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문화재지킴이봉사단, 토정비결로 갑진년(甲辰年) 희망(希望)을 품다!

세시풍속 토정비결책(冊) 4년 째 무료 보급으로 OK, 만세보령(萬世保寧) 홍보

임인식 시민기자 승인 2024.02.08 20:29 | 최종 수정 2024.02.09 07:21 의견 6

東風解凍 枯木達春 (동풍해동 고목달춘) : 이제야 좋은 운이 돌아왔으니 재물은 왕성하고 경영하는 일은 칠팔월이 되리로다 사월과 오월에는 다른 사람의 구설을 조심라! (첫 페이지)

갑진년(甲辰年) 청룡(靑龍)의 해를 맞아 1천원짜리 지폐의 퇴계 이황(李滉) 선생과 5천원짜리의 율곡 이이(李珥) 선생과 동시대의 버금가는 학문과 애민사상(愛民思想)의 선각자 토정 이지함(李之菡) 선생의 ‘도덕창고’ ‘인재창고’ ‘재화창고’ 등 민생 구제 위한 ‘3대 창고론’이 다시 새해 화두로 공직자의 표상과 지도자의 덕목으로 눈길을 끌며 북학파의 실학에 200년 앞서 새로운 조선을 만들기 위한 혁신안 제시한 역사가 충남 보령(保寧)을 중심으로 이목이 쏠리고 있어 향후 귀추가 주목된다.

역사를 보면 조선의 사대부들은 도덕과 의리를 앞세우면서 실리와 편익에 대해서는 눈감았다. 토정(土亭)은 이런 시대의 흐름에 맞서 오히려 이익을 즐기고 재물을 탐하자고 주장했다. 백성의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임금도 직접 나서야 한다는 상소문을 올리기도 했다. ‘군자(君子)는 이익을 말하지 않는다’ 는 불문율을 깨고, 백성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 민생고(民生苦)를 해결하고자 했던 이지함의 삶과 사상을 재평가해야 한다는 여론이 뜨겁다.

그는 기품이 신이했고, 성격이 탁월해 어떤 격식에도 얽매이지 않았다. 장가들어 초례를 지낸 다음날 밖에 나갔다가 얼어 죽게 된 거지 아이들에게 자신의 새 도포를 나눠 입혀주었다. 어렸을 때는 글을 배우지 않다가 형 이지번(李之蕃, ?∼1575)이 학문을 권한 뒤 뜻을 세우고 열심히 공부해 마침내 경전(經傳)에 통달했다.

또한 온갖 역사책과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책까지도 섭렵했다. 과거시험을 준비하다가 이웃 집 사람이 과거 합격 잔치를 벌이자 과거를 천하게 여기고 공부를 중단했다. 그가 사람들을 관찰하면 어진 사람인지 아닌지, 또한 그들의 길흉(吉凶)을 알아맞혔다.

나라 곳곳을 방랑하며 다니던 젊은 시절에는 방문지의 수령들이 그를 시험해보고자 뛰어난 기생을 시켜 온갖 수단으로 유혹하게 했지만, 색욕까지도 이겨냈다. 열흘을 굶고도 견뎌냈고, 무더운 여름철에 물을 마시지 않고 지내기도 했다. 초립(草笠)을 쓰고 나막신을 신은 채 구부정한 모습으로 돌아다녔기에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며 비웃었지만 아무렇지 않게 여겼다. 바다에서 배를 타는 것을 좋아해 제주도에 자주 갔지만, 바람과 조수의 흐름을 미리 알았기에 한번도 위험에 빠지지 않았다.

항상 말하기를, “내가 일백 리 되는 고을을 얻어서 다스린다면 가난한 백성을 부자로 만들고, 야박한 풍속을 돈독하게 만들고, 어지러운 정치를 다스려 나라의 보장(保障)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말년에 아산 현감이 되었는데, 애민(愛民)으로 다스렸고, 백성을 해롭게 하지 않고 폐단을 제거하다가 갑자기 병으로 죽었기에 고을 사람들은 친척이 죽은 것처럼 슬퍼했다.

위의 글은 <선조수정실록>에 기록된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 1517~1578)의 졸기를 요약한 것이다. 그는 김시습 · 정렴과 함께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기인(奇人) 혹은 방외지사(方外之士)였다. 실록의 기록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것처럼 유학 외에 천문(天文)·의약(醫藥)·산수(算數)는 물론 점술과 풍수까지 정통했다.

