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사화로 부친이 유배당하자 무안으로 낙남한 조위, 조위세 형제의 ‘람덕정’

- 을사사화때 아버지 유배로 정치적 혼란을 피해 낙남을 택할 수 밖에 없었던 조위 형제
- 조위의 뛰어난 학문과 그의 학덕을 흠모해 일대 수 많은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김오현 선임기자 승인 2024.04.07 18:59 | 최종 수정 2024.04.08 12:42 의견 2

한양조씨 제각인 죽전 마을의 람덕정 전경(사진촬영 김오현)

조선 중종과 명종 시대, 격동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 단암 조위(丹菴 趙位)는 한양에 살다가 아버지 조근선(趙近善)이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 중종 14년) 때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의 구명에 참여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고, 1545년 을사사화(己卯士禍, 명종 1년 )로 유배당하자 벼슬을 등지고 동생 조위세(趙位世)와 함께 전라남도 무안군 몽탄면 달산리 죽전마을로 낙남(落南)하여 은둔하게 된 내용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봉황의 모습을 보며 덕을 쌓는다는 의미의 람덕정의 단아 하면서도 품위 있는 특이한 문양으로 조각되었던 문짝(2005년 24개 중 23개가 도난)


▶ 한양조씨(漢陽趙氏) - 조위(趙位)의 람덕정(覽德亭)

단암 조위(丹菴 趙位, 1505~1594)와 단곡 조위세(丹谷 趙位世, 1508~1569)는 한양에 살다가 아버지 조근선(趙近善)이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 중종 14년) 때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의 구명에 참여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고, 1545년 을사사화(己卯士禍, 명종 1년 )로 유배당하자 벼슬을 등지고 조위(趙位)형제 분이 천리길을 내려와 전라남도 무안군 박곡(몽탄), 지금의 달산리 죽전(달산1리)마을에 도착하여 정착하게 되었다.

이 마을의 입향조(入鄕祖)로 학문에 뛰어나 그의 학덕을 흠모해 일대 수 많은 제자들이 모여들었으며 봉정산 마루에 단을 만들어 북향을 향해 배례를 행하였다고 한다. 단암 조위(丹菴 趙位)는 밀양박씨(密陽朴氏) 딸을 맞았으며, 동생 단곡 조위세(丹谷 趙位世)는 문화유씨(文化柳氏) 딸을 맞아 살면서 마을을 이루어 일대에는 그들의 후손들이 많이 살고 있다. 마을의 당산나무인 팽나무, 느티나무는 그때 심은 것으로 전해오고 있다.

봉정산 기슭에 살면서 '<烱烱抱此志(경경포차지)/ 千秋覽德輝(천추남덕휘) 명백하게 이 뜻을 품는다면 오랜 세월 덕이 빛날 것이네>'라는 의미로 봉정산 아래 ‘남덕정(覽德亭, 조상의 '덕스러움을 살펴보다'는 뜻)’ 이란 정자를 세우고 주경야독 하면서 현재까지 자손들이 번성한 마을로 이어져 오고 있다. 람덕(覽德)은 한(漢)나라 가의(賈誼, 중국 전한 문제 때의 학자)의 <조굴원부(弔屈原賦)>에 "봉황이 천 길의 하늘을 날다가, 성군의 덕이 빛남을 보고 내려오도다. <鳳凰翔于千仍兮(봉황상우천인혜), 覽德輝而下之(남덕휘이하지)>했듯이 '봉(鳳)을 보면서 덕(德)'을 생각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1500년 중반에 지어 사라지고 이후 몇차례 중건했다. 현재의 건물은 일제강점기인 1935년에 초가였던 것을 단층 팔작지붕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양조씨(漢陽趙氏) 선인들을 모시는 추원단(追遠壇)의 모습

람덕정(覽德亭) 뒤에는 1958년에 건립한 한양조씨(漢陽趙氏) 선인들을 모시는 추원단(追遠壇)이 있어 람덕정(覽德亭)도 재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곳 죽전마을은 마을뒷산이 봉이 날았다고 하여 봉정산이라 불렀다. '봉(鳳)'은 오동나무 열매나 대나무 열매만을 먹기 때문에 대나무가 많이 심어졌고 이로 인하여 대나무가 많은 마을이라 하여 "죽전(竹田)"이라 불러 지금에 이르고 있다.
람덕정(覽德亭) 입구에는 솟을 삼문인 추원문이 있는데 이문은 정자 뒤에 있는 추원단(追遠壇)을 의식해 세운 문으로 보인다. 1935년에 중건한 람덕정(覽德亭)은 조형적 가치가 뛰어난 건물이었다. 그중에서도 문은 단아 하면서도 품위 있는 특이한 문양으로 조각했는데 관리 소홀로 2005년 8월 문짝을 도둑맞은 일이 있었다. 그때 정자 안의 접이식 문짝 24개 중23개가 뜬겨져 나갔는데 끝내 찾지 못하고 현재는 예전과 비숫한 문양의 새로운 문을 달았다고 한다.

