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우식 칼럼] 민비 (명성황후) 사진 진위 논란과 검토 (6)

근래애 소개된 초상화 (D), 다양한 의견, 흰 두건의 의미, 구한말의 초상화

편집국 승인 2023.11.14 05:53 | 최종 수정 2023.11.16 05:26 의견 0

명성황후로 추정되었던 초상화 사진 D (2007년에 운현궁에서 발견된 족자 형태의 두건을 쓴 여인의 초상화로 뒷면에 OO부인(OO婦人)이라는 글이 적혀있어 명성황후의 초상화라는 주장이 제기된 사진)

근래에 소개된 초상화 (D)

지난 2017년 광복절을 앞두고 고종의 비인 민비(閔妃) 또는 명성황후(明成皇后, 1851년 - 1895년)를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고 주장하는 초상화가 나왔다. 현재까지 명성황후의 사진으로 확정된 작품은 한 점도 없는 상황으로, 여러 가지 논란만 가중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 초상화의 등장으로 명성황후의 용모에 관한 단서가 될지 새로운 논쟁을 초래할지 귀추가 주목된다.

이 초상화는 세로 66.5cm, 가로 48.5cm 크기로, 두건을 쓰고 하얀 옷을 입은 여성이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서양식 의자에 앉아있는 모습을 하고 있으며 족자 형태로 만들어져 있다. 족자 뒷면에는 '부인초상'(婦人肖像)이라는 글자가 족자 봉 부근의 종이에 족자 봉 방향을 따라서 세로로 적혀있다. 부인초상'(婦人肖像)이라는 글자 앞에 약간의 얼룩이 관찰된다. 다른 글자가 적혀있었다면 인위적으로 지운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소장자 측에서는 해당 부분을 적외선으로 촬영한 결과 '부인' 글자 위에 '민씨'(閔氏)라는 글씨가 있었으나 나중에 훼손된 것이 확인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선뜻 동의하기는 어렵다.

명성황후로 추정되었던 초상화와 뒷면의 글자 사진 (일반 가시광 사진과 적외선 사진) 적외선 사진 촬영으로도 지워진 부분의 글자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아 閔氏로 추정된다고 가필한 것.

다양한 의견

소장자 측에서는 그림 속 인물이 착용한 신발이 고급 가죽신이며 이승만 전 대통령이 1910년에 출판한 '독립정신'에 실린 명성황후 추정 사진과 용모와 분위기가 비슷하다는 점을 들어 명성황후의 초상화가 맞다고 주장했다. 왕비가 평상복을 입어 격이 맞지 않는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저고리와 치마에 무늬가 있어서 평민이 입던 옷과는 다르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이 그림을 명성황후 초상화로 단정할 만한 결정적 단서가 없다는 반론이 나왔다. 미술을 전공한 한 교수는 실물을 보지 못해 정확한 감정이 어렵다면서도 "한복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지는 점을 보면 화가가 한국인이 아니라 일본인일 확률이 매우 높다"고 말하면서 "사진을 보고 얼굴과 두건만 베껴 그린 뒤, 옷과 의자는 꾸며서 그린 것 같다"며 "초상화의 얼굴 모양도 일본인과 흡사하다"고 덧붙였다. 근대사 분야의 또 다른 교수는 "옷차림이나 용모를 보면 왕비의 초상화라고 하기에는 너무 초라하다"고 하면서 명성황후의 초상화가 아닐 것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또한 초상화의 주인공이 민씨부인이(閔氏婦人)라고 하더라도 대원군의 부인인 여흥부대부인 민씨(驪興府大夫人 閔氏, 1818년 – 1898년)일 가능성도 있다. 어쩌면 흰 두건이 힌트를 제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婦人과 夫人의 차이

