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강제 병합을 극복하고 선조들의 절의와 애국정신을 이어받기 위해 지은 병천사(秉天祠)를 찾아서

지응현(池應鉉)과 '새우젓 장수' 와의 애듯한 이야기
지응현의 부인은 6·25전쟁때 불타버린 원효사를 중건했다

김오현 선임기자 승인 2024.02.06 22:12 | 최종 수정 2024.02.07 08:46 의견 0

병천사(秉天祠) 전경과 기아문화재지킴이 단체사진(사진제공 문화재청 모바일자료, 박정세 촬영)

▶ 병천사 존심당(秉天祠 存心堂)

종 목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명 칭 병 천 사
지정일 1979.08.03
소재지 광주광역시 서구 금호운천길 31(금호동)

병천사는 ‘천리(天理)를 병집(秉執)한다’는 뜻에서 ‘병천사(秉天祠)’라 하며 고려말의 충신인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1337~1392)를 비롯한 전라도 도원수를 지냈던 의제 지용기(毅齋 池湧奇, 1330~1392), 조선 인조때의 공신 금남군 정충신(錦南君 鄭忠信, 1576~1636), 지용기의 8대손인 송시열의 외조부 철산 지여해(鐵山 池汝海, 1591~1636), 병자호란때 활약한 표곡 지계최(豹谷 池繼漼, 1593~1637)등 5명을 모시는 배향한 사우이다. 충주지씨 성을 가진 인물들이 배향되는 것은 병천사가 기본적으로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는 치욕을 당한 뒤 선현들의 절의와 국난극복의 정신을 이어받기 위해 이 지방의 대부호였던 붕남 지응현(鵬南 池應鉉, 1868~1957)이 1924년에 건립하였다. 사당을 비롯하여 내ㆍ외삼문, 동재인 숭인재(崇仁齋)와 서재인 집의재(集義齋)가 좌우에 자리잡고 있고, 존심당(存心堂), 영당(影堂), 원직사 등 10여동의 건물로 구성된 서원급에 가까운 규모가 큰 사우이다. 건물 규모가 가장 큰 강당인 존심당(存心堂) 1동만이 문화재로 지정돼 관리되고 있다. 존심당은 정면5칸, 측면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중앙 3칸을 대청마루를 두었고, 양쪽에는 방을 만든 것이 특징이다.

병천사 앞뜰에 있는 지응현의 선덕비와 유형문화재인 존심당의 모습(사진촬영 이병봉)

▶ 붕남 지응현(鵬南 池應鉉, 1868~1957)
지응현의 가계는 본디 장흥에서 살다가 지응현의 7대조 명윤(命潤)이 광주에 정착했다. 지응현은 1914년까지 광주에 속했던 담양군 대치면 중옥리(당시에는 광주에 속했으나 1914년 이후 담양군 소속)에서 영규(永奎 , 1815~1917)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다른 근대 자산가들과 달리 물려받은 유산없이 일찍 부모를 잃은 그는 16살부터 포목상, 미곡상, 짚신 등을 팔아 모은 재산을 몽땅 땅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지금의 대인동 대성약국 일대, 서구 상무지구와 지원동 일대가 전부 그의 땅으로 외지인들이 광주로 들어 오려면 그의 땅을 밝지 않으면 안 될 정도란 말이 나올 정도였다고 한다.
지응현과 '새우젓 장수' 와의 애듯한 이야기가 전해 진다. 병천사 앞뜰 남쪽 맨 끝에 서 있는 '제하상모자비'(祭鰕商母子碑)와 지응현의 선덕비 17기 중 11기가 옮겨져 있다. 이 비는 지 씨가 짚신 장사를 하며 어렵게 돈을 모으던 시절, 집에 찾아왔던 새우젓 장수의 짐이 부의 원천이 되어 이를 잊지 않기 위해 세웠다고 후손들은 전한다. 이러한 애틋한 사연이 언론에도 알려져 1918년 6월 26일자 매일신보(每日申報)에 보도되었다. 그 내용을 알기 쉽게 풀어 옮기면 다음과 같다.
"전남 광주군 광주면 수기옥정에 사는 지응현(당 50세)씨는 19년 전인 1900년 10월 말에 새우젓 장사 모자가 그의 집(당시 대전면 중옥리)에 와서 며칠 동안 머물다가 쌀을 빌리러 나간다고 말하고 가져온 짐을 맡겨 놓고 나간 뒤 십여 일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지씨 집에서는 모자가 맡겨둔 짐에서 썩는 냄새가 나서 열어 보았더니 새우젓 8말, 백미 5되, 목화 5근이 있어서 이것을 잘 말려두었으나 한 달이 지나도 소식이 없어 이를 팔았더니 2원5전이었다. 몇 달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자 지씨는 이 돈을 한 달에 서푼 이자를 놓아 6년 동안 길렀더니 본전과 이자를 합해 10원97전6리가 되었다. 이 돈으로 대치면 중옥산리 앞뜰 논 1말 5되직이를 사서 동리에 맡기고 풍흉에 관계없이 소작료로 한 섬씩을 내놓도록 했다. 그 수곡으로 이 모자가 돌아오지 않은 것은 필시 죽었기 때문일 것이므로 이 모자가 지씨 집에서 출타 한 10월 15일에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그러나 18년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자 동네 앞에 이 사실을 기록한 비를 세우고 먼 뒷날까지도 이를 잊지 않을 증표로 삼기로 했다고 한다."

