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봉귀소(飛鳳歸巢)의 명당이 있는 봉정산 아래의 효자(孝子), 효부(孝婦)마을

- 비봉귀소의 명당이 있는 봉정산 아래에 터를 잡은 한양조씨 집성촌인 죽전마을
- 마을 입구의 효열각, 4대에 걸친 효자, 효부, 열녀 이야기를 찾아 떠나는 여정

김오현 선임기자 승인 2024.04.11 22:07 의견 0

무안군 달산리 죽전 마을의 한양조씨 효열각과 건립연혁비 모습(사진제공 김오현)

도로를 달리다 보면 마주치는 마을 입구의 효열각(孝烈閣). 낯선 한자로 가득 채워진 비석(碑石)과 낡은 건물은 마치 과거 시대의 이야기를 속삭이는 것 같다. 혹시 한 번쯤, 차를 세우고 어떤 사람의 효자(孝子)와 열녀(烈女) 내용일까 궁금하여 살펴보고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효열각(孝烈閣)은 안내판이나 내용 설명없이 조용히 비석(碑石)만 서 있다. 한자로 가득 찬 내용은 우리에게 막막함만을 선사하고, 과연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는지 알 수 없어 더욱 답답함을 느끼게 된다.
무안군 몽탄면 달산리 죽전마을은 봉정산 아래에 '비봉귀소(飛鳳歸巢)'라고 불리는 명당이 있는 곳에 터를 잡은 한양조씨 집성촌인 마을이 있다. 비봉귀소는 마치 날아다니는 새가 둥지로 돌아오는 듯한 형태를 한 명당으로, 후손들에게 큰 명예와 복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의미를 지닌다고 한다. 이 마을은 '효자(孝子), 효부(孝婦)'마을이라고 불린다. 여기에서 이곳 효열각(孝烈閣)에 대한 사연과 봉황이 깃든 죽전마을 역사적인 스토리를 찾아보고자 한다.

비봉귀소의 명당이 있는 봉정산 아래의 죽전마을의 전경

▶ 비봉귀소(飛鳳歸巢)의 명당이 있는 봉정산 아래의 죽전(竹田)마을

무안군 몽탄면 달산리 죽전은 달산1리에 속하는 마을로 건너 마을 화정동과 같은 행정구역에 속한다. 행정구역의 변천을 보면 1789년 호구총수에는 이로촌면 죽전리, 1912년 지방행정구역 명칭 일람에는 이로면 죽전리,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가서야 박곡면 달산리 죽전으로 나온다. 지명의 유래는 뒷산인 봉정산의 봉황과 관련이다. 이 마을은 이른바 '봉황새가 오동나무 가지에 깃든다'는 소위 비봉귀소(飛鳳歸巢)의 혈(穴)을 안고 있는 봉정산을 주산으로 하고 있다. 이 혈(穴)에 대해서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산천정기(山川精氣)가 호남에서 으뜸이며, 부귀(富貴)와 오복(五福)이 속발(速發, 효과가 빨리 나타남)하여 오래오래 지속되고, 석학과 큰 인물이 대대로 나오는 길지(吉地)로서 사오천 년 동안 발복하는 땅"이라고 한다. 이 산에 사는 봉황(鳳凰)이 오동나무 열매나 기타, 다른 나무의 열매는 먹지 않고 오직 대나무 열매만을 먹기 때문에 마을 곳곳에 대나무가 많이 심어졌고 이로 인하여 대나무가 많은 마을이라 하여 '죽전(竹田)'이라 불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예전에는 대숲이 울창하였으나 지금은 많이 줄어들었다고 한다.