婦人과 夫人 모두 한글로 적으면 부인이고 발음도 같다. 의미까지 같을까? 두 단어 모두 결혼한 여자라는 공통점은 있지만 그 의미와 사용법은 크게 다르다. 婦人은 일반 명사로 결혼한 여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夫人을 국어사전에 찾아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남의 아내를 높여 이르는 말, 대 중국에서, 천자의 비(妃) 또는 제후의 아내를 이르던 말, 예전에, 사대부 집안의 남자가 자기 아내를 이르던 말. 지체 높으신 부인이었다면 婦人이 아닌 夫人으로 썼을 것이고 앞에 성씨를 붙이는 경우라면 더더욱 OO夫人으로 적어야 했을 것이다. 婦人이라고 적은 것을 보면 결혼한 여자를 일반화한 어느 결혼한 여인이라는 정도의 의미로 적은 것으로 婦人앞에 글이 적혀있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물론 婦人과 夫人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을 수도 있고 적으면서 실수했을 가능성도 있다.

흰 두건의 의미

필자의 어린 시절인 1960 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초반에는 시골에서 농작업을 할 때 여자들이 흰 수건을 머리에 두르고 일하다가 땀이 나면 땀을 닦기도 했던 기억이 있다. 초상화를 만들면서 흰 두건을 쓴 것은 일상적인 것이 보다는 두건이 가지는 특별한 의미를 표현하고자 함이 아니었을까 싶다. 의식용 유니폼과 같은 역할을 한 것은 아니었을까? 오래된 사진 속에서 흰색 두건을 한 여인들의 모습을 찾아보았다. 주로 개화기의 서양 선교사들과 촬영한 사진에서 찾을 수 있었다. 사진을 찍는 것은 매우 특별한 일이었기 때문에 옷매무새도 고치고 자세와 표정도 연출하면서 촬영했을 것이라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초상화를 그리는 데 걸리는 시간과 비용을 고려하면 사진을 찍는 것 보다 훨씬 신경을 썼을 것이다.

미국 북감리회 선교사인 매티 윌콕스 노블(Mattie Wilcox Noble, 1872년 – 1956년)은 윌리엄 아서 노블(Wiliam Arther Noble, 1866년 – 1945년, 한국명 노보을(魯普乙))과 결혼해 1892년 조선 땅을 밟은 기혼 여선교사였다. 노블 부인은 조선에 온 첫해부터 1934년까지 42년간 평양과 서울에서 지낸 일상과 사역을 일기에 기록했다. 흰 두건을 쓴 평양의 전도 부인들과 함께한 모습의 사진이 남아있다. 초상화 족자의 여인이 착용한 흰 두건과 형태가 비슷하다. 노블 선교사 가족은 1901년부터 12년까지 매년 여름 대동강에 하우스 보트를 띄워 피서를 즐겼다는 기록도 사진과 함께 남아있다. 사진은 1890년대 말에서 1900년대 초반 사이에 촬영된 것이므로 명성황후가 시해당하기 전후 조선의 일상을 담은 것이다.

미국 북감리회 선교사인 노블 부인(뒷줄 가운데)이 흰 두건을 쓴 평양의 전도 부인들과 함께한 모습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자료)

Mimi Scharffenberg (1883년 – 1919년)는 1906년 말경에 재림예수교에서 파견된 선교사로 평안남도 순안에 도착하여 신자들을 교육하고 1909년에는 평안남도에서 진남포여학교의 개교를 지휘했다. 1909년 9월에는 서울로 이주하여 안식일학교의 교육감으로 봉사하면서 출판 활동을 했다. 1917년에 병에 걸리게 되어 치료차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돌아갔으나 1919년 12월 19일에 35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미국 워싱턴 D.C.의 Rock Creek Cemetery에 묻혔다.

Mimi Scharffenberg가 평안남도 진남포여학교의 두 여학생들괴 찍은 사진 (1909년)

김란사(또는 하란사, 1872년 - 1919년)는 1896년애 미국으로 유학하여 1906년에 대한제국 여성 최초로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교에서 학사를 취득한 여성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이다. 하란사라는 이름으로도 잘 알려진 김란사는 인천감리(仁川監理)겸 인천부윤(仁川府尹)을 역임한 하상기(河相驥, 1852년 - 1920년)와 혼인한 상태에서 이화학당에 입학하면서 세례명인 낸시(Nancy, 蘭史)로 불렸다고 한다. 하란사라는 이름은 미국에 입국할 때에 입국심사관에게 남편의 성이 하씨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미국으로 유학하기 전인 1895년에는 일본 경응의숙(慶應義塾, 현 케이오대학)에서 1년간 공부하게 되는데 그 당시의 입학명부에는 이름이 김란사(金蘭史)로 기록되어 있다.

