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아국가유산지킴이, 퇴계선생의 가르침이 살아 숨 쉬는 공간을 찾아 안동 도산서원에 가다 - 역사탐방(6탄)

- 조선 최고의 유학자를 꼽으라면 많은 이가 주저 없이 퇴계 이황(退溪 李滉)을 떠올린다
- 불꽃같은 정신으로 조선을 밝힌 스승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채워진 공간, 도산서원

김오현 선임기자 승인 2024.03.21 15:34 | 최종 수정 2024.03.22 19:05 의견 0

​​도산서원 천원지폐 뒷면에 그려진 장소 앞에서 기아국가유산지킴이 회원들 단체사진(사진촬영 박정세)

조선 최고의 유학자를 꼽으라면 많은 이가 주저 없이 퇴계 이황(退溪 李滉)을 떠올릴 것이다. 조선 성리학의 근본을 완성하고 체계화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제자들을 키워낸 교육자이면서 대학자였다. 주자의 이론을 이해하고 그것을 더욱 발전시켜서 '동방의 주자'로도 불리운다.
기아국가유산지킴이 회원과 가족들은 22, 23년 연속으로 안동문화지킴이 김호태 이사장님 초청으로 도산서원의 유교 문화를 직접 체험하며 역사적 가치를 배우는 기회를 만들어 보고자 기획하게 되었다.


▶안동 도산서원(安東 陶山書院)

소박한 도산서당 강당과 현판에 비해 서원의 것은 한껏 멋을 부린 느낌인 한호 글씨의 도산서원 현판, 전교당 앞에서 단체사진
종 목 사적
명 칭 안동 도산서원
지정일 1969.05.31
소재지 경북 안동시 도산면 도산서원길 154(토계리)

도산서원(陶山書院)은 퇴계 이황(退溪 李滉,1501∼1570)선생이 도산서당을 짓고 유생을 교육하며 학문을 쌓던 곳이다. 퇴계 선생은 주자학을 집대성한 유학자로 우리나라 유학의 길을 정립하면서 백운동서원의 운영, 도산서당의 설립으로 후진 양성과 학문연구에 전력하였다. 중종, 명종, 선조의 지극한 존경을 받았으며 일본 유학의 부흥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도산서원은 조선 선조 7년(1574) 그의 학덕을 추모하는 문인과 유생들이 상덕사(尙德祠)란 사당을 짓고 전교당 동·서재를 지어 서원으로 완성했으며, 1575년(선조 8) 임금으로부터 한호(韓濩)의 글씨로 된 사액(賜額, 조선 시대에 임금이 특별히 서원 이름이 적한 현판인 편액과 서적, 토지, 노비 등을 하사하는 서원)을 받음으로써 영남지방 유학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 서원의 건축물들은 민간인들의 집처럼 전체적으로 간결, 검소하게 꾸며 퇴계(退溪)의 품격을 잘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서원 안에는 약 400종에 4,000권이 넘는 장서와 장판(藏板) 및 이황의 유품이 남아 있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서원 철폐 때에도 소수서원(紹修書院)·숭양서원(崧陽書院) 등과 더불어 정리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2019년 7월 6일 전국 9개 서원[소수서원(영주), 남계서원(함양), 옥산서원(경주), 도산서원(안동), 필암서원(장성), 도동서원(달성), 병산서원(안동), 무성서원(정읍), 돈암서원(논산)]등이 ‘한국의 서원’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한국의 서원"에 등재된 9개 서원중에 제향자가 손수 짓고 생활한 곳은 도산서원 뿐이라고 한다.

▶ 퇴계(退溪) 선생 스스로 골랐던 ‘터’의 도산서당(道山書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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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가 직접 설계한 `도산서당' 건물은 소박하고 서당의 마루는 본래의 마루칸 옆에 임시 가설마루인 출마루를 둔 모습(사진촬영 고경임)

퇴계(退溪)는 1557년에 설계도(設計圖)를 바탕으로 도산서당(道山書堂) 건축을 시작했다. 시공에 참여한 이는 법련이란 승려였으며 법련이 입적하면서 정일이란 승려가 이어갔다. 그렇게 해서 1561년에 도산서당(道山書堂) 건물을 완성했다. 이어 학생들이 머물 기숙사 역할을 하는 농운정사(隴雲精舍), 그리고 또 하나의 서재인 역락서재(亦樂書齋)와 서당 전체를 관리할 고지기(창고·묘·정자 등을 지키는 사람)가 머물 하고직사(下庫直舍)까지 4동의 건물이 완성되며 도산서당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도산서당은 지역 이름을 딴 것인데, 이 지역을 도산(陶山)이라고 한 까닭은 질그릇을 굽던 곳이라는 이야기와 함께 산이 접힌 모습이 빚은 것처럼 보여 도산이라고 한 것 같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기숙사인 '농운정사'는 제자들의 편리와 실용성에 집중한 퇴계의 수준 높은 건축 이념을 보여주는 건축물

