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세자(思悼世子)의 원혼(冤魂)이 위로받기 위해 선택한 마을 "동암묘(東巖廟)"

- 마을 뒤로는 병풍처럼 야산이 감싸고 마을 앞으로넓은 백사장이 펼쳐 있고 해당화가 피어 있어 그림 같은 동암마을
- 사도세자의 억울한 죽음, 꿈에 나타나 마을 머물기  청하자 무안 주민들 동암묘 세우고 원혼 달래기

김오현 선임기자 승인 2024.03.01 07:14 | 최종 수정 2024.03.25 12:06 의견 3

AI인공지능을 이용한 상상의 사도세자(思悼世子) 영혼이 안식처로 삼은 그림 같은 동암마을을 표현한 사진

▶ 사도세자(思悼世子) 영혼이 안식처로 삼은 동암묘(東巖廟) : 무안군 향토문화유산 5호
무안군 운남면 동암1리(東巖1里) 원동암 마을은 망운면에서 운남면으로 가는 도중 운남면 소재지 못 미쳐서 좌측으로 돌아 4㎞ 쯤 가면 나온다. 마을 앞에는 청계만이 굽이쳐 흐르고 있는 배산임해(背山臨海)의 마을로 행정구역명으로는 운남면 동암1리 원동암 마을이다. ‘마을유래지’의 기록으로 보면 “원래 마을 이름은 ‘전좌리’였으나 이후 동쪽으로 바위층이 펼쳐져 있어 ‘동암(東巖)’으로 부르다가 지금은 ‘원동암’으로 부른다”고 했다.

원래 마을 뒤로는 병풍처럼 산이 감싸고 있었으며 왼쪽으로는 모래산이 오른쪽으로는 상투머리라는 부리가 있어 전후좌우가 잘 짜여진 마을이었다. 더구나 마을 앞으로는 2㎞가 넘는 넓은 백사장이 펼쳐 있고 해당화가 피어 있어 그림 같은 마을이라 명사십리(明沙十里)로도 불렸다. 그러나 1980년대 창포만(무안국제공항 인근 망운면 톱머리 창포호 일대)이 막히면서 마을환경은 많이 변했다.

지금은 왼쪽의 모래 산이 없어지고 마을 앞의 백사장이 사라지면서 아늑했던 마을은 삭막한 풍경이 되고 말았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봄철과 가을철에 주민들이 잡아왔던 무안의 자랑인 낙지가 잡히지 않은 것이다. 예전에는 하루 낙지잡이를 하면 보통 두접(40마리)이상은 잡았는데 요즘에는 한두 마리의 낙지도 잡을 수가 없다고 한다. 마을 앞에는 양과 같이 생긴 맨섬(밈섬)이란 섬이 있다.

이 마을의 입향조는 김해김씨(金海金氏) 김준희(金俊希)다. 김준희(金俊希)는 선조대(宣祖代) 사람으로 영암에서 살았으나 임진왜란을 맞이하여 영산강변의 잦은 왜구의 출몰에다, 이러한 왜구를 토벌한다 하여 관군의 출입이 심해지자 이를 피해 이주 한 마을이라고 한다.

현재는 여러 성씨가 모여 20여 세대 50여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마을 뒤에는 ‘궁게들’이라는 간척지가 있다. 일제강점기에 물길을 막으면서 형성 된 들인데 들의 모습이 갯가의 ‘궁게’를 닮아서 붙인 이름이라 하나 ‘궁게’라는 게는 없고 해서 ‘궁게’는 일반 ‘게’의 의미를 지닌 지명으로 보인다.

이곳에는 ‘사도세자당(동암묘)’이란 특별한 사당이 있다. 주민들은 이 마을에 사당이 들어선 것은 사람들이 살기 좋은 환경을 갖추고 있으며 마을 주변의 풍광이 아름답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 여기고 있다. 또한 동암에서 볼 수 있는 여덟 가지 아름다운 경치를 노래한 작자 미상의 동암(東巖) 8경(八景)이라는 시가 전해 온다.

1777년에 사도세자가 본 병풍처럼 야산이 감싸고 마을 앞으로 넓은 백사장이 펼쳐 있고 해당화가 피어 있어 그림 같은 동암마을 모습들...

