 구축하자는 발상은 현실성을 갖고 있었다. 이미 고려 정부가 강화로 피신하여 강도정부를 세우면서 쌓은 내성이 있었다. 지금 강화읍내에 군청 경찰서 궁지 향교를 돌아가며 둘러쌓은 성이다. 보통 강화산성이라고 부르는데, 조선시대에 들어와 숙종 17년인 1691년에 다시 쌓았다. 길이가 7km정도인데 4대문과 소문, 그리고 장대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지금은 일부만을 복원하여 읍내를 통과하다보면 어느 정도는 볼 수 있다.

그리고 김포반도와 마주보는 해안가를 따라가면서 성을 쌓았는데, 그것이 외성이다. 아무래도 길이가 길고, 험난한 해안가를 따라서 한 난공사인 만치 많은 인원들이 동원됐고, 그것도 여러 번에 걸쳐서 연장을 했다. 숙종 때부터 시작해서 영조때까지 계속해서 축성을 했는데, 처음에는 토성이었지만 점차 벽돌로 교체하였고 마지막에는 석성으로 개조했다. 외성의 길이만 24km에 달했으니 방어력도 뛰어났지만, 아름답기도 했을 것 지금 김포반도와 마주보고 있는 강화도의 해안가에 있었는데, 토성의 흔적들이 20여 년 전에도 보이곤 했는데, 지금은 흔적을 찾을 길 없다. 다시 내성을 둘러싸고 돌아가면서 중성을 쌓았다. 물론 이 성들은 몽골의 압박에 의해서 많이 부쉈지만, 그래도 잔해를 남겨왔었다. 이외에도 몇 개의 산성들이 있다.

그런데 강화는 섬이다. 당연히 내륙의 산성들과는 다르게 바다와 연관된 시스템을 구축해야하고, 바다와 해안가가 지닌 자연환경을 최대한 활용해야만 했다. 그래서 해양방어체제를 큰 성을 보완하는 체계로서 ‘鎭 堡 墩臺’라는 복합적이고 유기적인 체계로 구성하였다. 진은 가장 큰 부대로서 첨사 등이 진주한다. 따라서 방어력이 높고 군사들이 많이 진주하고 있을 뿐 아니라 포대를 설치하였다. 일종의 진성으로서 적의 침입을 관측하고 초계활동을 할뿐 아니라 때로는 소속된 전선을 운영하면서 해상전투에도 참여한다. 진 밑에는 몇 개의 보(堡)가 있다. 유명한 광성보 전투가 일어난 광성보는 덕진진에 속해있다. 그리고 다시 각 보마다 몇 개씩의 돈대를 구축했다. 돈대는 적정을 관찰하고 소규모의 상륙군을 저지하는 소규모 진지로서 흙을 이용한 경우도 있지만, 강화도의 돈대들은 대부분 화강암을 잘 재단하여 정교하게 쌓은 방어력이 뛰어난 소규모의 방어시설물이다.

돈대는 주로 삼각뿔처럼 튀어 올라간 일종의 곶(串) 같은 형태에 설치하였으므로 필자가 정의한 곶성(串城)에 해당한다. 이러한 지형은 주로 바다가에 많은데, 방어자의 입장에서는 시계가 유리한 반면에, 공격군에게는 사각에 가까운 시계이다. 공격군은 곶의 안쪽 상황, 즉 방어진지 내부의 상태를 전혀 알 수가 없다. 예를 들면 대규모의 함선이 바로 코앞에서 대기하고 있어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전진할 수밖에 없는 지형이다. 또한 방어측에서는 마치 성벽구조에서 곡성(曲城)이나 치(雉)부분과 마찬가지로 방어면적이 넓고 광범위하며, 효율성 있는 지형이다. 반대로 진입군대는 공격해야할 범위가 매우 넓다. 뿐만 아니라 수로가 일직선이 아니라 휘어진 통로이므로 선단이 공격할 경우에는 신속하게 전진할 수가 없다. 이러한 체계는 항성과 행성 그리고 위성으로 배치한 것으로서 축차방어체제를 구축한 것이다. 강화도의 지형과 섬들이 많고, 해안선이 매우 복잡하므로 곶과 포가 많다. 그렇다면 벙어물을 설치하기에 유리하다. 이러한 군사환경을 고려하면 나름대로 효율성높은 체계임이 분명하다. 지금 강화도는 해병대 제 2사단이 방어하고 있는데, ‘진 보 돈대 체계’와 거의 동일하다. 그래서 돈대 등이 있는 지역은 영락없이 해병대 초소가 있다.

강화도에는 모두 12개의 진을 비롯하여 보, 그리고 돈대 54개로 구성되어있다. 가장 큰 진이 월곶진(月串鎭)이다. 첨사가 근무하면서 예성강쪽과 김포반도를 동시에 조망할 수 있는 곳애 화강암으로 견고하게 쌓은 성곽이다. 연미정으로 사용됬는데,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어서 전에는 접근이 금지됐었는데, 근래에 들어와 일반인들에게도 개방된다. 조선시대보다도 오히려 고려시대 때 전략적으로 가장 중요한 요충지였다. 월곶돈대 옥창돈대 휴암돈대 적북돈대 등이 소속되었다. 유적이 일부 남아있지만 대부분 유실되고, 잔해조차 일반인들은 볼 수 없다. 그리고 강화대교 건넌 곳에 있는 제물진이 컸었었는데, 지금은 강화역사박물관이 세워져있다. 염하의 건너편인 김포반도에 있는 문수산성과 공동작전을 벌이는 곳이다. 유명한 갑곶돈대와 포대가 설치됐고, 제승돈대 등이 있다. 그 아래의 염하가에는 최초의 근대식 해군사관학교가 있었다. 물론 지금은 기와조작 조차 남아있지 않지만 말이다.