입향조가 심은 것으로 전해오는 마을의 당산나무인 팽나무와 대나무, 돌담장 등이 있는 마을 전경

이 마을은 한양조씨(漢陽趙氏)의 동족마을로 예전에는 황씨(黃氏)들이 살았다고 하나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길이 없다. 입향조(入鄕祖)는 1500년대 중반에 들어 온 한양조씨(漢陽趙氏) 단암 조위(丹菴 趙位, 1505~1594)와 단곡 조위세(丹谷 趙位世, 1508~1569)형제다. 마을에서 달산 저수지 쪽으로 올라 가면 봉정산 기슭에 있는 람덕정(覽德亭)은 1500년 중반에 조위(趙位)형제가 초당으로 지어 후학들을 가르치다가 사라지고 이후 몇차례 중건 했다고 한다. 현재의 건물은 일제강점기인 1935년에 초가였던 것을 단층 팔작지붕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마을에는 봉(鳳)과 관련된 지명이 남아 있다. 한 쌍의 봉이 살았다 해서 한골재가 있는가 하면 봉정산에서 봉이 날아와서 목욕을 한다 해서 용들보(龍灘, 용탄;여울)가 있다. 용들보는 화정동 앞에 있는 보인데 봉(鳳)이 이곳에 와서 몸을 깨끗이 한후 죽림에 깃든다고 한다.

죽전(竹田)은 지리적으로 뛰어난 풍취(風趣, 아담한 정취가 있는 풍경)와 지세(地勢, 땅의 생긴 모양이나 형세)를 자랑하고 있는데도 그에 걸맞는 인물이 나지 않은 이유를 옆마을인 노송정에서는 명당에 묘를 쓸때 너무 깊이 파서 기운이 새버렸기 때문으로 보았고, 이곳 죽전마을에서는 봉정산의 한 쪽이 잘려져 나갔기 때문에 인물이 크질 않는다고 한다. 마을 건너 화정동 앞으로 나 있는 길이 예전에는 해남(海南)이나 진도(珍島), 목포(木浦) 등지에서 한양(漢陽)으로 올라 갈 때 지나던 길이었다고 한다. 일제 시대까지만 해도 중간중간에 주막들이 있었으며 길 가에는 백일홍 나무들이 많이 심어져 있었다고 한다.

무안군 달산리 죽전 마을의 한양조씨 효열각은 4대에 걸친 효와 열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각 모습

▶한양조씨 효열각(漢陽趙氏 孝烈閣)

효열각(孝烈閣)은 효자와 열녀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그들의 모범을 후대에 전하기 위해 세운 건축물이다. 조선시대에는 효도(孝道)와 정절(貞節)이 사회의 중요한 가치로 여겨졌다. 특히, 어머니를 봉양하고 시부모를 섬기는 효도와 남편이 죽은 후 정절(貞節)을 지키는 것을 최고의 미덕으로 존경받았다. 따라서 "효도(孝道)와 정절(貞節)을 실천한 사람들의 모범적인 행동을 기억하고 후대에 전하기 위해" 효열각(孝烈閣)을 세웠던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효열각(孝烈閣)주변에는 간단한 안내나 설명 없이 조용히 우두커니 비석(碑石)만 서있는 느낌이다. 한자로 기록되어 있어 내용은 우리에게 막막함만을 선사하고, 과연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는지 알 수 없어 더욱 답답함을 느끼게 된다. 마을 입구에 효열각을 세운 이유는 단순히 개인의 덕행을 기리는 것을 넘어, 마을 공동체의 가치관을 드러내고 후대에 효(孝)와 열(烈)의 중요성을 일깨우기 위해 세워졌다. 또한, 마을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는 의미도 담고 있다고 한다.
죽전마을 입구에 한양조씨 효열각(漢陽趙氏 孝烈閣)이 있다. 이 비각은 조수원(趙壽元)이 1981년에 숙부 종윤(鐘潤)과 문중 어르신들이 협의하여 그 고조모(高祖母)의 열행(烈行, 여자가 정절을 훌륭하게 지키는 행위)으로부터 아버지의 효행(孝行)에 이르기까지 4대[19세 태형(泰衡)의 처, 20세 두황(斗黃)의 처, 21세 학언(學彦), 22세 종창(鐘昌)]에 걸친 효(孝)ㆍ열(烈)을 기리고자 비각을 세우고 행적을 각각 비(碑)에 새겨 세운 것이다.