매년 신년(新年) 새해가 되면 1년의 운세를 볼 수 있는 ‘토정비결’(土亭秘訣)을 지은 이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현대인에게도 아주 익숙한 인물이다. 서울 마포구 토정동도 그가 한강의 범람을 대비해 마포 강변에 흙으로 언덕을 쌓고 집을 짓고 살면서, 그 집을 ‘흙으로 만든 정자’ 즉 ‘토정(土亭)’이라고 부른 데서 유래했다.

[불운의 연속, 앞을 볼 수 없는 낙인의 세월]

아직까지도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는 경세가였고, 우리나라 최초의 경제학자, 사회복지의 선구자이다. 인생 후반전에 포천 현감으로 재직할 때 쓴 ‘포천에 부임했을 때 올린 상소(莅抱川時上疏·이포천시상소)’는 조선 최초의 국부론(國富論)이라 할 만하다.

이는 세계 최초의 근대 경제학 저술로 일컫는 애덤 스미스(Adam Smith, 1723~90)의 <국가의 부(富)의 본질과 원천에 대한 탐구>, 즉 <국부론>보다 200여 년이나 앞서 나온 탁견이다. 아산 현감으로 부임하자마자 설립한 빈민구호시설 ‘걸인청(乞人廳)’도 1884년 영국에서 세계 최초로 설립되었다는 사회복지관 ‘토인비홀(Toynbee Hall)’보다 300년을 앞선 것이다.

실록 속의 이지함에게서 양반의 나라, 선비의 나라 조선에서 보통의 양반이나 선비와는 크게 다른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새 도포를 거지 아이에게 벗어준 자비로운 인물, 성리학은 물론이고 다양한 분야의 책까지도 섭렵할 만큼 왕성한 호기심과 지식욕이 강했던 탐구인, 조선의 모든 양반이 꿈꾼 과거 급제를 천하게 여겼던 선비, 처가의 재앙을 미리 예측한 예언가, 수양을 강조하는 선비와 도를 닦는 스님도 어렵다는 색욕까지 극복한 절제력의 소유자, 대륙 지향적인 조선 사회에서 바다를 제 집처럼 여기며 누구도 가기 싫어했던 제주도를 세 번이나 왕래했던 바다 사람,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차별과 상업을 천시했던 조선에서 큰돈을 벌었던 상인, 제방을 쌓아 바다를 막으려 했던 토건인, 포천과 아산을 다스렸던 행정가로서의 이지함 말이다.

그 자신의 신분이 양반이자 선비였던 이지함이 조선에서 가장 천하게 여기던 말업(末業)과 바다에서 배 타기를 즐겼다는 것은 그를 시대의 이단아로 평가하기에 전혀 무리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장사꾼 이지함’, ‘경세가이며 경제학자인 이지함’의 탄생은 알수 없는 운명의 가혹한 시련 때문이기도 했고, 천성적으로 자유분방한 성격 때문이기도 했다. 이지함이 ‘장사꾼’으로 살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정변과 사화가 빈번했던 시대적 상황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본디 이지함은 명문가 출신이다. 고려 말 대학자로 포은(圃隱) 정몽주, 야은(冶隱) 길재와 함께 삼은(三隱)의 한 사람으로 존경받던 사대부 목은(牧隱) 이색의 6대손이다. 아버지 이치(李穉, 1477∼1530)는 1504년에 일어난 갑자사화에 종조부(從祖父) 이파가 연루되면서 진도로 유배되었다가 1506년 중종반정 때 풀려났다.

이듬해 사마시 합격한 후 의금부 도사, 수원 판관을 지냈다. 어머니도 명문가 광산 김씨 보령의 수호신 김성우 장군 집안 출신이었다. 이지함의 외할아버지 김맹권은 세종 때 집현전 학사로 세종의 신임을 받았다. 그러나 1455년 세조가 단종을 폐위하고 왕위를 찬탈하자 보령으로 낙향해 관직을 멀리했다.

이지함의 가족사에는 시대의 고통이 배어 있었다. 그런 영향으로 어릴 적에는 의도적으로 글을 멀리했던 듯하다. 청소년기에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두 여의고, 큰형 이지번에게 의탁해 살아가야 했다. 20대 초반에는 왕가의 후예인 이정랑의 딸에게 장가들어 잠시 날개를 단 듯했다. 처가인 충주 인근에 살면서 다양한 학문을 공부하고 과거시험도 준비해 급제할 수준까지 되었다. 하지만 불운이 그를 다시 잡아 이끌었다.

