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우식 칼럼] 대동여지도 목판 발견의 교훈

상식이라는 이름의 색안경과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 논쟁

편집국 승인 2023.10.31 12:10 | 최종 수정 2023.10.31 16:17 의견 0

상식이라는 이름의 색안경

필자는 1960년대 말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에서 대동여지도를 제작한 김정호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배웠다.

“김정호는 세 차례나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고 백두산을 여덟 차례 오르고 대동여지도를 완성했다. 완성된 대동여지도를 나라에 바쳤으나 당시 조선을 다스리던 완고한 사람들이 국가기밀을 누설하여 외적을 이롭게 했다는 이유로 김정호 부녀를 옥에 가두어 죽이고 지도를 제작한 판목도 모두 불태워 버렸다.”

이러한 내용은 1993년 초등학교 5학년 2학기 국어 읽기 교과서까지 소개되었다. 이런 내용은 우리나라에서는 초등학교만 나와도 아는 상식 중의 상식이었다. 학교에서 시험문제로도 자주 출제되어 상식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도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1995년에 상식적이던 온 국민을 몰상식하게 만든 사건이 발생했다. 전국의 고지도 목록을 작성 중이던 한국역사문화지리학회 회원들이 국립중앙박물관을 찾았을 때 유물 관리 학예사가 중앙박물관이 소장 중인 목판 11장을 보여주고 조사를 의뢰한 것이다. 모두 불태워져 없을 것 같았던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목판이 남아있던 것이 처음으로 확인된 것이다. 매우 평범하고 상식적인 온 국민을 몰상식한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 사건이다. 매우 오랫동안 교과서에까지 실려 강요된 편견을 요구해왔던 가짜 뉴스였던 셈이다.

경향신문의 이기환기자에 따르면 이러한 가짜 뉴스는 일제 강점기인 1925년 10월 8~9일 동아일보 1면에 실린 육당 최남선(1890~1957)의 글로 짐작되는 논설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김정호 선생은 팔도강산을 샅샅이 답사했고, 이를 위해 백두산만 7번이나 올라갔다”면서 ‘무지몽매한 조선의 상황’을 개탄하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대동여지도를 위해 십수 년 동안 과객 노릇을 하여… 가장 정명(精明)하고 적확한 지도를 만든 이지만… 이런 국보적인 인물이… 화액(禍厄)을 당했다… 김정호 선생의 공적이 충일했건만 임자인 조선과 조선인은 몰라주고 깨닫지 못했다.”

일제 강점기에 조선총독부가 1934년 펴낸 <조선어독본> 제5권 제4과에서는 김정호를 소개하면서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김정호가 백두산을 여덟 번이나 오르내렸고, 전국 방방곡곡을 세 차례나 돌며 대동여지도를 완성했으나 흥선대원군이 국가기밀누설죄로 김정호와 그 딸을 옥에 가두었고, 부녀는 옥중의 고생을 이기지 못한 채 죽고 말았다. 그런데 메이지 37~38년(1904~1905년)에 러일전쟁이 시작되자 우리 군(일본군)에게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되었으며 그 후에 총독부에서 토지조사사업에 착수할 때도 큰 도움이 되었다고 적고 있다. 지도의 자세함과 정확함은 보는 사람들을 감탄하게 하였으며 비로소 김정호의 고생이 빛을 발하게 되었다고 마무리하고 있다. 조선인은 김정호의 작업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지만, 일본은 그 가치를 알아보고 높이 평가했다는 내용으로 소개했다.

이러한 가짜 뉴스가 1945년 광복 이후 1993년까지 48년간 지속되었다. 이것이 가짜 뉴스로 판명이 난 것은 1995년이므로 1925년의 동아일보 논설로부터 70년간 지속된 셈이다. 1925년 10월 1일 자 동아일보 기사는 1925년 10월에 열린 고지도전람회에 대동여지도와 대동여지도 판목이 출품됐다고 보도했고, 1939년 10월 13일 자 동아일보는 ‘이왕 전하 부처’가 친견한 규장각 소장본 중에 ‘대동여지도 22첩-김정호 목판본(1861년)’이 있다고 소개되었음에도 확인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가짜 뉴스는 70년간 고쳐지지 않았다. 가짜 뉴스도 한번 움직이기 시작하면 먼추기 힘든 물리학에서 말하는 관성의 법칙이 적용되는 듯하다.