◾️ 동암(東巖) 8경(八景)
明沙海棠(명사해당) 밝은 모래위에 해당화
漁村落照(어촌낙조) 마을에 퍼지는 저녁노을
桃茂果樹(도무과수) 마을 곳곳의 복숭아 나무
僧達歸雲(회달귀운) 승달산에서 넘어오는 구름
木浦儒山(목포유산) 목포의 유달산
光州瑞山(광주서산) 광주의 무등산
遠浦歸帆(원포귀범) 머언 포구로 돌아오는 배
江湖漁大(강호어대) 강호에 고기잡이 성하다

장조황제 동암묘비와 동암묘 삼문

◾️동암묘(東巖廟)
머나먼 남도땅 이곳 동암(東巖)마을에서 사도세자(思悼世子)를 기리게된 사연은 부왕인 영조에 의해 1762년 7월 뒤주에 갇힌 채 비명에 목숨을 잃은 비운의 왕자이고 그의 부인이 ‘한중록(閑中錄)’으로 유명한 혜경궁 홍씨(惠慶宮 洪氏)이다.

1777년(정조 1년) 사도세자의 어린 아들 정조 임금이 왕위에 오른 바로 그 해에 이 마을의 촌로(村老)인 성(成), 이(李), 박(朴)씨의 꿈에 한 귀인(貴人)이 나타났다. 마을 앞에 배 한척이 나타나더니 한 귀공자가 내려 마을 뒷산으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그는 주위를 둘러 보더니 그를 보러 모여든 마을 사람들에게 “나는 선왕(先王)의 세자이니라. 원한이 뼈에 사무친 채 나라 이곳저곳을 둘러보다 이곳에 이르렀느니라. 이곳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 내 영혼이 이곳에 머무르고자 하니 그리 알라” 하고는 사라지는 것이었다.

이튿날 주민들이 모여서 서로 지난 밤 이야기를 하던 중 세 사람의 꿈이 같은 내용인 것을 알고는 어떤 의미가 있는 줄 몰라 궁금해 하면서 헤어졌다. 밤을 맞은 세 사람에게 또 다시 세자의 혼령이 나타나 같은 말을 반복하고는 사라져버리는 것이었다. 다음 날에 다시 모인 세 사람은 똑 같은 현상에 놀라워하면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걱정을 하고 있었다. 다음날 ‘바다에 뭐가 떠내려 온다’는 주민의 외침에 가서 살펴보니 까만 궤(櫃) 하나가 바다에 떠 있었다. 그제서야 이틀간의 현몽이 이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 여기고 정성스럽게 모셔와 제단을 쌓고 모시니 이것이 동암묘의 첫 번째인 단이었다.
그러다 폐서인이 되었던 세자가 그의 아들 정조에 의해서 복위되고 고종 대에 장조(莊祖)로 추존되면서 일시 제단을 폐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후 사도세자가 다시 촌로들의 꿈속에 나타나고 마을에 재액(災厄)이 생기자 인근 유림들과 함께 다시 사우를 세워 제사를 모시니 고종11년 1874년이다. 이것이 두 번째 변화인 제단이다. 그리고 1899년(광무3)에 사도세자가 장조황제로 추존되면서 단을 훼철하였다. 이후 다시 1918년 사당을 세워 면민들이 모시니 이것이 세 번째 변화인 사당이고, 1971년부터 1973년까지 중건해서 현재의 모습으로 동암묘를 중건하여 군수가 제주(祭主)가 되어 모셔오다 현재는 마을 주민만의 제사가 되니 이것이 네 번째의 변화이다.

동암묘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되었으며 건물 내의 바닥에는 중앙에 오석(烏石, 검은 광택의 바윗돌)으로 된 장조황제 위패가 놓여 있다. 또한 묘실 좌우로 <동암묘중수기>등 4기의 편액이 걸려 있으며 사우 입구에는 수령 150년이 훨씬 넘어 보이는 소나무가 두 그루 있고 좌측에 <장조황제동암묘비>가 세워져 있다. 향토문화유산 5호로 지정 되어 있다. 이 마을에서는 ‘사도세자당제’, 또는 ‘당제’라 해서 제를 모셔왔는데 먼저 동암묘에서 제를 지내고 마을의 중앙에 있는 당산나무에 가서 다시 제를 지냈었다. 현재는 당산나무가 말라 죽어버린 관계로 동암묘에서 사도세자(思悼世子) 당제만 지낸다.

