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 외암마을 전경, 외암집, 외암선생문집판각(사진제공 국가유산청, 아산시 외암마을 홈페이지)

조선 후기, 전의예안이씨(全義禮安李氏) 온양파의 문중에서 태어난 외암 이간 선생(巍巖 李柬)은 그중에서도 뛰어난 학식과 인품으로 많은 이들의 귀감이 되었다. 숙종 때 사림학자 등용 과정에서 여러 차례 천거되었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고향인 외암마을에서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힘썼다. 또한 수암 권상하(遂庵 權尙夏) 문하의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의 한 사람으로, 같은 문인인 남당 한원진(南塘 韓元震)과 벌인 이른바 호락논쟁(湖洛論爭)은 18세기 초 수도권과 충청권 지식인 사회를 뜨겁게 달구면서 조선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특히, 이후 기호학파 내에서 100여 년 이상 지속된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의 동이(同異) 논쟁에서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의 단초를 개척한 학자로 평가받는다.

외암 이간 선생 불천위제향, 이간 신도비, 이간선생의 묘(사진제공 네이버검색, 아산시 외암마을 홈페이지)

▶ 외암 이간(巍巖 李柬) 선생

아산 외암마을 전의예안이씨(全義禮安李氏)의 입향조 이사종(李嗣宗)의 5세손인 외암 이간(巍巖 李柬, 1677 ~ 1727)은 외암마을의 상징적인 인물이며, 자는 공거(公擧), 호는 외암(巍巖)·추월헌(秋月軒)이다. 구전에 의하면 이간(李柬)은 마을 내 건재고택(建齋古宅)에서 태어났으며, 할아버지는 충청도 수군절도사·태안군수 겸 방어사(防禦使)를 지낸 이박(李璞)이다. 아버지는 군수 이태정(李泰貞)인데, 큰아버지인 부호군(副護軍) 이태형(李泰亨)에게 양자로 갔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4세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했고, 10세 때에는 서울에 거처하면서 본격적으로 학문에 전념하였다. 20세(숙종 22년, 1696)에 파평윤씨(坡平尹氏) 윤헌(尹㦥)의 딸과 혼인하였다. 숙종 36년(1710)에 사림학자(士林學者)를 등용(燈用)할때 학행(學行)으로 장릉참봉(莊陵參奉), 시강원 자의(侍講院 諮議), 종부시정(宗簿寺正) 등 여러번 천거 되었으나, 모두 사직상소를 올리고 나아가지 않았다. 단지 회덕현감(懷德縣監)으로 제수된 1년 여의 시간을 제외하고는 일생의 대부분을 외암마을에서 학문연구와 후진 양성에 전념했다. 이 때문에 그는 관직보다 학자(學者)로서 명망(名望)이 높았으며 조선조 후기의 호락논쟁(湖洛論爭)은 율곡 이이(栗谷 李珥) -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 -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 수암 권상하(遂庵 權尙夏) - 외암 이간(巍巖 李柬)으로 이어지는 기호사림(畿湖士林)의 중심계열 학자이다. 특히 이간(李柬)과 한원진(韓元震) 사이에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한원진의 호론과 이간의 낙론 비교

이간(李柬)의 주장은 주로 낙양(洛陽), 즉 서울·경기 지역의 학자들이 많이 동조해서 낙론(洛論)이라고 하고 호서(湖西), 즉 충청도의 학자들은 대개 한원진(韓元震)의 주장에 동조했기 때문에 호론(湖論)이라고 하였다. 낙론(洛論)과 호론(湖論)의 쟁점은 크게 두 가지였다. 우선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 즉 금수(禽獸, ‘날짐승과 길짐승’이라는 모든 짐승)도 사람처럼 오상(五常, 인·의·예·지·신)을 가지고 있나 없나 하는 문제이다. 또 하나는 사람이 정(情, 희노애락)이 발동하지 않은 미발(未發, 일이 아직 일어나지 않음)의 상태일 때 선악이 나타날 수 있는 기질이 있나 없나 하는 문제였다. 이간(李柬)은 18세기 이후 기호학파 내에서 100여 년 이상 지속된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의 동이(同異)에 관한 논쟁에서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의 단초를 개척한 학자였다.

이간이 올랐던 영보정의 현재 모습과 윤혼(尹焜)과 함께 학문 연마와 후학들을 가르치던 권선재의 모습

숙종실록에서도 '호서사인(湖西士人, 호서지방에서 으뜸인 선비) 이간(李柬)'이라는 표현이 보이듯 이 온양 향리에서 주로 지낸 이간(李柬)은 31세 되던 해 권선재(觀善齋)를 건립하여 사돈이자 벗인 윤혼(尹焜)과 함께 학문 연마와 후학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영조3년(1727) 51세에 생을 마치니, 예관(禮官)을 보내 장례물품을 하사하고 치제(致祭, 윗사람이 제물과 제문을 내리어 죽은 아랫사람을 제사하는 일) 하였다. 순조 2년(1802)에 이조판서(吏曹判書)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에 추증(追贈)되고 문정 (文正)의 시호(諡號)가 내려졌다. 저서(著書)로는 외암집(巍巖集)·성리서(性理書)인 미발변(未發辨)이 남아 있고 아산시 송악면 외암리 강당골 문천사(文泉祠)에 배향되어 있다. 이간(李柬)에게는 네 아들이 있었는데, 둘째 아들인 이이병(李頤炳)이 1760년에 아버지 이간(李柬)의 원고를 정리하여 외암유고(巍巖遺稿)를 간행하였다.

외암 이간과 천서 윤혼의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자 외암유고 목판을 보관하는 문집판각, 관선재, 문천사의 전경
외암마을의 대표적 학자 이간선생의 사당의 모습


외암 이간(巍巖 李柬)은 조선 후기 성리학의 거두로서, 호락논쟁(湖洛論爭)을 통해 조선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힘썼으며, 그의 학문은 18세기 이후 기호학파 내에서 100년 이상 지속된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의 동이(同異)에 관한 논쟁에서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의 단초를 개척했다. 이간(李柬)은 18세기 초 수도권과 충청권 지식인 사회를 뜨겁게 달구면서 조선 전역으로 확산되는 바람에 16세기에 이황(李滉)과 기대승(奇大升) 사이에 벌어졌던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과 함께 조선 성리학계의 최대 논쟁으로 평가받고 있다.

🔳 참고문헌

1. 이경구, [이간의 한산기행, 호락논쟁의 서막을 열다], 한겨레신문, 2015.

2. 김선명, [이간(李柬)],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019.

3. 박경귀, [외암이간 선생], 아산시 아산외암마을 ,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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