상식은 주어진 사회와 시대에 보편적으로 강요된 편견에 지나지 않으며 결코 사실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언제든 새로운 증거 앞에서 이제까지의 상식이 깨어지고 새로운 상식을 요구받게 될 소지가 있다.

병풍처럼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는 대동여지도 (국립중앙박물관)

대동여지도와 목판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2권의 지도를 모두 펼쳐 연결한 세로 약 6.7m, 가로 약 3.8m 크기의 대동여지도 (국립중앙박물관)

1934년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보통학교 조선어독본 권5 제 4과 김정호 (분홍색 배경으로 하이라이트한 부분이 대원군이 격노했으며 김정호 부녀가 옥사했다는 내용과 일본은 김정호의 업적을 높이 평가했다는 내용)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 논쟁

1377년에 청주 흥덕사에서 인쇄된 직지와 1455년경에 독일에서 요하네스 구텐베르그가 인쇄한 것으로 알려진 42행 성서가 2001년에 나란히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동서양을 대표하는 금속활자인쇄 기술을 이용한 인쇄물이라는 상징성이 있다.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 인쇄물이라면 구텐베르그의 성서보다 76년 먼저 인쇄된 직지가 당연히 그 영광을 누려야 하겠지만 백인 및 유럽중심주의와 그동안의 교육 영향으로 전 세계적으로 보면 직지를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우리의 상식과 세계인의 상식 간의 괴리가 있는 셈이다. 이것은 의미가 불분명하고 듣기에도 생소한 수많은 불교 서적 가운데 하나인 직지라는 이름보다는 성서라는 보편적이면서도 누구에게나 그 내용을 알기 쉬운 이름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직지는 1880년대와 1890년대에 조선에서 활동했던 빅토르 콜랭 드 플랑시(Victor Collin de Plancy)에 의해서 발굴되어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으로 서양에 소개되었다. 지금으로부터 120년 이전의 일이다. 우리는 그런 책이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으며 세계인의 관심도 끌지 못했다. 1972년이 되어서야 프랑스에서 활동하시던 박병선 박사에 의해서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세계 도서의 해를 기념한 책 전시회에 직지가 전시되면서 한국에서 만든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프랑스 외교관이 직지의 가치를 알아보고 수집해 간지 약 75년의 세월이 지난 후의 일이다. 박병선 박사의 직지의 재발견으로부터 벌써 50년의 세월이 지났다. 그러나 아직도 직지는 세계 최고 금속활자본의 명예를 위해서 분투하고 있다. 직지는 1377년에 청주 흥덕사에서 인쇄된 이래 19세기 말에 프랑스로 반출될 때까지 계속 우리 곁에 있었으며 한 번도 금속활자본이 아니었던 적은 없다. 다만 우리는 책의 내용에 관심이 있었을 뿐 서양인들만큼 인쇄기 술이나 방법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을 뿐이다.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 서양인의 손에 의해서 수집되고 해외의 한국역사학자에 의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직지가 국내에 머무르고 있었다면 그 가치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세계적인 인지도도 얻지 못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모든 상식은 몰상식으로부터 출발한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국내에서도 50년 이상 이어지고 있는 세계 최고 금속활자본에 관한 논쟁이 있다. 직지보다 138년 앞선 1239년에 금속활자로 인쇄되었다는 남명천화상송증도가(南明泉和尙頌證道歌)를 둘러싼 논쟁이다. 또 하나의 상식과 몰상식의 대결이다.