동암묘에는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제사 때 사용하는 축문과 제물 목록이 적혀 있다. 또 1971년에 이 사당 중건 당시 참석자들의 명단이 실명으로 적혀 있다. 묘정비를 지나 내삼문을 들어서면 전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의 묘당이 있다. 이 묘당이 사도세자의 영혼을 모시고 있는 제각이다.

장조황제 신위, 삼문, 동암묘 입구

▶ 같은 유래의 신안군 임자도 무산 장조단(莊祖壇)
신안군 임자도 수도(水島, 물이 좋고 풍부한 섬)에도 같은 사연의 사도세자의 단(壇)이 있다. 수도는 임자면 수도리의 부속 섬으로 물이 많아 ‘수도’로 불린다. 섬 중앙에 있는 산의 중턱에 사도세자의 단이 설치되어 있다. 수도는 지도읍 점암 마을에서 정기적으로 여객선이 운항되었는데 2021년 3월 임자대교가 개통되면서 뱃길은 멈췄다.
1908년에 작성된 지도군지에 장조단에 대한 다음과 같은 설화가 상세하게 남아있다. 서쪽으로 10리를 가면 수도가 있다. 이 수도에는 ‘무산(舞山, 춤추는 산)’ 이 있으며, 형세가 거인(鉅人)의 큰 덕과 같이 근엄한 모습으로 아래를 굽어보는 모습이다. 무산의 산정상에 장조황제(莊祖皇帝,사도세자)를 모시는 단이 있다. 이 철마로서 증표를 삼아 단을 쌓고 한잔 현주(玄酒, 술 대신 올리는 찬물)와 정성을 다하여 청결하게 제사를 지내되 충족하게 차리지 말 것이니 백성의 폐가된다.”하였다. 곧 2필의 철마를 가지고 돌아와 석단을 쌓고 단 아래에 철마를 모셨다. 세 집안의 자손은 대대로 매년 길일을 정하여 사도세자의 빈 위패를 모시고 정성껏 제사를 지내왔다.

물론 오늘날에는 마을 사람들이 제사를 지내고 있지는 않다. 지금은 임자도 수도리 큰봉산에 장조단(莊祖壇) 그 흔적이 남아있다. 당집 같은 것은 남아있지 않고 현재는 담장을 두르고 그 가운데 돌로 된 단이 있다.

무안군 운남면 동암1리 원동암 마을 전경

무안 운남이나 신안 임자는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출생이나 죽음과는 아무런 관련성이 없는 곳이다. 그런데 어떤 연고로 이곳에 사도세자의 원혼을 위로하는 묘가 세워졌을까? 두 마을에 흐르는 전설을 그대로 믿을 수는 없고 아마도 사도세자와 관련되어 유배 되었거나 그 집안의 사람 중에 인근으로 들어와서 살게 되면서 이러한 전설과 풍습이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1762년(영조 38) 장헌세자(莊獻世子)의 폐위와 아사 사건(임오화변)으로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고, 굶겨 죽인 사건을 계기로, 이를 동정하는 시파(時派)와 영조의 처사를 옹호하는 벽파(僻派)로 양분되었다. 이 같은 사실에 비춰볼 때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돼 이곳으로 유배되었거나 도망쳐 나와 살면서 사도세자의 넋을 위로하고 자신들이 떠난 뒤에도 제사를 지내도록 하기 위해 이같은 이야기를 퍼뜨렸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김해김씨 문중 분의 생각은 기록이 없어서 주장 할수가 없지만 1777년(정조 1년)에는 대부분 김해김씨 집성촌인 곳에서 이 마을의 촌로(村老)인 성(成), 이(李), 박(朴)씨의 꿈에만 나올 수 있는지 의문이라고 하신다. 특히 성(成)씨와 이(李)씨 들의 후손들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동암마을 앞의 맨섬과 무안낙지를 많이 잡던 앞바다의 모습


🔳 참고문현
1. 최혁, [사도세자와 무안 운남의 동암묘 ], 남도일보, 2018.
2. 백산, [무안군 향토문화유산 제5호 동암묘(東巖廟)], 네이버 백산블로그, 2023.
3. 김산, [무안군 운남의 사도세자당], 무안군 문화관광 전설/설화 자료,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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