아버지와 스승 역할을 하면서 학문을 권유했던 형 이지번이 번번히 과거에 낙방했다. 형을 제치고 먼저 과거시험에 합격할 수 없어 형의 합격을 기다리며 과거시험을 다양한 방식으로 포기했다. 그러나 그 시련의 순간에도 학문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당시 개성에 살면서 새로운 학문을 개척하던 화담 서경덕을 찾아가 제자가 되었다. 훗날 동인(東人)의 영수가 된 허엽, 서인(西人)으로 영의정에 오른 박순 등이 그때 서경덕 문하에서 같이 공부한 사람들이다.

[형의 합격을 기다리며 과거시험을 포기]

형 이지번이 마침내 1546년 진사에 합격했다. 30세의 이지함에게도 다시 볕이 드는 순간이었다. 의도적으로 연기했던 과거급제에 다시 매진했다. 그러나 봄날의 따뜻함도 난데없는 기상이변으로 끝나고 말았다. 1548년, 32세 이지함의 생각을 바꿀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죽마고우로 당시에 사관(史官)이었던 안명세(安名世, 1518∼48)가, 윤원형·이기·정순붕 등이 일으킨 을사사화를 비판하는 시정기(時政記)를 써놓은 것이 누설되어, 처형된 것이다. 부정한 권력의 불의한 횡포로 그는 다시 관직에 회의를 품고 방황했다.

설상가상으로 또 다른 비극이 닥쳐왔다. 그는 충주의 처가 근처에 살았는데, 어느 날 장인과 처남의 길흉을 살펴보다가 불길한 것을 예측했다. 그는 형 이지번에게 “제가 처가를 관찰했더니 길한 기운이 없습니다. 피하지 않으면 재앙이 저한테도 미칠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가족을 이끌고 고향 보령으로 내려갔다.

그 말처럼 얼마 후 ‘이홍남의 고변사건’ 또는 ‘청홍도 사건’이란 대형 역모사건이 일어났다. 이홍남의 고발에 따르면, 이지함의 장인 이정랑은 역모자들이 왕으로 추대한 인물이었다. 장인은 모진 형벌을 받다가 사망했고, 시신까지 능지처참형에 처해졌다. 이정랑과 그 자손들은 왕실 족보인 <선원록>에서도 삭제되는 수난을 겪었다.

이 사건의 중심지였던 충주는 역적의 소굴로 지목되어 유신현(維新縣)으로 강등되었고. 충주와 청주를 중심으로 만든 도(道)명이었던 충청도는 청주와 홍주(홍성)을 중심으로 한 도명인 ‘청홍도’로 바뀔 정도였다.

처가는 완전히 몰락했다. 역모죄에 대한 처벌에 대해 조선시대 법전의 총결판인 <대전회통>에서는 ‘병력을 동원한 역적 수괴의 형제와 처첩은 모두 연좌에 의해 사형’되었고, 병력을 동원하지 않은 경우에는 <대명률직해>의 규정에 따라 ‘모반대역을 범한 사람의 할아버지·아버지·처·첩·형제자매·딸·손자·15세 이하의 아들·아들의 처와 첩은 노비’가 되어야 했다.

이지함의 장인과 처남은 사형당했고, 처가 식구들은 한순간에 노비로 전락했다. 이지함도 연좌제에 걸려 사실상 노비 신분이 되어, 과거시험은 꿈도 못 꿀 형편이 되었다. 20대에는 형 때문에 과거시험을 제대로 못 보았고, 간신히 과거시험을 보려고 할 때 쯤에는 친구가 사형당했고, 또 불과 1년도 채 되지 않아 처가가 반역자 집안으로 몰려 조선 사회의 지배층 사회와는 완전히 결별하게 됐다.

[조선 최초의 경제학자]

사실상 지울 수 없는 ‘주홍글씨’였다. 선택의 여지없이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야 했다. 이지함과 그의 처가에 새겨진 역적 집안이라는 낙인은 그 후 20년이 흐른 1570년, 그의 나이 54세에 이르러서야 선조의 특명으로 벗겨진다.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재앙, 자신이 잘못이 아닌 세상이 만든 잔인한 굴레에도 이지함은 한때 방황했을지언정 좌절하거나 자신이 가던 길을 멈추지 않았다.

살아생전 낙인을 지울 수 있을지조차 알 수 없고, 그 끝도 알 수 없는 고통의 시간을 극복하면서 마침내 조선 최초의 경제학자, 사회복지의 선구자로 거듭난 것이다.

