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 개평한옥마을에는 전통한옥이 잘보존되어 있는데 일두 정여창고택은 주차장에서 마을내 고샅(마을 큰길에서 집으로 들어가는 골목길)부터가 색다른 모습이다. 서울의 궁궐 정전앞에 있는 큰 널찍한 돌은 아니지만 박석(博石)이 깔려 있는데 이는 주인이 말을 타고 들어올 경우 말굽소리가 크게 들리는 효과가 있다고 하여 주인이 도착하는 신호로여겼다고 한다.
대문입구에 하마석(下馬石; 노둣돌)이 있어서 예사롭지 않은 고택(古宅)의 모습이 반긴다.
일두고택 행랑채의 정문대문에는 5개의 충효 정려패가 있다. 맨위만 일두 할아버지의 것이고, 나머지는 후손들이 받은것이라 한다.
이 솟을대문은 권위의 상징으로 조선시대 종이품 이상 벼슬아치들이 타던 수레가 탄채로 들어갈수 있도록 문을 높게 만든 것이다.
동방 5현에는 1.일두 정여창, 2.한훤당 김굉필, 3.정암 조광조, 4. 회재 이언적, 5.퇴계 이황이 조선시대 성리학자로 추앙받고 있다.
<좌 안동, 우 함양>은 낙동강을 기준으로 동쪽 안동(安東)과 서쪽 함양(咸陽)에서 훌륭한 인재가 많이 배출되었다는 뜻이다. 일두 정여창은 일두(一蠹)'는 '한마리 좀벌레'란 뜻이며 호의 뜻처럼 평생 자신을 낮추고 겸손한 삶을 살았다.
정여창의 본관은 경남 하동인데 증조부인 정지때부터 처가가 있는 함양에서 살기 시작했다. 일두는 아버지 정육을, 어머니 경주 최씨 사이에서.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에서 1450년 태어났다. 18세때 아버지 정육을이 이시애의 난(1467년; 세조13년에 함경도 호족 이시애가 일으킨 반란)에 출전했다 전사하자 한달간 전쟁터를 돌며 아버지 시신을 찿아 수습했다.
이후 일두는 함양군수 김종직(金宗直, 1431년~1492년) 문하에 들어가 김굉필. 송석충, 정광필, 김일손 등과 교유하게 된다. 1490년(성종 21년) 과거에 급제한 정여창은 세자였던 연산군의 스승이 되었으나 성격이 맞지 않아 관계가 좋지 않았다. 1498년 친구인 김일손의 사초로 시작된 무오사화(1498년, 연산군 4년, #조의제문)때 함경도 종성 유배지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당시 54세였다. 유배지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지역의 유지들을 만나 시국담론등 시문을 주고받아 변방에서 학문과 문물을 전파하였다.
귀향지인 함경도 종서에서 병사한 정여창의 시신은 친구와 제자들에 의해 두달만에 수습되어 함양 남계서원 뒤 승안산 기숡에 안치되었다. 이후 고려의 백이정- 안향-이제현-이색-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정여창으로 이어지는 유학의 적통으로 숭상받게 된다. 일두 정여창은 성균관을 비롯하여 전국 234향교와 9개의 서원에서 받들어 모시고 있다.
# 조의제문(弔意帝文): 초한의 패왕 항우가 희왕(羲王)을 살해해 물에 던진 사건을 김종직이.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고. 단종을 살해한 사건에 빗대며 희왕(羲王) 을 조문한 내용
일두는 어릴따 이름이 백욱이었는데. 중국 사신이 어린 그를보고 아버지에게 이른기를 《아이가 커면 집을 번참하게 할것이니 이름을 여창(汝昌)이라 지어라》라고 했다고 한다.
1987년 KBS 인기 대하드라마 <토지>의 최참판댁의 촬영무대였고, 2017년.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여주인공 <고애신>의 집으로 나온 그곳이 촬영지로 알려지면서 매년찾는 사람들이 많다.
지금으로부터. 약 20여년전에 위 별당채가 화재로 소실 위기가 있었다, 2003년 2월 25일 원인을 알수 없는 화재가 발생하였으나. 다행히 기둥등 목재표면만 탄화되는 피해를 입은 적이. 있었는데 10여년전에 보수를 하였다.
개평(介坪)마을은 댓잎 네개가 붙어 있는 개(介)자 모양에서 생긴 이름으로 고택과. 언덕 사이가 개천이 마을을 휘감아 흐르고 개평 마을의 진산(鎭山)은 거문토성(巨門土城)으로 일자형(一字形)이거나 부촌(富村)의 자격은 갖춘 곳으로 볼 수 있다.
사랑채에는 전면 벽면에 쓴 충효절의, 백세청풍등 글씨가 눈에 뛴다. 사랑채 누하의 기둥사이를 판벽을 막아 수장의 공간으로 사용한 점, 일각문 사이의 사랑채 대청마루에는 나무판벽으로 차면이된 곳에나무 구유통에 소변을 보는것이 있다.
이 반촌 한옥의 특징으로 측간(화장실)이 건물밖 마당에 별도의. 독립공간으로 구성을 해둔 것이다. 즉. 행랑채 좌측에 사랑채 화장실이 있고, 안채구역에 별당(아래채) 좌측에 여자 화장실이 독립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중문을 지나 정면에 보이는 건물이 안채이다. 안채는 일두가 서거후 약 100년이 지난후 후손들이 지은 건물로 350년이 넘은 17세기 초 건물이다.
이 안채의 대청은 문중의 대소가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일을 하기도 하고. 잔치도 열고하는 넓게 만든 공간으로 기둥도 낮게 건축하여 친근감을 주는 공간이다. 안채의 오른쪽 공간은 별당이라고도하는 아래채의 여자전용 공간이다.
안채 뒤에는 장독대 공간이 사당담장과 마주보고 있다. 안채뒷편에도 마루 공간을 두어 편의성을 고려한 건물이다.
함양 일두 고택을 보면서 안동지방의 전통한옥에서 보는 꽉짜여진 모습보다. 다소 함양 일두 고택에서는 다소 건물과 건물사이 틈이 있어 개방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일두 고택에는 곡간(穀間; 곡식을 보관하는 창고)과 곳간(庫間: 일반적인 창고)이 있다. 개념적으로 곳간이 넓은 의미로 쓰인다.
일두 고택은 한마리 좀벌레처럼 평소 겸손한 삶을 살다갔다. 고너즉한 한옥의 여유로우을 느낄수 있는 함양 개평마을 일두고택을 방문하면 얻을수 있는 즐거움이라 하겠다. 2024. 6.16(일)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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