1916년에 미국 뉴욕 사라토가에서 열린 세계 감리교 총회 감리교 평신도회의에 한국교회 평신도 대표로 참석한 양장 차림의 하란사(김란사)선생과 흰색 두건을 쓴 참가자

여흥부대부인 민씨와 천주교의 만남

흥선대원군은 아들 고종이 즉위한 이후 10여 년 동안 정권의 실세였다. 그가 바로 1866년에 천주교 박해를 일으킨 장본인이었다. 조선에 입국하여 선교하던 12명의 프랑스인 선교사 가운데 9명이 순교했고, ‘수천 명’의 천주교 신도들이 무참히 학살당했다. 그의 부인이며 고종의 어머니인 여흥부대부인 민씨는 후에 세례를 받고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여흥부대부인 민씨 천주교와의 인연은 고종을 낳고부터 시작되었다. 박씨 부인을 유모로 두었는데 마르타라는 세례명을 가진 천주교 신자였다. 부대부인 민씨에게 천주교를 전해준 사람이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으로 1861년 조선에 입국해 1866년까지 경상북도 문경 지역을 중심으로 사목활동을 펼쳤던 깔레 (Calais 姜, 1833년 - 1884년) 신부는 “대원군의 부인 즉 임금의 어머니는 천주교를 알고, 교리문답을 조금 배웠으며, 날마다 몇 가지 기도문을 외고, 자기 아들이 왕위에 오른 것에 대해 감사미사를 드려달라고 내게 청했다.”라고 증언했다. 부대부인 민씨는 비록 세례는 받지 않았지만, 박마르타를 통해 프랑스 선교사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1866년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자 부대부인의 천주교 학습도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었다. 그와 천주교를 연결해 주던 유모 박마르타도 강원도 홍천으로 피신했다가 좌포도청에 체포되어 1868년 2월에 순교하게 되었다. 천주교 박해 이후 조선의 정세는 급격하게 변하여 대원군이 실각하는 듯 하였으나 1882년에 일어난 임오군란의 수습을 계기로 더욱 강력한 힘을 얻게 된다.

부대부인 민씨에게는 이때 이후 천주교와의 접촉을 재개할 수 있었다. 거처인 운현궁에는 이마리아를 비롯한 몇몇 천주교신자 궁녀들이 있었기 때문에 조선에 파송되어 일제강점기까지 활동한 프랑스의 로마 가톨릭교회 선교사이며 당시의 서울 교구장 귀스타브샤를마리 뮈텔 Gustave-Charles-Marie Mutel, 1854년 – 1933년) 주교와 인편을 통해서 연락했다. 1894년 이후 1895년 말 사이에만도 모두 13차례에 걸쳐서 뮈텔 주교에게 자문을 구하거나 접촉했으며 1895년에는 서울에 진출해 있던 샤르트르 바오로 수녀회의 프랑스인 수녀들이 운현궁을 방문하기도 했다.

