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우식 칼럼] 민비 (명성황후) 사진 진위 논란과 검토 (4)

가장 불신 되는 사진 (B), 사진 소개 경위, 논란, 명성황후의 장례, 인간은 망각의 동물

편집국 승인 2023.11.09 15:06 | 최종 수정 2023.11.14 05:54 의견 0

명성황후로 추정되었던 사진 B (1894년에 영국의 The Illustrated London News에 Attendant on the King of Corea (조선 왕의 시녀)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사진)

가장 불신 되는 사진 (B)

영국의 화보 잡지 'The Illustrated London News‘에 Attendant on the King of Corea (조선 왕의 시녀)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었으나 머리 모양이 지체 높은 사람인 것 같다는 점, 다른 앨범에는 독일인 소장자가 ’살해된 왕비 (Die ermordete Königin)‘라고 적은 손 글씨 메모가 적혀있는 점, 프랑스 잡지에 ’조선의 왕비, 민씨 (MIN, REINE DE CORÉE)‘라고 적혀있는 기사도 발견된 점 등의 여러 가지 사유로 명성황후(明成皇后) 사진의 진위 공방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일부에서는 인상을 쓰고 있는 사진의 주인공을 명성황후라고 하는 것은 조선 왕실을 폄훼하려는 일본의 의도가 숨어있다는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다. 역사적 사실을 규명하는 일에 감정을 담아가면서 보는 것은 백해무익하다. 자료에 근거하여 논리적인 판단을 하려는 자세가 역사적 실체를 규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사진 소개 경위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1893년 미국 스미소니언 재단 (Smithonian Institution) 에서 발간한 미국 국립박물관 보고서 (The Bernadou, Allen, and Jouy Corean collections in the U.S. National Museum)에 실린 것이 사진 촬영자와 촬영 시기가 명확하게 적혀있다. 사진 건판의 설명은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EXPLANATION OF PLATE X. Korean Serving Woman in the Palace. In summer costume. The hair is dressed in the fashion peculiar to court ladies. The coat is always white and the skirt blue. Only the royal family wear red garments in the palace. (From a photograph by P. L. Jouy in the U. S. National Museum.) Report of National Museum, 1891, —Hough.

사진은 1891년에 미국 국립박물관의 P. L. Jouy가 궁중에서 일하는 여름옷을 입은 여자를 촬영한 것이다. 머리는 궁녀 특유의 패션으로 치장하고 있다. 저고리는 항상 흰색이고 치마는 파란색이다. 왕궁에서는 오직 왕족만 붉은 옷을 입는다.

이러한 매우 상세한 설명이 적혀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연구자는 사진에만 시선이 집중되어 자료를 보면서 육상경기에서 경쟁하듯 하루라도 이른 날짜를 취하고자 하는 욕망 때문에 책자가 출판된 시기인 1893년 대신에 1891년으로 적고 있다. 그것은 다른 출판물과의 비교에도 공평하지 않으며 역사적 진실을 밝히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참고로 이 보고서에 실린 사진은 1871년에 미국 해군이 수집한 물건부터 1891년까지 외교관을 비롯한 다양한 직종의 사람들이 수집하거나 촬영한 것이 망라되어 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P. L. Jouy가 촬영한 사진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1883년이므로 문제의 사진도 1883년에서 1891년 사이에 촬영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1891년에 미국 국립박물관의 P. L. Jouy가 궁중에서 일하는 여름옷을 입은 궁녀를 촬영하여 1893년애 스미소니언 재단에서 미국 국립박물관 보고서로 출판된 자료

1892년에 조선에 온 드 게르빌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신대륙에 도착한 지 4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1893년에 미국 시카고에서 세계 콜럼버스 박람회 (World's Columbian Exposition, 또는 시카고 세계 박람회가 개최되었다. 우리나라가 처음으로 출전한 엑스포였다.