병천사 앞뜰 남쪽 맨 끝에 서 있는 새우젓 장사 모자의 '제하상모자비(祭鰕商母子碑)' 비석(사진촬영 이병봉)

이 비는 지응현 씨가 광주 수기동으로 이사와 살면서 1924년 금호동에 병천사를 세운 뒤 이 비도 옮겨다 세웠다고 전해온다. 그는 집에 찾아왔던 새우젓 장사가 돈은 땅에 묻으라고 돈이 생길 때마다 땅을 사 모은 것이 부자의 원천이 되었고 ‘부지런은 복의 근원이고 복은 아껴야 온다’는 신념으로 돈을 모으는데 전력투구해 초창기에는 구두쇠로 알려졌다. 50대에 접어들면서 소작료를 감해주는 등 선행을 시작해 1918년을 전후해 광주지역에 세워진 시해불망비만도 10기에 달하고 보성, 곡성 등지의 비까지 합하면 17기가 현존해 있다.

오지호 선생이 1954년에 그린 ‘아미타회상도’ 는 전통 불화기법이 아닌 일반 유화물감을 사용한 일반적인 불화와는 다른 이색적인 탱화다(사진제공 원효사, 현재 송광사 성보박물관 보관 중)

지응현의 부인은 광산김씨 김남수의 딸 김계(金桂, 1868∼1964)로 새우젓장수는 필경 문수보살의 화신이라는 믿음으로 독실한 불교신자가 되어 법명을 정명월(淨明月)이라 했다. 6·25전쟁때 불타버린 원효사를 중건해 1960년 그 실적을 새긴 공덕비가 원효사 경내에 세워졌다. 이때 사위인 오지호 화백을 불러 불화를 그리도록 권유해 서양화가인 오지호 화백의 불화가 원효사에 걸리게 되었다.

기아문화재지킴이 모니터링 및 지킴이 정화활동 사진(사진촬영 박정세)

이 집안은 지주이면서도 일제 식민지 시절 적극적인 사회참여를 자제하면서 농업과 축산진흥을 위한 교육사업과 인재양성에 주력했다. 뿐만 아니라 이름도 모르는 모자의 공을 기리기 위해 제답(祭畓, 수확물을 조상의 제사에 쓰려고 마련한 논)을 마련하고 그 비를 세운 행적이 유별나다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행적들은 오늘날 우리에게 귀감이 되고 큰 감동의 여운을 남긴다.

🔳 참고문현
1. 김영헌, [광주의 산], 도서출판 심미안, 2017.
2. 이효남, [문화재 지킴이 활동가 양성과정- 병천사], (사)교육문화네트워크 동행, 2018.
3. 김용철, [병천사-디지털광주문화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2.
4. 최응천, [나만의 문화유산 해설사 자료], 문화재청,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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