전국 방방곡곡을 유랑하며 자신의 눈으로, 몸으로, 마음으로 백성들의 삶과 함께 했다. 육지 사람들은 감히 상상도 못하고, 가보려도 하지 않았던 저 머나먼 유배의 땅 제주도를 왕래하기도 했다. 양반과 선비라는 허장성세로 뒤덮인 옷을 훌훌 벗어 던지고, 그 시대에 가장 천한 업인 소금을 굽고, 물고기를 잡고, 섬에서 박을 키워 바가지를 만들어 팔기도 했다.

노동자와 장사꾼의 삶을 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당대의 석학이었던 율곡 이이, 남명 조식 등과 교류하면서 학문을 닦아 언젠가 다가올 경륜을 펼 시간을 준비해갔다. 모진 체험과 다양한 삶의 모습을 보았기에 훗날 그가 “서산과 태안의 염전을 잘 경영하면 능히 국가 재정 비용을 댈 수 있다”라며 재정 빈곤의 해법을 제시할 수 있었다. 또한 이지함 졸기의 기록처럼 자신은 가난한 백성을 부자로 만들고, 어지러운 정치를 다스릴 수 있다고 호언장담할 수 있었다.

54세 이지함. 온몸에 찍힌 낙인은 지워졌지만 다시 과거 공부를 해서 경륜을 펼치기에는 늦은 나이였다. 게다가 그가 추구한 삶이 과거 급제가 아니었기에 그는 다시 자신만의 길을 묵묵히 걸어갔다. 그런 그였기에 역사의 신은 그를 외면하지 않았다. 마침내 세상에 자신의 경륜을 펼칠 기회가 왔다.

선조 6년인 1573년 6월, 57세의 이지함은 조목(趙穆)·정인홍(鄭仁弘)·최영경(崔永慶)·김천일(金千鎰) 등과 함께 숨은 현자라는 ‘탁행지사(卓行之士·행실이 아주 뛰어난 선비)’로 천거돼 7월에는 포천 현감으로 부임했다. 자신의 평소 장담을 실천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그 결과는 조선 최초의 국부론이라고 할 수 있는 ‘포천에 부임했을 때 올린 상소(莅抱川時上疏)’에서 만날 수 있다. 그러나 혁신적인 건의가 완고한 유교 이념주의자들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듬해인 1574년 8월 사직했다.

62세인 1578년에 다시 천거되었다. 수령의 무능이 크게 문제가 되었던 아산 현감에 임명되었다. 부임 직후 곧바로 사회복지시설인 걸인청을 만들어 백성을 구휼했고, 현안이었던 군역 문제를 해결하는 제안을 했다.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도 전에 안타깝게도 이질에 걸려 세상을 등지면서 그는 전설이 되었다.

이지함의 삶을 보면, 정옥자 서울대 명예교수(전 국사편찬위원장)가 말하는 선비(士), “학문 즉, 문(文)·사(史)·철(哲)을 전공필수로 하여 이성 훈련을 체득하고, 예술 즉 시(詩)·서(書)·화(畵)를 교양필수로 해서 감성 훈련을 체질화한 자, 즉 이성과 감성이 균형 있게 잘 조화된 인격체”로 최고 통치자인 왕도 비켜갈 수 없었던 이상적 인간형인 선비와는 아주 다르다.

그는 선비의 조건인 양반 신분을 한때는 박탈당한 천민이었고, 훗날 다른 탁행지사와 함께 천거되었지만 그들과 달리 평생 문(文)·사(史)·철(哲)과 시(詩)·서(書)·화(畵)를 균형 있게 추구했던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탁상공론에 가까운 선비의 삶, 머리로만 지혜를 추구하는 선비의 삶 대신에 삶의 현장에서 끊임없이 고뇌하고,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위해, 또한 불쌍한 백성들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헌신한 비즈니스맨이다.

[나라의 3대 창고를 열어 백성을 살리자]

그의 경세사상은 포천 상소문에 가장 잘 드러난다. 당시 포천은 조선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으로 꼽혔다. 이지함이 “한마디로 어미를 잃은 외로운 거지 아이가 오장(五臟)에 병이 들어 온몸이 파리하게 여위고, 핏기와 기름기라곤 없이 말라빠진 살가죽만 남아서, 죽음이 하루를 못 기다릴 지경에 이른 것과 같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토록 가난한 포천을 구제하기 위해 이지함은 당시의 일반적인 빈곤 구제 방법인, 서울에 비축된 곡식을 빌려와 해결하는 방식을 단호히 거부했다.

