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우식 칼럼] 민비 (명성황후) 사진 진위 논란과 검토 (7)

모든 사진은 사실무근일까? 사실무근이라는 말이 사실무근일까?

편집국 승인 2023.11.16 05:09 의견 0

1894년 9월 10일 일본 동경 신양당(信陽堂)에서 석판화로 인쇄하고 10월 10일 발행한 ‘조선국귀현초상(朝鮮國貴顯肖像)’ (55cm x 40.4cm) 왼쪽부터 왕비 민씨(王妃閔氏), 가운데 조선국왕(朝鮮國王), 오른쪽에 대원군(大院君)이라 적혀있다.

가장 이른 시기에 출판된 민비 초상화 (1894년)

현재까지 발견된 민비의 초상화 또는 사진이 소개된 출판물은 1894년 9월 10일에 일본 동경 신양당(信陽堂)에서 석판화로 인쇄된 ‘조선국귀현초상(朝鮮國貴顯肖像)’이라는 제목이 달린 한 장짜리 화보이다. 송광호 재외동포신문방송 편집인협회 前 대표가 2006년 여름 캐나다 토론토에서 한 중국인으로부터 입수한 일본 발행 왕비 민씨(王妃閔氏)라는 설명이 달린 초상화이다. 왕비 민씨 초상화를 출판한 회사는 오카무라 마사코(岡村政子, 1858년 - 1936년)가 남편인 오카무라 타케시로(岡村竹四郎, 1861년 – 사망년도 미상)와 공동으로 설립하여 운영하던 신양당(信陽堂, しんようどう)이고, 인쇄화의 작가겸 발행자는 東京京橋區北町拾貳番地 太刀川吉次郞로 적혀있다고 한다. 인쇄소는 印刷所 東京麴町區有樂町三町目 信陽堂이라고 적혀있다. 신양당은 1923년에 발생한 관동 대지진으로 사옥이 불에 타서 인쇄업을 접게 되었다.

오카무라 마사코는 당시 일본에서 최고의 석판화가로 메이지 24년(메이지 24년, 1991년)에는 메이지 천황과 황후의 초상화를 제작하고 헌납하여 신양당이 일본 정부로부터 일본 황실 초상화를 보급할 수 있는 허가를 받게 되었다. 민비 초상화를 출판하기 3년 전의 일이다.

민비의 사진이 담긴 한 장의 종이에 석판화로 조선 왕실의 3인(조선국왕, 왕비민씨, 대원군)을 인쇄했는데 민비가 시해되기 1년 전인 1894년 10월이다. 일본 황실 초상화의 출판을 허가받은 출판사가 상상으로 그리거나 조작해서 출판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적어도 고종과 대원군의 초상은 사진과 매우 흡사하다. 민비 초상을 석판화로 그리게 된 근거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초상화와 너무나도 닮은 사진

큰 떠구지 머리와 쌍 비녀를 한 모습이 닮았다. 마치 두 그림을 놓고 가른 곳을 찾게 하는 게임을 하는 듯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가슴에 두른 천의 밝기가 다르다. 초상화에서는 어두운색으로 표시되었고 사진에서는 밝은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마치 광화문 현판의 바탕색과 글자 색을 놓고 논란이 일었던 문제와 흡사하다. 초상화에서 민비에 해당하는 부분만 분리해서 사진과의 얼굴 크기가 같도록 맞춰 보면 초상화의 원화가 사진인지 아닌지는 판정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 잡지 DEMORIST’S FAMILY MAGAZINE 1894년 11월호의 ‘조선의 왕비’기사 본문에 실린 문제의 사진. The Queen of Korea’s Chief Lady in Waiting (대기 중인 조선 왕비의 최고상궁)이라는 설명이 붙어있다.

초상화와 사진의 얼굴 크기를 맞춰서 비교한 경우(왼쪽)와 떠구지의 크기에 맞춰서 비교한 경우 (오른쪽)

초상화와 사진의 얼굴 크기를 맞춰서 사진 위에 겹쳐서 비교한 경우(왼쪽)와 떠구지의 크기에 맞춰서 사진 위에 겹쳐서 비교한 경우 (오른쪽)

초상화와 사진의 얼굴 크기가 같게 조정하면 초상화의 떠구지가 26% 작고 떠구지의 크기를 같게 하면 초상화의 얼굴이 26% 커진다. 얼굴은 완벽하게 일치한다. 따라서 사진에서 초상화로 옮길 때 기계적으로 옮긴 것이 아니라 떠구지 부분만 약 26% 작게 축소해서 얼굴이 크게 나타나도록 그린 것으로 보인다. 떠구지의 크기에 맞춰서 초상화의 상반신 크기를 조정해서 겹쳐보면 허리 부분 띠의 위치가 내려오게 된다. 얼굴 크기가 너무 커져서 전체적인 균형도 깨진다.