해안도로를 타고 내려가면 용진진이 나타나는데, 과거에는 유적이 전혀 없었는데, 근래에 문루를 새로 복원해서 위용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덕진진에 편재된 돈대가 유명한 광성보이다. 제법 큰 규모의 관광지로 변모했는데, 주차장 옆의 화장실 자리는 그 무렵의 무기고 자리이다. 막 바로 덕진진(德津鎭)이 나타난다. 그야말로 역사의 현장이다. 덕진진에는 남창포대가 지금도 해안가에 있고, 그 건너편에는 김포의 덕포진이 역시 포대를 설치해서 화망을 구성했었다. 그리고 오두돈대가 있다. 해안가의 성이나 돈대 등에는 오두라는 명칭이 붙은 경우가 많다. 오두는 까마귀머리라는 뜻인 烏頭, 또 하나는 자라머리라는 뜻인 鰲頭라고 쓴다. 일종의 곶성이므로 당연히 자라머리모양이고, 그렇다면 鼇頭가 맞다. 그리고 다시 대략 1km 정도로 떨어져 만들어진 몇 개의 돈대들을 지나면 초지진에 이른다.

초지진(草芝鎭)은 특별한 성이다. 바다에서 육지로 들어오는 입구를 방어하는 중심성이라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늘 첫 전투가 벌어졌다. 초지진은 숙종 이전에 만들었다. 효종 임금 때 처음 쌓았는데, 다시 숙종을 거쳐 영조 때 확충 보완했다. 초지돈대 섬암돈대 등이 소속되어 있었고, 전선 3척을 거느렸으며, 40 여문의 대포를 설치하였는데, 지금도 일부는 전시하고 있다. 1866년에 일어난 병인양요 때 프랑스 함대와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몇 년 뒤인 1871년의 신미양요 때는 미국이 파견한 아시아함대와 전투를 벌여 포탄공격을 받았고, 점령당했던 적도 있었다. 그리고 다시 4년 후인 1875년에 일본이 파견한 운양호와 전투를 벌였다.

그리고 계속해서 내려가면 영종도 신도 등이 있는 해양에서 들어오는 배들을 검문하는 동검도가 있고, 주변에 역시 동검북돈대 등이 구축되어 있다. 이어서 석모도 볼음도가 보이는 강화도의 서쪽 해안의 망월돈대 등을 거쳐 서쪽의 검문소인 서검도를 지나 교동도로 가는 배들이 출발하는 선착장 근처의 무태돈대, 과거에 교동도로 건너가던 나루가 있는 인화진과 인화보 등이 있다. 그리고 예성강 하구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별립산 밑에는 철곶보와 거기에 소속된 돈대들이 있다. 이곳의 돈대들은 지금 군사상의 이유로 인하여 접근이 안된다. 이렇게 강화도 전제를 돌아가면서 요충지를 點처럼 엮어 방어망을 구축한 것이 돈대이다. 조선시대에는 몇 군데 돈대를 설치했지만, 극히 일부이고 전형적인 체계이면서 가장 많은 숫자가 있는 곳이 강화도이다. 조선이 구축한 돈대체제는 지금 해병대 2사단이 물려받아 유사한 시스템으로 서해와 경기만 그리고 수도 서울을 방어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돈대들이 설치된 곳 근처에는 나루가 있어서 한강을 오고가는 배들이 정박하거나 강을 건너다니는데 활용했다.

돈대체계를 구축하는 사업은 조선으로 봐서는 실로 어려운 선택이었다. 농경의 나라로서 국가수입은 넉넉하지 못했을테고, 끝내 정신을 못 차린 양반 관료들이 국방사업을 벌이는 일을 반대하는 것이 만만치 않았을 것은 분명하다. 그래도 전쟁에서 잇다른 패배를 겪은 백성들의 불안감을 줄여주고, 무기력한 조정에 대한 신뢰도 회복시키고, 국방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데 적지않은 역할을 했을 것이다. 사실 그건 시기적으로도 옳았고, 강화도라는 지역도 옳은 선택이었다. 만약 소리만 큰 대포들을 장착한 조그만 범선들이 활개치는 그러한 시대가 계속되었다면 말이다. 하지만 그 무렵에도 세상은 이미 변하고 있었다.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서 강화도를 위협한 것은 강력한 화력을 갖춘 서양의 증기선들이었고, 그들은 강화도를 넘어 조선 자체를 위협했다. 돈대들은 전근대식 방어체제로 약간의 저항을 해봤지만, 역부족이었다. 군인의 문제, 군대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정체의 문제, 세계질서의 문제이었다. 결국 조선은 굴복하고 나라를 빼앗겼으며, 제 구실을 못한 돈대들은 버림받은 채 무너져 사라졌다.

난 때때로 강 같은 바다를 건너 강화도로 들어간다. 유치한 초록철제 난간이 박힌 다리 위를 달리면 왼쪽으로는 서해바다가, 오른쪽으로는 이름도 어여쁜 아담하고 야무진 초지진의 둥그런 성이 눈길을 잡는다. 보름달이 뜨는 날이면 초지진은 포탄 맞은 상처를 노랗게 드러내며 역사의 소리를 토해낸다. 부글부글 끓어대는 조수의 굉음과 섞여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