◾️열부 무안박씨(烈婦 務安朴氏)
무안박씨(務安朴氏)는 박기언의 딸로 태어나 18세에 한양 조태형(趙泰衡)의 처가 되어 예의범절이 뛰어나 가문을 융성(隆盛)하려던 차에 남편 태형(泰衡)이 중병을 얻으니 갖은 지성도 효험이 없어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여 두 서너 차례나 소생케 하였으나 끝내 세상을 버리니 그 슬픔이야 오죽했겠는가! 초상을 치르던 밤 어두운 방에 들어가 자결(自決)하려던 차에 집안 식구에게 발각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미망인(未亡人)으로 자처하면서 어린 아들을 길러 종사(宗嗣)를 위하여 가문을 이음으로 임종시에는 자손들에게 “너희가 내 뜻을 이어 부지런히 일하고 우애와 효도로서 가문을 빛내라” 는 유언(遺言)을 남기고 천수(天壽)를 다하니 1958년 무안향교(務安鄕校)의 표창장(表彰狀)과 1962년 광주향교(光州鄕校)의 표창장(表彰狀)이 내렸다.

◾️ 열부 김해김씨(烈婦 金海金氏)
열부는 김해 김윤성의 따님이며 한양 조두황(趙斗黃)의 처인데 요조숙녀의 덕이 있어 가문이 평화롭더니 결혼한지 몇해 안되어 남편을 잃은 부인은 남편을 따르려고 결심했으나 집안 사림들이 문을 부수고 들어가 늙은 부모며 이제 걸음도 채 못걷는 어린 아들을 누구에게 맡기려 하는가 하고 회유(懷柔)하니 억지로 일어나 상장 절차를 예에 따라 거행하고 고부(姑婦, 시어머니와 며느리)간의 두 과부가 서로 의지하면서 시어머니가 아들 잃은 슬픔을 느끼지 않도록 극히 조심하면서 아들을 바르게 기르고 치산(治産, 집안 살림살이를 잘 돌보고 다스림)을 늘이면서 일생을 마치니 1952년에 무안향교(務安鄕校)의 표창(表彰)과 1955년에 광주향교((光州鄕校)의 표창(表彰)이 있었다.

◾️ 효자 조학언(孝子 趙學彦)
조학언(趙學彦)의 자는 도원(道彦)이요 호는 도은(道隱)이다. 천성이 유순하고 효성이 지극한 그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모셔 보지 못한 것을 한으로 여기고 아버지의 기일이 돌아오면 제 찬(祭 粲, 제사때 올리는 음식)도 정성껏 장만하려니와 제사를 모시면서 슬피 울었고 편모(偏母, 홀로 있는 어머니)를 편안하게 모시고자 자식의 도를 다 하였으며 어머니가 병석에 누워 잉어를 원하나 때는 겨울이라 눈을 헤치며 앞 방죽에 나아가 얼음을 깨고 물속으로 들어가려던 차에 잉어 한 마리가 스스로 뛰어나와 이를 끓여 드려 병을 낫게 하였으나 끝내 세상을 버리니 3년을 시묘하면서 어머님 무덤을 떠나지 않았고 또 부친 묘소에서 3년을 더 시묘하려고 했으나 몸이 허약하여 실행치 못함을 안타깝게 여긴 효자(孝子)로다. 도의 표창(表彰)과 각 향교(鄕校)의 표창(表彰)이 있었다.

◾️ 효부 유인정씨(孝婦 孺人鄭氏)
효부(孝婦)는 나주 정씨 두환의 따님이며 효자 조학언(趙學彦)의 부인이다. 부부간에 서로 존경하고 충고하면서 시어머님을 모시고 치산에 열성을 다 하였으며 시어머니께서 10여년을 병석에 눕자, 남편과 함께 시탕과 세끼 등 바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대·소변 젖은 옷가지를 빨아서 갈아입히면서도 한번도 내색을 하지 않으니 모두가 효부(孝婦)라고 칭찬하였으며 정씨 부인이 저렇듯 효성스러우니 아들인들 더 효성스럽게 안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한다. 제삿날 제 찬(祭 粲, 제사때 올리는 음식)을 장만할 때는 목욕재개하고 같이 일하는 부인들에게 일체의 헛소리를 못하게 하고 정성을 다 하였다. 부인이 타계하여 출상 하던날 까마귀 떼가 와서 까욱까욱 하면서 상여 소리에 장단을 맞추니 모두가 효부(孝婦)의 초상(初喪)을 하늘이 감동한 것이라 하였다. 마을 주민들의 천거로 1929년에 무안 향교(務安 鄕校)의 표창(表彰)이 내려졌다.