부대부인 민씨가 뮈텔 주교에게 정치적 사건들에 대한 자문을 요청하며 접촉하기 시작한 때는 갑오경장이 진행되던 1894년 7월이었다. 당시는 동학혁명군의 참패와 일본 세력의 등장으로 인해 동학혁명군과 연결되어 있던 대원군의 안위가 위태로워 졌던 때였다. 이 시점에서 그는 뮈텔 주교에게 사람을 보내 대원군이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지를 물었다. 또한 1895년 3월 자신의 손자인 이준용이 반역 음모로 구속되고 남편인 대원군이 감금당하자 그 이유를 뮈텔 주교에게 물어왔다. 이 사건 이후 1895년 8월에 이준용이 국왕 고종의 허락을 얻어 프랑스로 떠나려 하자, 부대부인 민씨는 뮈텔 주교에게 이준용의 프랑스에서의 생활 편의를 부탁했다. 그해 10월 민비시해사건이 일어나던 날 새벽에 뮈텔 주교에게 사람을 보내 이를 알려준 사람은 아마도 부대부인 민씨였으리라 추정된다. 그 밖에도 부대부인 민씨는 뮈텔 주교에게 간단한 선물을 보내거나 궁중과 관련된 주요 소식을 전해주기도 했다.

여흥부대부인 민씨의 천주교 세례

가톨릭 뉴스, 고려대학교 조광 교수의 역사의 창, 대원군부인의 영세입교라는 칼럼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소개되어 있어 이해를 돕기위해 옮겨 적는다.

부대부인은 인편으로 뮈텔 주교에게 세례받기를 청했다. 이 당시의 상황을 뮈텔 주교는 자신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1896년 10월 11일 왕의 어머니가 영세를 청해왔다. 그는 지난 봄부터 집안 살림을 며느리들에게 넘겼고, 그래서 미신행위를 피할 수 있었다. 합의한 대로 나는 저녁 7시에 조 회장과 함께 출발, 대원군의 궁궐 하녀인 이 마리아의 집으로 갔다. 그 집은 바로 궁궐 근처에 있었다. 15분이 지나자 왕의 어머니가 가마를 타고 비밀리에 그곳에 당도했다. 가마꾼들은 그것이 한 궁녀에 관한 일이라고만 생각했을 뿐이다.

내가 전부터 아는 최씨란 한 궁녀만이 부대부인을 수행했다. 그는 매우 검소한 차림으로 내가 있는 방으로 들어와 내게 아주 간략히 인사했다. 시력은 약하나 청각은 매우 예민하고, 또 79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부인은 모든 신체 기능이 자유롭다. 부인은 나에게 밖에 희망을 둘 곳이 없다고 하며, 그의 가정과 모든 일가를 부탁했다. 나는 그녀에게 우리의 첫째요 유일한 의탁처는 오직 천주님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러한 충고를 아주 잘 이해했고, 내게 영세를 청했다. 고령이고 성령의 도움도 특별히 필요하고 또 궁궐에서 나오기 어려운 사정 등을 고려해서 나는 그에게 견진성사까지 받도록 권했다. 그는 이 권고를 고맙게 받아들였다. 나는 아주 조그마한 방에서 가능한 한 장엄하게 완전한 성인 영세예절로 그에게 영세를 주었다. 수산나가 그의 영세대모가 되었고, 2명의 이마리아 중 연장자가 그녀의 견진대모가 되었다. 예식이 끝나자마자 그는 자리를 떴고, 이어 나도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오니 9시였다.”

부대부인 민씨의 세례명은 민마리아이다. 부대부인의 영세 대모는 고종의 유모로서 1868년에 순교한 박마르타의 딸인 원수산나였다. 부대부인의 영세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했고 비밀에 붙여졌다. 영세를 받은지 며칠 후 민마리아는 왕가에서의 생활상 대재와 소재를 지킬 수 없다고 하며 뮈텔 주교에게 관면을 청해왔다. 이처럼 민마리아는 그의 일상생활에서도 천주교의 가르침을 실천하게 되었다. 1897년 9월 5일에 그는 뮈텔 주교에게 영성체와 고해성사를 요청하기도 했다.

민마리아는 신앙생활을 실천하는 한편, 1895년에 있었던 민비시해사건 이후 뒤틀어진 대원군과 고종의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해서 뮈텔 주교에게 중재를 부탁하기도 했다. 또한 민마리아는 뮈텔에게 대원군에게 영혼을 구하기 위해 영세를 권해도 되겠는지를 문의하기도 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1897년 7월 30일 대원군은 뮈텔이 이질에 걸려 고생한다는 소식을 듣고 종현의 주교관을 찾아 직접 병문안하기도 했다.