람덕정(覽德亭) 입구 솟을 삼문인 추원문 모습

1635년 집의(執義), 문천군수, 군기시정을 거쳐 호남지방의 암행어사. 1643년 통신부사(通信副使) 임명으로 일본에 다녀온 외교관이며 뒤 형조참의 · 전주부윤 1645년에 이조참의가 되고, 대제학 ·형조판서·예조판서를 거쳐 이조판서 때 이도(吏道, 관리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쇄신, 관리 등용의 공정을 기해 명망을 얻어서 청백리에 녹선되고, 글씨도 명필이었던 문간공(文簡公) 용주 조경(龍洲 趙絅 1586~1669)이 호남지방의 암행어사로 왔을때 ‘남덕정(覽德亭)’에 올라 그 감회를 나타내는 시가 남아 있다.

主人覧德鳳亭山(주인람덕봉정산) 千仭飛翔高商風(천인비상고상풍) 주인의 남덕정이 봉정산에 있어 천길 나는 봉황의 날개에 높고 아름다운 바람이다.

昑咏斯間淸趣足(금영사간청취족) 滿園修竹堹庭桐(만원수죽종정동) 이 사이에 시 읊어 맑은 취미 만족하니 뜰에 가득한 아름다운 대나무가 오동 꽃 같네.

天地無涯生有涯(천지무애생유애)浩然歸志欲何之(호연귀지욕하지) 천지는 끝없고 인생은 유한(有限)하니/호연(浩然)히 돌아갈 마음 어디로 가야하나.

驪江一曲山如畵(려강일곡산여화) 半似丹靑半似詩(반사단청반사시) 여강 한 구비 산은 마치 그림 같아 / 반(半)은 그림인 듯 반(半)은 시인 듯하구나

현재 이곳 람덕정(覽德亭)에는 1962년 무안에서 발간된 시사집(詩社集) 무안문원(務安文苑)에 단산 조원철( 丹山 趙元喆,1917~1977)이 지은 경제남덕정운 시(詩) 등 8개의 현판이 전하고 있다.

람덕정 주변과 건물, 돌담장 등의 모습들...

한양이 본관인 조위(趙位), 조위세(趙位世)형제는 아버지 조근선(趙近善)이 1545년 을사사화(己卯士禍)에 연루돼 유배를 당하자 가문에 위기를 느끼고 천리 길도 마다하지 않고 전라도 무안으로 '낙남(落南)'을 선택했다. 봉정산 아래 ‘람덕정(覽德亭)’ 이란 정자를 세우고 주경야독으로 학문에 전진하자 그의 학덕을 흠모해 일대 수 많은 제자들이 모여 들었다고 한다.

현재의 람덕정(覽德亭)은 1500년 중반에 초당으로 지어져 내려오다가 1935년 현재의 현태로 중건한 지가 거의 90년이 다 되어 가고 조형적 가치가 뛰어난 건물이었지만 현재는 후손들이 거의 대도시로 나가고 어르신들만 계셔서 전혀 관리가 되지 않아 폐허가 되어 가고 있는 실정이라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람덕정(覽德亭)은 선대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유형의 문화적 소산으로서 역사적 가치를 되살리는 중요한 문화유산을 보호할 가치가 있어서 무안군의 향토문화유산으로 등록하여 관리가 되길 희망해 본다.

🔲 참고문현

1. 오인교, [무안 람덕정(覽德亭)], 네이버 블로그 '오인교의 녹색건강', 2020.

2. 조병하, [전남 무안의 ‘남덕정’과 법천가든『공안공파』후손들], 한양조씨 대종회 유적유물, 2020.

3. 허생, [한양조씨 - 조위의 람덕정(覽德亭)1500년대], 네이버 블로그 'Memories',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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