◾️ 효자 조종창(孝子 趙鐘昌)
조종창(趙鐘昌)은 1889년(고종 26년)에 효자 조학언의 아들로 태어나 자를 익원(益源)이라 하고 호는 염재(謙齋)라 했다. 천성이 순후하여 부모에게 근심을 끼치지 않았다. 일찍이 민재 박임상에게 수학하여 학문의 대도를 깨쳤으며 혼정신성(昏定晨省, 밤에는 부모의 잠자리를 보아 드리고 이른 아침에는 부모의 밤새 안부를 묻는다는 뜻)과 출고반면(出告反面, 부모님이나 웃어른께 나갈 때는 갈 곳을 아뢰고, 들어와서는 얼굴을 보여드린다는 뜻)은 그의 천부적 행동이었다. 부모의 상을 당할 때 마다 애통하는 모습은 차마 눈으로 볼 수 없었고 성복(成服, 사망한 지 3일이 되는 날에 망자의 친족들이 친소 관계에 따라 정해진 상복으로 갈아입는 상례의 절차) 전에는 물 한 모금 먹지 않다가 성복 후에야 죽을 입에 댔으며 장례(葬禮) 후에는 매일 성묘하여 부모가 살았을때 모신 것과 같이 하였고 남의 어려움을 보면 내가 당한 것처럼 여기고 도와 드리니 모두가 그를 따랐다. 또 처신할때는 빈부를 가리지 않고 친절하고 공정하게 대하니 모두가 걸출한 대장부라고 하였다. 공의 아들 수원(壽元)도 또한 효자(孝子)로 4대에 걸친 조상의 유덕을 후세(後世)에 숨은 뜻은 길이 빛나리라.

후손들이 거의 대도시로 나가고 어르신들만 계셔서 전혀 관리가 되지 않아 폐허가 되어 가고 있는 죽전마을의 담장들과 집들의 모습

조선시대에는 효도(孝道)와 정절(貞節)이 사회의 중요한 가치로 여겨졌다. 특히, 어머니를 봉양하고 시부모를 섬기는 효도와 남편이 죽은 후 정절(貞節)을 지키는 열절(烈節)은 최고의 미덕으로 존경받았다. 따라서 "효도(孝道)와 정절(貞節)을 실천한 사람들의 모범적인 행동을 기억하고 후대에 전하기 위해" 효열각을 세웠던 것이다. 또다른 이면에는 남편의 죽음 이후에도 여성에게는 재혼이나 새로운 삶을 선택할 권리가 제한되었다. 사회적 압박과 가문의 명예를 위해 여성들은 종종 평생을 홀로 살아야 했고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일부 여성들이 정절(貞節) 강요를 견디지 못하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한양조씨 효열각(漢陽趙氏 孝烈閣)은 고조모(高祖母)의 열행(烈行)으로부터 아버지의 효행(孝行)에 이르기까지 4대에 걸친 효(孝)와 열(烈)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각이다. 이는 조씨 가문의 훌륭한 가풍(家風)을 후대에 전하고자 하는 아들의 깊은 효심(孝心)과 뜻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교 문화 유산이다. 이는 후손들에게 귀감(龜鑑)이 되고, 가문의 화합과 발전에 기여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서로 돕고 웃으며 살아가면서, 효도와 정의를 중시하는 아름다운 전통(傳統)을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 참고문현

1. 백창석, [마을탐방- 몽탄면 달산리 죽전- 영춘동 마을], 무안신문, 2016.
2. 오인교, [무안 람덕정(覽德亭)], 네이버 블로그 '오인교의 녹색건강', 2020.
3. 조성종 [한양조씨 효열각(소개)], 한양조씨대종회,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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