1898년 1월 8일 밤 10시에 부대부인 민마리아는 하느님의 부름을 받았다. 뮈텔은 그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도 종부성사를 집전하고 그의 임종을 지키기 위해 운현궁에 찾아갈 수는 없었다. 그러나 민마리아가 사망한 이후 그의 영세입교 사실은 고종에게 전해졌고, 대원군도 알게 되었다.

개화기의 여성 초상화

우연한 기회에 경기도 박물관에 소장된 개화기의 여성 초상화를 접하게 되었다. 초상화에는 숙부인기계유씨진영 (淑夫人杞溪俞氏眞影) 47세상(四十七歲象)이라고 적혀있다. 필자와 성과 본관이 같아서 유심히 살펴보고 여러 가지 기록을 살펴보게 되었다.

유씨 할머니는 순흥안씨(順興安氏) 첨추공파(僉樞公派)의 봉상사 부제조(副提調)와 승정원 승지를 지내신 안필호(安弼濩, 1868년 – 1919년)라는 분과 결혼하셨던 것으로 조사되었다. 유씨 할머니는 기계유씨 진호(鎭浩)의 따님이므로 항렬로 따지자면 필자에게는 먼 친척 고모에 해당한다.

경기도 박물관에서는 이 초상화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안필호(安弼濩)의 한자가 安弼鎬로 적혀있지만 동일 인물이다.

기계 유씨의 47세 초상입니다. 그의 남편 안필호(安弼鎬)의 초상이 함께 전해집니다. 얼굴은 세밀하게 표현되었으나 대례복을 입은 신체의 표현은 다소 도식적입니다.

조선 시대 그려진 여성 초상화는 그 수가 매우 적습니다. 20세기에 들어 초상화 제작이 늘어나면서, 여성이 초상화의 제작도 조금씩 늘어나게 됩니다. 채용신과 같은 화가는 공방을 두고, 신문에 여성 초상화 제작을 공개적으로 주문받기도 했습니다. 이는 늘어난 수요와 변화한 인식을 반영한 것으로 보입니다. 일정한 복장을 정해 두고, 주문한 이의 사진에 따라 얼굴만 그려 제작하는 일도 잦았습니다.

경기도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숙부인기계유씨진영 (淑夫人杞溪俞氏眞影) 47세상(四十七歲象)

경기도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숙부인기계유씨진영 (淑夫人杞溪俞氏眞影) 47세상(四十七歲象)의 부분확대 사진 (생몰연대와 초상화에 기록된 나이로 보아 1913년에 제작된 것으로 판단된다.)

안필호의 초상화도 찾아보았다. 2022년 9월 8일에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526호로 지정된 안필호, 숙부인 장흥마씨 부부 초상 (安弼濩, 淑夫人 長興馬氏 夫婦 肖像)을 육군사관학교내의 육군박물관에 소장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육군박물관이 소개한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526호로 지정된 안필호, 숙부인 장흥마씨 부부 초상 (安弼濩, 淑夫人 長興馬氏 夫婦 肖像) 안필호 초상은 46세 때인 1913년에 그려졌고 숙부인 장흥마씨의 초상은 23세 때인 1912년에 그려진 그림이다. 장흥마씨는 초상화가 그려진 해인 1912년 6월 20일에 돌아가셨다.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 포털에는 초상화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정보가 제공되고 있다.

안필호, 숙부인 장흥마씨 부부 초상 (安弼濩, 淑夫人 長興馬氏 夫婦 肖像)

<안필호 초상>

초상화의 주인공은 호피를 덮은 의자에 앉아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군복을 착용하고 있는데, 머리에는 공작꼬리털이 달린 전립(戰笠)을 쓰고, 협수(挾袖) 위에 전복(戰服)을 입은 후, 가슴에는 전대(戰帶)를 매고 있는데, 모란장식이 있는 띠돈을 붙였다. 왼편 겨드랑이에 환도(還刀)를 차고 오른손으로는 지휘봉인 등채(藤策)를 쥐고 있다. 이러한 복식은 고종대에 이루어진 몇 차례의 의제개혁(衣制改革)의 변화양상을 보여준다.