도산서당은 1561년(명종 16)에 고향으로 내려간 퇴계 이황(退溪 李滉)선생께서 학문연구와 후진 양성을 위해 직접 세운 도산서당으로 시작되었으며 퇴계 선생 사후 퇴계 선생을 기리기 위한 서원이 건립되어 지금의 도산서원으로 이어지고 있다. 도산서원은 크게 도산서당과 서원의 구역으로 나뉠 수 있는데 서당은 퇴계 이황(退溪 李滉) 생전에 유생들을 모아 교육하던 곳으로 도산서원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며, 선생의 실천적 학문과 검소함이 잘 나타나 있다. 도산서당(道山書堂) , 농운정사(隴雲精舍), 역락서재(亦樂書齋)가 도산서당(道山書堂)의 구역에 해당된다.

▶ 안동도산서원 시사단(安東陶山書院 試士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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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서원 맞은편의 '시사단'은 정조의 어명으로 치러진 도산별과를 기념하기 위한 장소다. 안동댐이 세워지며 수몰위기에 처하자 10m 높이의 축대를 쌀아 올린 모습(사진촬영 박정세)

정조(正祖)는 늘 흠모하던 퇴계(退溪)선생의 학덕을 기리고 지방 선비들의 사기를 높여 주기 위해 1792년(정조 16) 3월에 이조판서(吏曹判書) 이만수(李晩秀)에게 명하여 도산별과(陶山別科)를 신설하여 이 지역의 인재를 선발토록 한데서 비롯되었다. 도산별과에는 문과 2인, 진사 2인, 초시 7인, 상격(常格, 통상의 격식'이라는 뜻으로 시문이 평범한 수준은 된다는 말) 14인을 선발하는 별시(別試)로서 그 과시(科試)가 이곳 시사단(試士壇)에서 거행되었던 것이다. 원래의 석비는 이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1796년(정조 20) 무술(戊戌)에 세웠으나, 현존비는 1824년(순조 24)에 비각의 개축과 아울러 고쳐 세운 것으로 비문의 찬자는 영의정 채제공(蔡濟恭) 선생이다.
이 단은 나직하고 넓직한 2단의 자연석 돌림 상단위에 새워져 있다. 주위에는 송백림(松栢林)이 무성해 있으며 강변에 임박하게 세워져 있었으므로 분천강(汾川江)의 침수로 인한 수위상승 때문에 원위치에서 10m 높이의 석축을 쌓아 올려 원형대로 개건하였으나 주위의 송백림(松栢林)은 유지될 수 없었다.

안동문화지킴이 김호태 이사장의 설명에 집중하는 기아국가유산지킴이 참여자들...(사진촬영 고영임)

퇴계 이황(退溪 李滉,1501∼1570)을 빼고 안동을 논할 수 없다고들 표현한다. 단순히 안동 출신의 학자를 넘어 정신적 지주(支柱), 문화적 상징(象徵), 역사적 인물(人物)로 자리 잡았다. 또한 조선 성리학의 근본을 완성하고 체계화했을 뿐만 아니라, '동방(東方)의 주자(朱子)'로도 불리운다.
안동 도산서원(安東 陶山書院)은 퇴계(退溪)선생의 가르침이 살아 숨 쉬는 공간이다. 아름다운 자연 환경 속에서 퇴계(退溪)선생의 학문과 정신을 배우고 살펴볼 수 있는 곳이다. 기아국가유산지킴이도 이번 역사탐방을 통해서 퇴계(退溪)선생의 가르침을 되새기고 다시한번 문화유산(文化遺產)의 중요성(重要性)을 느껴본다. 퇴계(退溪)선생의 가르침을 배우고 싶거나 전통문화(傳統文化)를 체험하고 싶다면 안동 도산서원(安東 陶山書院)을 방문해보시라.

앞마당에서 본 단풍이 어찌나 이쁘게 물들어 있던지 산책하기도 좋고 사진만 찍으면 그림처럼 나오는 도산서원 풍경(사진촬영 한병기)

🔳 참고문현

1. 박광일, [도산서당, 그리고 도산서원], 한국교육신문, 2020.
2. 이승태, [퇴계 이황과 도산서원], 네이버 블로그 '타국인과 나그네', 2024.
3. 최응천, [나만의 문화유산 해설사 자료], 문화재청,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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