그 대신에 이지함은 ‘자립’만이 해법이라며, 그 당시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혁신적인 방안을 제안했다. 3대 창고 개발론이다. 3대 창고의 첫째는 ‘도덕창고(道德之府庫)’, 둘째는 ‘인재창고(人材之府庫)’, 셋째는 재화의 창고를 말하는 ‘백용창고(百用之府庫)’다. 도덕창고론은 위로는 임금부터 아래로는 백성까지 모두가 사치와 사욕을 절제하고, 마음의 창고를 열어 아낌없이 나누자는 정신개혁론이다.

인재창고론은 인재를 발굴하고, 활용해 난국을 해결하는 인사(人事)가 만사(萬事)라는 주장이다. 그는 “나라가 서 있는 한 인재 또한 반드시 있게 마련”이라면서, <논어>에 나오는 “충성스럽고 신의가 있는 인물은 열 집이 사는 작은 동네에서 찾아도 찾지 못할 까닭이 없다”를 인용해 인재를 찾으려 하지 않기 때문에 인재가 없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매는 꿩을 잡을 때, 닭은 새벽을 알릴 때, 말은 수레를 끌 때, 고양이는 쥐를 잡을 때 쓰인다”면서 재능에 따른 인재 배치를 강조했다.

백용창고론은 육지와 바다의 다양한 자원을 아끼지 말고 적극적으로 개발하자는 주장이다. ‘3대 창고 개발론’은 이지함의 시대는 물론이고 오늘날, 또한 미래에도 어떤 나라나 어떤 리더에게도 유효하고 변하지 않을 민생구제를 위한 진리다. 그런데 상소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는 이상적이고 장시간을 요하는 도덕창고론과 인재창고론보다 백용창고론의 현실성과 즉시성을 더 주목했다. 역사에서 가정법은 의미가 없다지만, 만약 그의 ‘백용창고 개발론’이 구현되었다면, 아마도 조선은 영국보다 먼저 산업화와 근대화를 이룬 나라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 자원의 창고를 연다면 백성들에게 돌아가는 이익과 혜택은 한이 없을 것”이라는 백용창고 개발론은 이지함의 국부론의 핵심이며, 새로운 조선을 만들 수 있었을 가장 혁신적인 방안, 심지어 북학파보다 200년이나 앞선 선구적 주장이다.

포천 상소에서는 크게 광산 개발, 어업 및 염업 규제 해제로 나타난다. 광산 개발에 대해 “은(銀)을 주조할 수도 있고, 옥(玉)을 캘 수도 있습니다. 이런 산업은 모두 사리사욕을 꾀해 이익을 즐기고 재물을 탐하고 인색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그래서 비록 소인배들이나 좋아하는 것이고, 군자는 하찮게 여기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마땅히 취할 것은 취해 백성들의 목숨을 구제하는 일은 성인의 권도(權道)”라면서 당연히 해야 할 산업이라고 했다. 이 주장은 조선의 사상적 근본인 선비들의 정신중심주의,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는 농본주의와는 그 발상이 다른 혁신적 사고였다. 이지함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굶주리는 백성을 진실로 구하려 한다면 왕실의 창고에 있는 재물도 아끼지 말아야 하는데, 산과 들에 그대로 버려져 있는 은은 왜 채굴하지 못하게 합니까? 골짜기에 파묻혀 있는 옥은 왜 아껴 캐내지 못하게 합니까? 바다에 무궁무진한 고기는 왜 아끼며 잡지 못하게 합니까?

갯벌에 무진장한 갯물은 왜 아껴 소금도 굽지 못하게 합니까? 사익을 추구하는 개인의 행위를 금지하는 것도 옳지 않은데, 관청에서 만민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이런 사업을 시행하는 것을 진실로 금지해서는 안됩니다. 포천은 바다가 없어 해산물을 다른 고을에서 가져올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또 왜 안 됩니까?”

그는 백성을 위해 조정에서 금지한 광업과 어업, 염업의 허용을 주장했다. 그런데 이지함이 단순히 원론적 의미의 광산개발만 건의했다면, 그의 주장도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지함은 탁상공론이 아니라 구체적 실천방법까지 제시했다. “이러한 광물이 나는 곳을 수소문해 은광이 있으면 은을 채굴하게 하고, 옥광이 있으면 옥을 캐어서 쓸 수 있도록” 해달라며 기존의 광산을 활용하는 현실적 접근을 꾀했다.