얼굴, 의복, 장신구 등의 묘사는 매우 정교하며, 화려한 색채를 다양하게 구사했으며, 서양화법에 해당하는 명암법과 음영법을 적극적으로 사용함으로써 매우 실감나는 초상화가 되었다.

<숙부인 장흥마씨 초상>

초상화의 주인공은 등받이가 있는 나무 의자에 앉아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녹두색 저고리에 푸른 치마를 입고 있는데, 소매 밖으로 나온 두 손을 표현했으며 반지를 낀 왼손에는 끝이 살짝 말린 하얀 종이를 쥐고 있다. 가르마를 타고 쪽진 머리에는 흰 비녀를 꽂았는데 목 뒤로 살짝 보이는 비녀 양 끝에는 각각 “다자(多子)”와 “손(孫)”이라는 글씨가 있다. 푸른색과 노란색 글씨 표현으로 미루어 볼 때 칠보은비녀(七寶銀簪)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바닥에는 석류와 불수 무늬가 그려진 붉은 자리가 깔려있고 테두리는 옥색 천을 바느질로 마감한 것을 자세히 표현했다.

얼굴의 묘사는 매우 정교하며, 화려한 색채를 다양하게 구사했으며, 옷주름이 접히는 것을 표현할 때는 서양화법에 해당하는 명암법과 음영법을 적극적으로 사용함으로써 매우 실감나는 초상화가 되었다.

위 작품은 조선 중기 이후 거의 그려지지 않던 부부 초상화가 20세기 초에 다시 등장한 것을 알려주는 이른 사례에 해당하며, 당시 군복의 변화양상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중요한 초상화다. 이 시기 초상화가로서 이름이 높던 채용신이 그린 것으로 추정되며, 정교하고 화려하여 예술적 가치가 높은 작품이다. 특히 한 집안의 여러 대의 인물이 일괄로 그려진 드문 예에 속한다.

같은 그림 다른 시각

2012년 7월 22일 자 조선일보에 미술평론가 손철주 선생의 칼럼에 장흥 마씨의 초상화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렸다. 기사에 실린 초상화의 색상은 매우 밝게 조정되어 있어 다른 초상화가 아닐까 하는 정도로 다르게 보인다. 같은 초상화의 색상을 조정해서 소개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에는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만 이러한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앞으로는 작품을 소개할 때 세심한 주의가 필요해 보인다.

[손철주의 옛 그림 옛사람] [19] 스물세 살, 살림도 내조도 겪을 만큼 겪었소

'여인 초상'… 전(傳) 채용신 그림, 비단에 채색, 124 × 64cm, 1912년, 육군박물관 소장.

그림 오른쪽 귀퉁이에 적힌 작은 글씨로 보면, 스물세 살 먹은 여인의 초상이다. 신분도 곁에 씌어 있다. '숙부인(淑夫人) 장흥(長興) 마씨(馬氏)의 모습'이란다. 하지만 이 정도 귀띔으로는 그녀가 어느 벼슬자리에 있던 누구의 아내였는지, 알아내기 어렵다. 그린 이도 딱히 밝혀지지 않았다. 필치로 따져보건대 한말(韓末) 무관 출신인 극세필(極細筆) 화가 채용신의 작품과 매우 닮았다. 전문가들은 그의 작품으로 일컫기도 한다.

먼저 치마저고리를 입은 여인의 생김새를 보자. 반듯하게 가르마를 타서 곱게 빗질한 머리칼이 흐트러짐이 없다. 목덜미께 쪽찐 머리로 비녀를 얌전히 질렀다. 연두색 어룽진 저고리는 길고, 가슴에 여민 고름은 넓다. 넉넉하게 자줏빛 회장(回裝)을 두른 소매 사이로 속저고리가 살짝 보인다. 치마허리는 품 넓은 저고리에 가려졌고 가운데 치마끈은 무릎 아래로 늘어뜨렸다. 짙은 쪽빛 치마가 앉음새에 따라 주름지고 부풀었는데 서 있어도 신발을 가릴 만큼 길다. 연붉은색 자리에 불수감(佛手柑)처럼 끝이 갈라진 열매 무늬가 든 것도 이채롭다.