프랑스계 미국인 드 게르빌 (Amédée Baillot de Guerville, 1869년 – 1913년)은 1892년에 1893년 세계 콜롬비아 박람회(시카고 세계 박람회)의 특별 위원으로 일본, 한국, 중국, 실론, 유럽을 다니며 각국에서 왕, 황제, 국가 원수들에게 박람회를 홍보하고 출전을 권유했다. 그는 프리랜서 종군 기자, 편집자, 상업 대리인이었으며 여행작가로도 잘 알려져 있다. 1890년에 그는 미국 위스콘신주 밀워키와 시카고 프랑스어권 커뮤니티를 위해 Le Courrier Francais라는 신문을 창간했으며 1891년에는 미네소타주 세인트 폴에서 청중에게 1889년 파리 세계 박람회(Paris World’s Fair)의 입체 홍보영상을 상영하여 상업 대리인으로서의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주조선 미국공사 오거스틴 허드 (Augustine Heard, 임기: 1890년 5월 27일 – 1893년 6월 27일)가 1892년 11월 17일자로 조선정부의 외부대신 조병직(趙秉稷, 1833년 – 1901년) 에게 보낸 외교문서 164호인 친람(親覽) 요청서에 따라 드 게르빌이 입궁하게 된다. 입궁해서는 맥킨토시(McIntosh Battery & Optical Co.)사의 Magic Lantern (영사기)으로 1878년 프랑스 파리 박람회 현장과 미국의 도시풍경을 관리들과 명성황후에게 보여주어 호감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1891년 10월 21일에 열린 엑스포 낙성식에 불참한 조선이 엑스포에 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1893년 발간된 프랑스 ‘피가로 일루스트레(Figaro Illustré)’ 10월호에는 고종황제와 명성황후를 알현한 프랑스인 기자가 작성한 기사에는 명성황후의 사진과 더불어 다음과 같은 일화가 구체적으로 소개되어 있다.

“얼마 후 우리가 왕에게 보여주고자 했던 영사기가 설치돼 있는 다른 작은 곳으로 안내되었다. 왕비나 왕자는 이 이례적인 영화 상영에 참석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병풍 뒤에 있었다. 외국인 남자는 왕비를 볼 수 없었고 지체가 높은 여자가 아니면 볼 수 없었다. 우리도 ‘왕비를 볼 수만 있다면’하는 희망이 있었지만,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워싱턴의 백악관, 시카고의 20층 건물, 나이아가라 폭포, 빠른 철도, 그리고 박람회의 멋진 건물 등의 사진을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왕비는 첫 장면을 보자마자 병풍 뒤에서 나왔다. 너무 놀라서 입이 벌어지고 눈이 휘둥그레졌기 때문이다. 왕비는 가만히 있지 않고 사진이 투영되는 하얀 천(스크린) 쪽으로 가서 마치 재생되는 방법을 알고 싶어 하는 듯하게 손으로 몇 번이고 만졌다. 그리고는 통역자를 불러서 그 장치와 사진 등에 대해 많은 질문을 했다. 새로운 장면마다 정보를 묻고 모든 것에 흥미를 가졌다. 우리는 왕비가 매우 영리하다는 것과 국정에 관하여 왕을 돕고 있다는 이야기를 떠올리게 되었다. 왕비의 영향력은 아주 컸다. 왕비는 왕과 거의 같은 나이이며 자그마하며 아주 예뻤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흥분이 최고조에 달했다. 왕과 왕자는 우리 곁으로 다가와서 한 시간 가까이 여러 가지 다른 주제에 대해서 우리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병풍 뒤에 앉아있던 왕비는 대화를 주의 깊게 듣다가 가끔 왕자를 불러서 또 다른 질문을 했다. 왕은 우리를 즐겁게 하고 싶어 했다. 왕은 우리에게 15일 후 외국 공사들을 초대해 큰 잔치를 열 것이니 그 전에 떠나지 말고 참석해 주기를 바랐다. 그는 박람회에 대해서 많은 것을 부러워했다.”

이 기사에 실린 사진에는 ‘민씨, 조선의 황후(Min, Roi de Coree)’라고 분명하게 적혀있다. 명성황후를 직접 만난 사람이 쓴 글이고 사진이니 신빙성이 있어 보이기는 하지만 1891년에 미국 국립박물관의 P. L. Jouy가 촬영한 ‘궁중에서 일하는 여름옷을 입은 여자’가 ’조선의 왕비, 민씨 (MIN, REINE DE CORÉE)‘로 바뀐 것은 석연치 않다.

드 게르빌이 1892년 11월에 명성황후에게 보여준 시키고 세계 박람회 홍보영상을 상영한 영사기

1893년 프랑스 ‘피가로 일루스트레(Figaro Illustré)’ 10월호에 ’조선의 왕비, 민씨 (MIN, REINE DE CORÉE)‘라고 소개되어 게재된 사진

1894년 여름에 조선을 방문한 헤센-바르테크

Ernst von Hesse-Wartegg(1851년 –1918년)의 가계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으나 오스트리아제국 비엔나에서 태어난 오스트리아계 미국인 작가이자 여행가로 1918년에 스위스 루체른에서 사망했다.