남명천화상송증도가의 판본은 여섯 종류가 확인되었다. 그중에서도 네 가지 판본은 매우 유사해서 서지학자들조차 동일한 목판으로 인쇄한 것으로 인쇄 시기만 다르다고 주장할 정도이다. 두 가지 판본인 삼성본과 공인본(구 안동본)은 고려시대에 인쇄된 목판본으로 판정되어 1984년과 2012년에 각각 보물로 지정되었다. 삼성본은 삼성출판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판본으로 목판인쇄된 것이 명확하다. 다만 인쇄 시기가 고려말로 판정된 것은 사실과 달라 조선 초기인 15세기에 인쇄된 것으로 보인다. 공인본(구 안동본)은 1970년대에 안동에서 초등학교 교감 선생님으로 재직하시면서 고서를 수집하시던 박동섭 선생이 소장하던 것으로 현재는 경남 양산의 대성암이라는 사찰의 원진 스님이 소장하고 있다. 전소장자인 박동섭 선생은 소장품이 금속활자본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초대 금속활자장이셨던 오국진 선생과 금속활자주조 및 조판 실험을 거치면서 금속활자본의 특징을 찾으려고 노력하셨고 1988년에는 향토안동이라는 지방 향토지에 특별기고의 형식으로 삼성본과 안동본(현 공인본)의 영인본까지 실어 가며 <고려주자본 '남명천화상송증도가'>라는 178쪽에 달하는 논문을 실었다. 같은 해에는 오국진 선생이 삼성본과 안동본의 영인본과 함께 <강화판 「남명천화상송증도가⌟ 구명 (江華板「南明泉和尙頌證道歌⌟究明)> 이라는 책자를 발간하였다. 안동본에 적혀 있는 구결은 서을대학교와 단국대학교에서 국문학 연구자들이 연구를 진행하여 고려시대의 구결임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국내에서는 금속활자 인쇄본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정설로 되어 있다.

필자는 우연한 기회에 이러한 문제를 접하게 되었고 2016년부터 연구를 지속해 왔다. 이러한 논쟁을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보다 객관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비교 분석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고 있다. 기존에 여러 가지 주장을 해 왔던 분들에게는 매우 불편한 진실이 될 수 있겠지만 기존의 상식과의 대결로만 볼 것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의 규명이라는 관점에서 기존의 학설과 주장을 잠시 내려놓고 이제까지 확인된 객관적인 사실들을 바탕으로 합리적인 결론을 도출해 갔으면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지금까지 국내의 각종 학술지에 논문을 20회 투고하여 5편의 논문이 출판되었다. 해외의 학술지에는 4편의 논문이 실렸다. 현재의 몰상식이 미래의 상식이 되는 날이 오길 기대하며 지속적인 노력을 해 나갈 계획이다. 오는 11월 10일과 11일에 공주대학교에서 개최되는 한국문화재보존과학회 추계학술대회에서도 연구 내용을 구두발표할 예정이다. 현재, 일본어, 영문 및 국문 논문 다섯 편이 심사 중이며 올해 안에 여러 편의 논문이 선보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금속활자본을 모본으로 목판에 번각해서 인쇄하게 되면 목판의 건조로 인한 수축으로 높이 방향으로만 약간 줄어드는 현상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삼성본의 높이 방향의 폭이 공인본에 비해서 약간 줄어든 것만 보아도 공인본이 모본임을 알 수 있다. 먹색이 옅고 인쇄된 글자에 반점 모양의 패턴이 확인되는 것도 공인본이 금속활자본임을 말해주고 있다. 골인본이 금속활자본이라면 책의 마지막 부분에 적혀있는 고려 무신정권의 실력자였던 최이가 적은 1239년 9월 상순에 금속활자를 주조하여 인쇄했다는 문장이 인쇄연대를 증명해 주는 셈이다.

대동여지도 목판 발견의 교훈을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진실은 불변하지만 상식은 시대에 따라서 바뀔 수 있는 것이다. 새로운 상식이 만들어지기를 기대하면서 글을 맺는다.

직지보다 138년 빠른 1239년 9월 상순에 인쇄된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 인쇄본 남명천화상송증도가(南明泉和尙頌證道歌) 공인본과 15세기에 번각 목판으로 인쇄된 삼성본 (공인본과 삼성본 모두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목판본은 금속활자본에 비하여 먹색이 짙고 판각 후 목판의 건조로 인하여 높이 방향으로 3~8% 정도 수축한다.

미국 웨이퍼마스터스사 유우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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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대학교 전자공학과, 일본 교토대학 대학원과 미국 브라운대학교를 거쳐 미국 내 대수의 반도체 재료 및 생산설비 분야의 기업에서 반도체를 포함한 전자재료, 공정, 물성, 소재 분석, 이미지 해석 및 프로그램 개발과 관련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으며 다양한 분야에서 다수의 학술논문을 발표하고 있다.

일본 오사카대학 대학원 공학연구과 공동연구원, 경북대학교 인문학술원 객원연구원, 국민대학교 산림과학연구원 상임연구위원, 문화유산 회복재단 학술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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