여인은 두 손을 무릎에 올리고 똑바로 앞을 본다. 치켜뜨지 않았는데도 눈매가 심상찮다. 다소곳하다기보다 언뜻 내주장(內主張)이 비친다. 몸가짐은 조신한데, 곧은 콧날과 다문 입술에서 풍기는 심지가 단단히 여물었다. 그녀 나이 스물세 살이라 했다. 옛적 그 나이 아내들은 벌써 남편 치다꺼리에 이골이 나고 살림살이에 능란했다. 무릎 위에 놓인 종잇조각은 뭘까. 한자가 적혔는데, 풀이하면 이렇다. '개국(開國) 499년 뒤인 경인년(1890) 음력 11월 28일 저녁 8시 무렵 태어나다.' 여인은 호패(號牌)가 없다. 대신 그녀는 생년일시만 적은 '주민등록증'을 제 손으로 만들어 꼭 쥐었다. 여인의 존재감이 불현듯 당당해졌다.

안필호 부부의 초상화가 이산가족이 된 사연

초상화 주인공인 안필호의 생애에 관한 정보를 추가로 조사해 보았다. 여러 가지 정보들을 확인할 수 있었지만, 순흥안씨(順興安氏) 첨추공파(僉樞公派)에서 정리한 내용이 매우 유익했다. 일부를 발췌해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필호(弼濩) 공은 고종 5년 무진(서기 1868년 7월 6일생)년에 태어나시었다. 성장하면서 면암 최익현 선생 문하에서 부지런히 공부하여 계사년 문과에 급제하시여 벼슬길에 나가니, 종사랑하고 경자년에 시서랑이 되고 전보하여 홍문관 시독을 하고, 고종 임금 러시아공사관에 피신하실 때 공이 왕을 모시고 호종하시다가 환궁하시었다. 임자년 통정대부 비서승에 오르시고 겸해서 장예원 장예(掌禮)를 하시고, 을사년에 봉상사 부제조(副提調)하고 승정원 승지에 오르시었다.

(중략)

이후 국토가 남북으로 분단하여 좌우 갈등 속에서도 조금도 흉사가 없었다. 1954년 갑오 12월 4일에 사망하시니 향년이 87이시었다. 묘소는 화성군 정남면 관항리 담안에 있다.

기계유씨 진호(鎭浩)의 따님이시고, 고종 정묘년 1867년 6월 17일에 출생하시었으며, 1943년 계미 정월 14일 돌아가시었다. 묘소는 정남면 관항리 담안 상봉산에 있다.

숙부인 나주라씨이시니, 1885 고종 을유 7월 20일생이시다. 두 아들을 낳으시니 병성(柄星), 병욱(柄旭)이라. 1922년 임술 3월 19일 졸하시니, 묘소는 정남면 오일리 산록에 있다.

(三配)는 숙부인 장흥마씨 행중의 따님으로, 1890년 고종 경인 11월 12일생이시고 1남 1녀를 낳으셨으며, 아들은 병두(柄斗)요 딸은 풍천 임원빈에게 출가하였다. 1912년 임자 6월 20일 졸하시었으며, 묘소는 정남면 보통리 장대 산봉산 경좌에 있다.

