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아문화유산지킴이, 고즈넉한 풍경이 매력적인 안동 소산마을 역사탐방(4탄)

- 영의정, 대제학, 승지 등을 배출한 소산마을은 안동 김씨 500년 세거지로 금산촌(金山村)으로 불렸었다.
- ‘깨끗하고 희며, 빛나는 산에 둘러싸인 마을’이란 뜻으로 소산(素山)이라 한다

김오현 선임기자 승인 2024.03.06 12:37 의견 0

​​기아문화유산지킴이 회원과 가족들이 "청나라를 멀리한다"는 의미를 가진 청원루 앞에서 단체사진(사진촬영 박정세)


기아문화유산지킴이 회원과 가족들을 모시고 안동문화재지킴이 김호태 이사장님 초청으로 소산마을의 삼구정과 청원루 등 안동 문화재들을 살펴보고 왔다.

​​​
노모의 장수를 기원한 경 / 보물로 지정된 청원루 전경


▶장동김씨(壯洞金氏)

장동김씨(壯洞金氏)는 신 안동김씨(新 安東金氏) 중 한양 장동에 자리 잡은 일파로 조선말 세도정치의 중심 가문이다. 신 안동김씨 시조는 고려 태조에 귀부해 개국 공신이 된 김선평(金宣平)이다. 중시조는 김상용(金尙容), 김상헌(金尙憲)의 부친 김극효(金克孝)이다. 신 안동김씨는 구 안동김씨와는 다른 가문이다. 구 안동김씨는 신라 경순왕 손자 김숙승(金叔承)이 시조, 고려 장군 김방경(金方慶)이 중시조이다. 신 안동김씨(新 安東金氏)는 인조 때 김상용(金尙容), 김상헌(金尙憲)형제가 정승이 되면서부터 집안이 번성하기 시작한다. 조선시대 장의동, 장동은 동서로 경복궁과 인왕산, 남북으로 창의문(자하문)과 사직단 사이의 마을로 오늘날의 효자동, 궁정동, 서촌이다. 장동김씨 가계에서는 김상용, 김상헌 이후 종묘배향공신을 6명이나 배출한다. 왕비 3명, 정승 15명, 판서 35명, 대제학 6명, 청백리 3명, 문과급제자 120명 등 조선말 까지 이름을 날린다. 특히 김조순(金祖淳)이 순조(純祖)의 장인이 되며 약 60년간 왕권 이상의 외척 세도정치로 나라를 흔들었다.

노모의 장수를 기원한 삼구정 주변 전경 / 250년이 넘은 소나무로 둘러싸인 삼구정 정자앞에서 기아지킴이들 한 컷...


▶소산(素山)마을

안동 시내에서 풍산읍을 지나 하회마을로 가는 길에 햇살을 가득 머금은 아담한 마을이 있다. 이곳은 보물로 지정된 청원루와 문화재로 지정된 삼구정, 안동김씨 종택인 양소당, 묵재고택, 동야고택이 자리하고 있는 문화재의 보고이다. 영의정, 대제학, 승지 등을 배출한 소산마을은 안동 김씨 500년 세거지로 금산촌(金山村)으로 불렸었다. 그러나 청음 김상헌(淸陰 金尙憲)이 낙향해 마을을 감싸고 있는 소요산의 이름을 따서 소산(素山)으로 고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깨끗하고 희며, 빛나는 산에 둘러싸인 마을’이란 뜻을 지녔다.

효심의 정자 삼구정 / 현판 /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서 있는 소나무들과 삼구정(사진촬영 고경임)


오랜 역사를 간직한 마을인 만큼 많은 문화재가 있으며 비안공 구택 돈소당은 세종 때 문신인 비안공 김삼근의 옛집이다. 비안공은 첫째 아들이 한성판관을 지낸 김계권, 둘째가 ‘내 집엔 보물이 없고, 보물이란 오직 청백뿐이다’라는 유훈으로 유명한 보백당 김계행이다. 김계권은 한성판관을 지내며 한양 장의동에 세거지를 마련했고 손자 김번이 안동김씨 장동파의 파조가 된다. 김번(金璠)의 증손자가 청음 김상헌이다. 이곳 돈소당에서는 김삼근의 맏손자(김계권의 장자)인 학조대사가 태어났다. 학조대사는 13세에 안동 학가산(學駕山) 중대사에서 출가하여 세조부터 연산군 때까지 국사를 지낸 고승이다. 스승 신미대사를 도와 훈민정음 보급과 대장경 간행 등 불교 문화 발전에 기여했다고 한다. 또한 인근에 있는 양소당은 김영수(김계권의 막내)가 지은 230여 년의 세월을 간직한 안동김씨종택이다.