일본을 거쳐 1894년 부산과 인천의 제물포를 통해 조선에 입국하였다. 직접 조선을 방문하고 보고 느낀 것을 여행기로 집필한 것이므로 상당히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책은 독일어로 쓰였다. 1894년은 1월부터 남부지방에서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고, 6월에는 갑오개혁이 실시되고, 8월에는 청일전쟁이 발발한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이러한 혼란기의 조선을 유심히 관찰하여 당시의 정황을 잘 묘사해 놓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본인이 경험하고 느낀 바를 적은 것으로 조선에 관하여 남긴 기록이 썩 좋지는 않다. 책 표지에 ’許世華 高麗(허세화 고려)‘라고 한자로 적어 두었는데 자신의 이름인 헤세-바르테크를 한국식으로 지어 한자로 바꾼듯하다. 이 책에도 문제의 사진이 등장한다. 분명히 본인이 촬영한 것은 아니다. 사진의 입수 경로와 사진에 대한 설명을 누구에게서 듣고 저술했는지 매우 궁금하다.

독일어로 쓰인 책은 같은 해인 1995년에 이탈리아어로 번역되어 소개되었다. 이탈리아어 제목은 ’La Corea e La Guerra Cino-Giapponese(조선과 청일전쟁)‘로 E.V. Hesse-Wartegg Korea를 Ottone Brentari가 이탈리아어로 번역한 것인데 청일전쟁과 조선과 이탈리아와의 관계를 추가하여 출판하였다. 독일어로 Hofdame(궁녀)로 설명했던 문제의 사진은 이탈리아어로도 Dama di corte (궁녀)로 동일한 의미로 번역되어 있다.

에른스트 폰 헤센-바르테크가 1894년 여름에 조선을 방문한 후 1895년 독일에서 독일어로 출간한 조선 여행기 E.V. Hesse-Wartegg Korea (許世華 高麗)에 실린 한국의 왕(Der König von Korea)과 궁녀(Hofdame)

명성황후의 장례

명성황후의 직위는 일본의 압력으로 죽음 이틀 뒤 폐인으로 강등되었다. 고종의 명으로 폐인으로 강등된 바로 다음 날 ’빈(嬪)‘으로 올라갔다. 왕비에게 저질러진 이런 만행이 국제적으로 알려지게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게 된 일본은 사건이 일어난 10월에 형식적인 조사를 하고 명성황후의 지위도 생전 마지막 작호인 왕후로 복작되었다. 명성황후의 장례는 사후 즉시 치러지지 못하고 2년 2개월이 지난 1897년 11월 22일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황제의 명에 의해 명성황후로 추증된 후에 치러졌다. 명성황후의 복위와 국장은 고종이 황실의 이미지를 제고하고 근대적인 국가를 건설하려는 의지가 반영되어 성대하고 엄숙하게 거행되었다. 장례식의 준비 과정이나 장례식 광경은 ‘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로 기록되어 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San Francisco Chronicle)'은 1895년 10월 8일의 명성황후 시해 사건으로부터 2년 3개월 후인 1898년 1월 9일자에 명성황후의 장례 소식을 장문의 기사로 전하고 있다. 이 기사에 문제의 사진을 스케치한 삽화가 실렸다. 1893년에 스미소니언 재단에서 미국 국립박물관 보고서로 출판된 자료는 잊혀졌던 것 같다.

1895년 10월 8일의 명성황후 시해 사건으로부터 2년 3개월 후인 1898년 1월 9일자 미국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San Francisco Chronicle)'에 실린 명성황후의 삽화와 장문의 기사

2006년의 원본 사진 공개소동

1893년에 스미소니언 재단에서 출판한 미국 국립박물관 보고서와 1894년 발간된 화보 잡지 'The Illustrated London News' 등의 책자에는 '궁녀’로 소개되어 있으나 2006년에 한국, 중국, 일본의 19세기 이후의 사진을 수집해온 영국인 수집가 Terry Bennett씨가 문제의 사진의 원본으로 추정되는 사진을 공개했다. 1894년부터 1895년까지 조선을 방문했던 독일인이 찍은 사진첩에 등장하는 명성황후로 추정되는 사진과 더불어 앨범에 함께 실린 4장의 사진 중 왼편에는 고종과 순종의 사진이, 오른편에 명성황후 추정 사진이 있으며 아래쪽에는 흥선 대원군의 사진 2장이 배치되어 있다.