간단하게 요약하면 안필호공은 1868년 7월 6일에 태어나셔서 1954년 12월 4일에 87세에 타계하셨으며 세 번 결혼 하셨다. 한 살 연상이셨던 첫째 부인 기계유씨 할머니와의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고 할머니는 1943년 정월(음력 1월) 14일에 돌아가셨다. 둘째 부인은 17세 연하의 나주라씨로 두 아드님을 낳으시고 1922년에 37세로 돌아가셨다. 셋째 부인은 22세 연하인 장흥마씨로 1남 1녀를 낳으시고 1912년에 23세의 나이로 돌아가셨다. 첫째 부인이 가장 장수 하셨고 둘째, 셋째 부인은 모두 단명하셨다. 아마도 안필호공의 자녀들은 첫째 부인께서 돌보시지 않았을까 싶다. 안필호 선생, 기계유씨 부인, 장흥마씨 부인의 초상화가 그려진 시기는 대한제국이 멸망하고 한일병합 이후인 1912년과 1913년이다. 이 내용을 표로 정리하면 이해하기 쉽다. 상시의 시대적 배경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흥선대원군, 여흥부대부인 민씨, 고종, 민비의 생몰년도, 대한제국 선포, 한일병합, 해방, 한국전쟁 시기도 함께 표기했다.

세 초상화 중에서 가장 먼저 그려진 것은 셋째 부인인 장흥마씨가 23세 되던 해인 1912년에 그린 것이다. 장흥마씨는 같은 해 6얼 20일에 돌아가셨으니 돌아가시기 직전에 그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마도 지병이 있으셔서 초상화라도 남겨야 하겠다고 생각하신 것은 아닌가 싶다. 안필호 공과 첫째 부인 기계유씨의 초상화는 셋째 부인 사후인 1913년에 그려졌다. 그 때까지 군복이나 예복을 가지고 계셨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아마도 얼굴 모습만 그려 넣은 것이 아닌가 싶다. 여기에서 한 가지 의문이 드는 것은 둘째 부인인 나주라씨의 초상화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1913년에 생존하던 나주라씨의 초상화도 그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육군박물관에 안필호공과 장흥마씨의 초상화가 기증된 것은 장흥 마씨부인 소생의 자손들이 함께 보관하고 있다가 기증한 것이고 첫째 부인인 기계유씨 부인은 슬하에 자녀가 없었던 탓으로 따로 보관되다가 경기도 박물관에 기증된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1913년에 그려졌을 가능성이 있는 둘째 부인인 나주 라씨 부인의 초상도 어딘가에 남아있지 않을까 싶다.

1913년에 전통적인 예복으로 그린 안필호공과 기계유씨 부인의 초상화가 더 비슷하게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같은 화가가 그린 것은 아닐까? 이번 기회에 소장처는 서로 다르지만 초상화 이산가족 문제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안필호공 부부의 초상화가 그려진 시기와 미스터리 (나이는 만 나이와 한국식 나이가 혼용되고 있어 1살에서 2살 정도의 차이가 잇을 수 있다.)

미술평론가 손철주 선생의 칼럼에 장흥마씨의 초상화에 적혀있는 손에 쥐고 있는 사주에 해당하는 생년월일시를 소개하고 있다. '개국(開國) 499년 뒤인 경인년(1890) 음력 11월 28일 저녁 8시 무렵 태어나다.' 순흥안씨(順興安氏) 첨추공파(僉樞公派)의 기록에 의하면 장흥마씨는 1890년 11월 12일에 태어나신 것으로 되어 있다. 두 기록 모두 기록이지만 어느 것이 사실(史實)일까? 이러한 문제는 늘상 있는 일이다. 태어난 본인도 알지 못한다. 태어날 때는 시간을 의식하지 못하고 철이 들 무렵에 누군가를 통해서 듣게 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역사 연구는 사실이든 사실이 아니든 운 좋게 살아남은 극히 제한적인 정보를 바탕으로 침소봉대하는 작업과 같다. 뼈의 흔적만 남은 동물 화석 조각으로 상상의 동물을 만들어 내는 과정으로 비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많은 조각을 찾아내고 다양한 각도에서 검토하게 되면 실체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므로 노력한 만큼 알게 되는 기쁨도 있다. 본 칼럼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이전보다는 조금 명확한 민비(명성황후)의 모습을 그릴 수 있게 되길 바란다.

<유우식 문화유산회복재단 학술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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