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 운동가 백하 김대락 선생의 "백하구려에서 나라 사랑 정신을 배우다!"

- 구한말과 일제 초에 국민 계몽과 광복 운동에 몸 바친 독립 운동가 "백하 김대락"선생
- 600년 역사를 이어오고 있는 항일의 땅 "내 앞 마을"

김오현 선임기자 승인 2024.02.21 16:29 | 최종 수정 2024.02.21 16:40 의견 0

안동시 임하면 내앞마을 백하구려에서 기아문화유산지킴이 참여자들 단체사진(사진촬영 박정세)


구한말과 일제 초에 국민계몽과 광복운동에 몸바친 독립운동가 백하 김대락 선생의 "백하구려"에서 기아문화유산지킴이 회원과 가족들과 함께 1박2일 숙박체험을 통해서 안동 내앞마을 의성김씨 종가집들을 살펴보고 왔다.

안동 내앞마을 의성김씨 종택에서 (사)안동문화지킴이 김호태이사장으로부터 설명을 듣고 있는 기아문화유산지킴이들...



▶ 안동 내앞마을 의성김씨(義城金氏)
경상북도 의성(義城)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로 시조는 김석(金錫)이다. 경순왕의 넷째 아들이며 고려 태조의 외손인 김석(金錫)을 시조로 하고, 그의 후손 김용비(金龍庇)·용필(龍弼)·용주(龍珠) 형제대에 이르러 세계가 갈린다. 김용필계에서 대제학·학자 김안국(金安國), 참판·학자 김정국(金正國) 형제가 나왔고, 김용비계에서 부제학 김성일(金誠一), 대사헌 김우옹(金宇勒) 등이 배출되었다.
내앞(川前)김씨로도 일컬어지는 의성김씨는 안동 입향조 김만근(金萬謹)이 14세기 말 정착한 이후 청계 김진(靑溪 金璡, 1500~1580)의 후예들이 500년 역사를 이어오고 있는 "내앞마을"은 경상북도 독립운동기념관이 있는 안동 임하면에 있다. '천전'이라는 단어가 바로 '내앞, 시내앞'이라는 의미이다. 내앞마을에는 고택들이 참 많은데 500년 역사를 말해주듯 안동 의성 김씨 종택을 시작으로 오른쪽 방향으로 귀봉종택(龜峯宗宅),추파고택(楸坡故宅), 만송헌(萬松軒), 운곡서당(雲谷書堂), 백하구려(白下舊廬), 치헌고택(恥軒故宅) 등이 있다. 마을사람들이 의성김씨 종택을 큰종택이라고 부르고 귀봉종택은 작은 종택이라고 부른다. 귀봉 김수일의 종택인데 아들인 운천 김용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어서 운천종택으로도 불린다고한다. 입구에 귀봉종택 외에 운천 '호종일기' 라는 비석이 하나더 있다. 이것은 김수일의 맏아들인 김용이 임진왜란 당시 의주를 몽진을 떠나는 선조를 수행하며 쓴 일기로 보물로 지정됐는데 그걸 알려주는 비석이다. 일제시대 근대 민족교육을 위해 사용되던 김대략선생의 백하구려와 항일독립운동가 김동삼 생가가 있는 항일운동의 역사가 있는 마을이기도 하다. 안동 지역 애국 계몽운동의 산실인 협동학교가 이 마을에서 처음 열렸고, 내앞마을 출신 25명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하였다. 대표적인 인물로 만주벌 호랑이라 불리는 김동삼과 김대락이 일제치하 나라의 독립을 위해 여러 방면으로 활동하였다.

안동 내앞마을 백하구려에 도착해서 (사)안동문화지킴이 김호태이사장으로부터 환영사와 숙박체험 일정 등을 듣고 있는 기아문화유산지킴이들...



▶ 백하구려(白下舊廬)와 백하 김대락(白下 金大洛)

종 목 경상북도 기념물
명 칭 백하구려
지정일 2000. 04. 10
소재지

경북 안동시 임하면 내앞길 35 (천전리)

백하 김대락선생과 석주 이상룡선생의 독립운동 토크콘서트에 집중하는 기아문화유산지킴이들....(사진촬영 고경임)
휴식시간에 진찬승팀장에 오카리나연주와 (사)안동문화지킴이 김호태이사장께서 준비해 주신 다과를 즐기는 기아문화유산지킴이들....