특히 명성황후 추정 사진 설명문에는 필기체로 'Die ermordete Königin'이라고 적혀있는데, 이는 '살해된 왕비'라는 의미로 인물뿐 아니라 사건까지 특정하고 있어 그 정보를 누구에게서 어떻게 듣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명성황후로 지목하는 문제의 사진은 대원군의 사진 한 장과 사진의 배경이 정확히 일치한다. 같은 장소에서 촬영된 것이 분명하다. 유순한 눈빛과 다르게 날카로운 인상이 기록과 일치함으로 명성황후의 실물 사진이라는 의견도 있으나 햇빛이 강한 시간대의 실외에서 촬영하게 되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로 보인다. 중요한 것은 이 사진을 소장했던 독일인이 조선을 방문한 1894년 이전에 촬영되어 소개된 사진인 것이 밝혀졌으므로 소장자가 조선을 방문해서 촬영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명확하다.

2006년에 1894년부터 1895년까지 조선을 방문했던 독일인이 촬영한 것이라고 공개된 사진 4장.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왕과 왕세자 (König und Kronprinz), 살해된 왕비 (Die ermordete Königin), 조선의 대신 (Korean Minister)이라는 설명이 적혀있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

명성황후를 직접 접견한 드 게르빌이 1차로 ‘피가로 일루스트레(Figaro Illustré)’ 1893년 10월호에 사진과 함께 명성황후라 소개했고, 1895년 12월 14일자 ‘The Illustrated American’에 실린 ‘명성황후는 왜 살해됐나(Why Queen Min Was Murdered)라는 기사에도 그렇게 소개되었다. 고종의 손녀이며 의친왕 이강(義親王 李堈, 1877년 - 1955년)의 둘째 딸 이해원 (李海瑗, 1919년 - 2020년)여사는 대원군의 첩인 초선(1849년 – 1885년)일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명지대학교 김차규 교수는 사진 속 여인이 평복을 입었으며 뒷배경이 같은 대원군 사진이 임오군란 뒤 중국 억류 때 즐겨 입은 중국풍 복식 차림이란 점을 들어 대원군을 수행한 시종일 수 있다는 견해를 내놓았다. 같은 대학교의 조효순 명예교수는 황후는 평상시 소례복 차림이어야 하는데 머리 위에 올린 가채에 떨잠 장식이 없고, 저고리 위에 황후가 입는 당의가 없으며 홑치마가 아닌 두 벌의 치마를 입어야 해서 궁중 복식의 예법에 맞지 않아 명성황후의 사진이 아니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논란은 또 다른 논란을 낳을 뿐이다. 들은 말을 단순히 반복해서 전하는 전언 게임을 하게 되면 몇 명만 거치더라도 전혀 다른 말이 되는 경우가 많다. 이와 비슷한 현상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명성황후를 직접 알현한 외국인의 증언도 믿기 어렵다. 우리 눈에 서양 사람들을 보면 모두 같아 보이는 것처럼 외국인이 한두 번 본 동양 여인의 모습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구별해 낼 수 있을까? 불가능에 가까운 이야기이다. 조선시대에 조선을 여행하던 외국인들은 매우 끈끈한 우정을 가지고 교류했던 모양이다. 사진 건판은 한 사람이 가지고 있었을 텐데 사진을 여러 장 인화해서 국적, 언어, 방문 시기를 불문하고 필요한 사람들에게 선심을 쓴 것으로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사진에 대한 설명도 상황에 따라 다르게 한 것은 아닌가 싶다. 어차피 진위를 확인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가벼운 마음으로 각자의 희망 사항을 주장한 것이 아닌가 싶다. 자신들의 주장이 130년 가까이 지난 오늘날에도 문제가 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을까? 어차피 자신들은 죽고 난 다음의 일이니까 상관 없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남겨진 사람들에게는 골칫거리가 아닐 수 없다.

1895년 12월 14일자 ’The Illustrated American’에 실린 기사 ‘왜 왕비 민씨는 살해되었는가? (Why Queen Min Was Murdered.)’ 문제의 사진 제목은 ‘죽은 조선의 왕비 (MIN, LATE QUEENOF COREA)’로 되어 있다.

<유우식 문화유산회복재단 학술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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