게다가 “만약 공력에 비해 소득이 적다면 버려두고 하지 않을 것”이라며 사업성을 바탕으로 시작하자고 했다. 그의 식견은 더 나아가 투입 대비 효과가 큰 경우에는 “그 사업의 전말을 낱낱이 적어 위에 아뢸 것”이라며 투명성까지 전제하고 있다. 그의 광산개발론은 비즈니스적 관점은 물론 현대적의 의미에서의 투명경영론까지도 엿보인다.

[이익을 말하지 않는 ‘참으로 잔인한’ 군자들]

바다가 없는 포천에 바다를 만들어주는 발상인 어업과 염업 활용 방법도 아주 구체적이다. 어업을 위해서 전라도 만경현 양초도(洋草島)를, 염업을 위해 염전이 있는 황해도 풍천부 초도(椒島)를 포천에 귀속시켜달라고 했다. 서울의 고관들은 듣지도 못했을 특정 섬의 명칭을 거론한 것이다. 어업과 염업으로 고기를 잡고 소금을 구워 판다면 2~3년 내에 수천 석의 곡식을 확보하고, 가난 구제는 물론 포천이 부유하게 될 수 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이지함의 규제 개혁을 통한 광업과 어업, 염업 허용은 부의 축적을 통한 민생 개선이며, 국부의 총량을 증진시키는 방법이었다. 그러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포천이 일단 살아나고 나면 양초도의 어업권과 초도의 염업권을 다른 가난한 고을에 주어 그 고을 역시 포천현에서 했던 것처럼 운영하게 하면, 은혜를 널리 베풀어 생명을 구제하는 데 한몫을 하게 되지 않겠습니까”라며 부의 확산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지함의 재화창고 개발론을 현대적으로 다시 해석해보면, 공업과 상업의 자유화, 규제개혁을 통한 지역경제 활성화, 생산적 복지론과도 같다. 다른 한편으로는 1980년대 중국 등소평이 국가 발전의 방법으로 제기했던 선부론(先富論), 즉 특정지역을 먼저 발전시키면, 그 영향으로 다른 지역도 함께 발전하게 된다는 논리와 똑같다.

이지함의 백용창고론에서 나타난 어업·염업·섬에 관한 주장은 그가 반역의 집안 출신이라는 낙인 때문에 겪었던 20년의 시련기를 어떻게 활용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는 조선사회의 밑바닥에 있었지만, 지식인이자 사회의 리더라는 자부심으로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해 살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조선은 철저한 유교 중심의 신분사회였고, 공업과 상업은 천시했다. 선비들의 불문율은 “군자는 의리만 말하고, 이익은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지함은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에 대해 “참으로 잔인한 사람”이라고 비판했고, 심지어 이지함은 자신의 제안을 저지하는 사람에 대해서 “반드시 하늘로부터 미움을 받을 것”이라고까지 단호하게 주장했다.

이지함의 경세론은 지금도 유효하다. 발상을 바꾸는 것, 자신만의 밥그릇을 기준으로 사회의 규칙을 정하는 것은 공동체를 피폐하게 하고 불행하게 만든다. 이제는 이지함이 실제로 지었는지도 불확실한 <토정비결>의 저자 이지함을 과감히 잊고, 시련 속에서 세상 사람들과 함께 같은 꿈을 꾸며 자신을 갈고 닦아 풍요로운 나라를 만들고자 했던 경세가 이지함을 만나야 할 때다.

갑진년, 금년에도 어김없이 보령문화재지킴이봉사단(단장 임인식) 에서는 토정 이지함 선생의 애민사상과 보령의 철학을 계승하기 위하여 토정마루 이행수 대표와 단원들이 의기투합을 하여 4년째 원본토정비결(原本土亭秘訣) 책자를 무료로 보급하고 있어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다.

우리 국민들에게 토정비결을 가장 먼저 올바로 알리기 위해 네번째 사업을 로 시작 했으며 토정비결은 좋은 말들이 많이 있다. 약 70%정도는 좋은 운수가 적혀있다. 그러나 30%확률로 경계해야 할 운수들이 적혀 있다. 즉 “희망을 가지고 살다보면 좋은 일들이 있을 것이라는 삶을 제시를 하면서도, 운에 의지하지 말고 노력해야 한다는 토정의 경고이자 비법인 것이며, 시대가 변했어도 인간 중심의 세상, 바로 이토정이 꿈꾸어 왔던 세상 일 것” 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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