◾️백하구려(白下舊廬)

이 집은 구한말과 일제 초에 국민계몽과 광복운동에 몸바친 백하 김대락(白下 金大洛, 1845∼1915) 선생의 고택으로 사랑채를 확장하여 1907년 이 지역 최초로 근대식 학교인 협동학교를 개교했던 유래가 있는 집이다. 그의 나이 42세 때(1885년) 세운 것으로 보이는 옛집이다. 가옥은 앞면 8칸으로 서쪽 4칸은 사랑채이고 동쪽 4칸은 중문간을 비롯한 아래채이다. 사랑채는 막돌로 쌓은 2층 기단 위에 서 있으며, 아래층 기단은 앞쪽으로 3m가량 돌출되어 있는데 협동학교 교사로 쓰기 위해 사랑채를 확장할 때 넓힌 것으로 보인다. 김대락선생은 1907년 이상룡, 김동삼 등과 함께 근대적 민족교육을 위해 이곳 사랑채를 확장하여 이 지역 최초로 근대식 학교인 협동학교(協同學校)를 설립하였다. 장소가 협소한 관계로 사랑채 4칸을 확장하여 임시교사로 사용하다가, 후일 가산서당(加山書堂)으로 옮겼다고 한다. 당시 철거된 사랑채의 기단과 주춧돌 일부가 남아 있고, 협동학교의 교사로 쓰던 건물은 광복운동 군자금 마련을 위하여 처분되어 사라졌지만 지금도 건물이 서 있던 축대와 초석 일부가 사랑채 앞에 남아 있어, 그의 애국 정신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아침에 기상하여 백하구려 마당 청소와 김호태 이사장의 기체조를 하고 있는 기아문화유산지킴이들...



◾️백하 김대락(白下 金大洛, 1845∼1915)

백하 김대락(白下 金大洛)선생은 1910년 나라를 일본에 빼앗기자 "나라를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내앞마을 사람들 150명을 이끌고 만주로 망명했다. 문중 단위론 첫 집단망명이었다. 신흥무관학교 건립때에는 고향에 있던 재산과 이 집 사랑채까지 팔아 학교 건립 자금으로 제공하였다. 만주에서 백하는 매제인 석주 이상룡(1858~1932,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등과 함께 한인 자치조직 경학사를 만들고,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인 신흥강습소를 세워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매진하다 1914년 삼원포에서 세상을 떠난다. 백하 선생의 무덤은 지금 찾을 길이 없다. 일제가 훼손할까 봐 비석을 세우지 않은 것이 도리어 위치를 알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그래서 2002년 안동 유림에서는 의성김씨 선산에 빈뫼(허묘)를 썼다.
백하 집안의 독립 유공자는 백하를 비롯해 막내 여동생 김락, 조카 만식, 정식, 규식, 규식의 아들 성로 등 6명이다. 백하구려가 있는 내앞마을은 백하를 비롯한 독립운동 유공자를 20여명이나 배출한 마을이다. 특히 '만주벌 호랑이'로 불린 일송 김동삼(一松 金東三, 1878~1937), 백하선생의 아들로 해방 직후 김구와 김일성이 만난 남북연석회의 임시의장을 맡았던 월송 김형식(月松 金衡植, 1877~1950)도 이 마을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기아문화유산지킴이들 백하구려 관련 서적들을 살펴보고 있는 모습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모습들....
전통한복을 입고 백하구려 마당을 돌고 있는 기아문화유산지킴이들....


기아문화유산지킴이 회원들과 가족들은 안동 내앞마을의 의성김씨 종가집들을 한눈에 둘러 볼 수 있었고, 독립운동가 백하 김대락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되새길 수 있었다. 안동의 아름다운 문화유산을 직접 보고 느낄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을 보냈으며, 앞으로 더욱더 열심히 지역 문화재를 지키고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다짐해본다.


🔳 참고문현

1. 행복한 여행, [안동 내앞마을, 백하구려, 김동삼 생가 그리고 안동김씨 종택, 안동고택 여행], 네이버 블로그. 2021.
2. 권기창, [감성충전 안동여행], 안동시 홈페이지 자료, 2024.
3. 최응천, [나만의 문화유산 해설사 자료], 문화재청,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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