세 개의 거북형상 /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삼구정 내부에서 기아지킴이들 기념사진 / 보호수로 지정된 소나무와 함께 모녀 기념 사진

◾️삼구정(三龜亭)

이 건물은 안동김씨 소산 입향조 김삼근(金三近)의 손자 김영전(金永銓, 1439~1522)이 지례현감으로 있던 1495년(연산군 1)에 지은 것이다. 당시 김영전은 88세의 노모 예천권씨를 즐겁게 하려는 효심에서 아우 김영추(金永錘), 김영수(金永銖)와 함께 삼구정을 건립하였다. 당호는 이곳에 거북이 모양의 돌이 3개가 있어 붙인 것으로 거북이는 십장생 중의 하나이므로 자기 어머님이 거북이처럼 오래 살도록 기원하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수려한 주위 자연 경관과 더불어 휴식을 위한 정자의 특징으로 본다면 삼구정의 빼어난 풍경과 공간미도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비록 오랜 세월을 지나는 동안 중수와 중건을 거치면서 부식된 본 부재의 개체로 구조부의 결구양식의 원형이 다소 훼손되었지만 다른 부분은 변함없이 유지되어 조선초기 정자건축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ㄷ자 모양의 독특한 건축물 / 청나라를 멀리한다는 의미를 가진 청원루 / 기아지킴이들 청원루 여기저기 살펴보고 기념사진도 한 컷...


◾️안동 청원루(安東 淸遠樓)

종 목 보물 제2,050호
명 칭 안동 청원루
지 정 일 2019. 12. 30
소 재 지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소산리 87

청원루(淸遠樓)는 조선 중종 때 김번(金璠)이 여생을 보내기 위해 지은 집이다. 그 후 100여 년이 지난 1646년(인조 23년)에 청음 김상헌((淸陰 金尙憲)이 누각으로 다시 지었고, ‘청나라를 멀리 한다’해서 명명한 국가 보물인 청원루(淸遠樓)가 되었다. 병자호란 당시 인조와 신하들이 남한산성에 들어가 항전하다가 주화파의 주장에 따라 결국 항복할때 김상헌은 화의(和議)를 청하는 최명길(崔鳴吉)의 국서를 찢고 자결을 시도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후에도, 인조가 명을 공격하려는 청나라에 군사를 지원하려 하자, 반대 상소를 올려 청나라로 압송됐다가 6년 뒤에야 돌아올 수 있었다. 이때 남긴 시가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만은 시절이 하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 이다.

안동 청원루는 17세기 재지사족(在地士族, 조선 시대에, 향촌 사회에서 유교적 소양을 갖춘 지식 계층을 이르던 말)의 건축적 특징이 잘 드러난 건축이라는 측면 하나로도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있으며, 게다가 난간과 머름(미닫이 문지방 아래나 벽 아래 중방에 대는 널조각)을 포함하여 장식이 극히 배제된 전반적인 건축의 조형성이 강직한 선비의 성품을 잘 드러내고 있어서 인문적인 요인이 어떻게 조형적으로 표현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17세기 중창 때의 모습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고 건물의 전체 구성이 같은 맥락으로 이어져 있어서 완전성을 갖추고 있다고 한다. 원래는 두채의 건물 이었으나 1934년 한채가 홍수로 허물어져 현재 앞면 7칸짜리의 건물만 남아 있다.

보물로 지정된 청원루/ㄷ자 모양의 독특한 건축물 마루에서 기념사진/ 항복의 국서를 찢어버리고 낙향한 청음의 마음을 심정을 느껴보는 기아지킴이들...

🔳 참고문현

1. 조봉현, [역사이야기 가득...안동 소산마을 한비퀴 ], 대경일보, 2022.

2. 권기상, [안동김씨 세거지 지키는 '삼구정 소나무'], 안동 뉴스 자료, 2023.

3. 홍애련, [안동 소산마을 보물과 문화재의 보고], 안동시 공식블로그 마카다안동, 2023.

4. 최응천, [나만의 문화유산 해설사 자료], 문화재청 모바일자료, 2024.

#장동김씨 #안동소산마을 #안동삼구정 #안동청원루 #청음김상헌 #기아문화유산지킴이 #김오현선임기자

ICPSCⓒ?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