비슷한 두 장의 사진 중에서 원본 찾기

지금은 디지털 이미지 기술을 사용해서 이미지의 편집이 수월하게 되었지만 예전에는 사진을 촬영하고 현상한 유리 건판이나 필름에 빛을 투과시켜 인화지에 노광하고 사진을 현상해야 했다. 매우 불편한 작업이기는 하지만 숙련된 기술자에게는 자신의 기술을 뽐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필자도 공학분야에서는 나름 자신만의 비법을 뽐내던 기술자였기 때문에 그 기분과 희열은 쉽게 상상할 수 있고 공감도 할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한가지 달라지지 않은 것이 있다면 사람들의 사고방식이다. 단순한 배경의 사진 촬영은 보기에는 좋지만 쉽게 싫증이 나기도 한다. 때로는 변화를 주고 싶지만 사진의 모델을 쉽게 구하지 못할 경우에는 어떤 방법이 있을까?

촬영해 두었던 사진의 원판과 배경이 될 사진의 원판을 사용해서 사진을 합성하면 전혀 다른 느낌의 사진이 완성된다. 130년전의 사진 기술자들도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사진을 인화하려면 인화지에 빛을 쪼여야 하는데 배경 사진에 인화하기 전에 미리 빛을 차단할 인물 모양으로 템플레이트를 만들어 인화지 위에 놓고 원하는 부분만 노광하고 템플레이트를 제거하고 인물 부분을 노광해서 인화하는 방법을 사용했을 수 있다. 더 간단한 방법은 인물 사진만 정교하게 오려서 배경 사진 위에 놓고 다시 촬영하는 방법이다. 필자가 대학원에서 반도체 재료연구를 하면서 폴라로이드 사진을 필름에 옮기는 작업에도 종종 사용되던 방법이다. 1990년대에 만해도 국제회의에서 멋진 발표를 하기 위해서는 슬라이드용 포지티브 컬러 필름에 발표 자료를 사진으로 촬영해서 발표했다. 디지털 기술에 익숙해진 이들에게는 생소하게 느껴지겠지만 생각보다 쉽다. 지금의 최첨단 반도체기술은 사진기술이다. 반도체 소자 설계라는 표현을 쓰지만 사실은 사진용 원판에 어떤 내용을 작게 흠집 없이 그려낼까 하는 작업이다. 사진 기술 없이 반도체 기술은 성립하지 않는다.

의자에 앉아있는 사람과 기생의 옷장으로 소개된 사진을 사용해서 배경을 바꾸고 비교 대상 이미지와 같은 구도로 잘라 보았다. 기생의 옷장 사진 바닥의 돗자리에 사람 몸무게의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이집트의 피라미드가 실물로 많이 남아있지만 지금도 어떻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감탄하거나 상상하거나 하는 것밖에 없다. 우리가 4천 년에서 5천 년 전에 만들어진 피라미드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그들은 만들어 냈다. 우리나라에도 청동기시대에 만드러진 것으로 알려진 고인돌이 2만기 이상 발견되어 보고되고 있다. 그 무거운 돌은 어떻게 구하고, 이동하고, 쌓았는지 그리고 왜 만들었는지 모른다.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다. 현대인이 더 똑똑하고 현명하다고 할 수 있을까?

까를로 로제티(Carlo Rossetti)가 1904년에 저술한 꼬레아 꼬레아니(Corea e coreani, 조선과 조선인)라는 책 1권의 99쪽에 소개된 기생의 옷장 (LA GUARDAROBA DI UNA GHI-SANG) 사진을 배경으로한 사진에서 인물 부분만 추출하여 채색한 후에 구도에 맞춰 합성한 사진.

떠구지 논란

논란의 사진에서 머리 모양에도 여러 가지 다른 의견들이 있다. 특별한 의식때 비, 빈, 공주, 옹주, 당상관 이상 고급 관료의 부인, 지밀상궁들만이 할 수 있는 어여머리라고 하는 의견도 있고 주로 나인(궁녀)들이 하던 나무 가발을 사용한 큰머리라는 큰머리라고 보는 전문가들은 왕비로 볼 수 없는 이유로 들고 있다. 그러나 복식사학자이며 민속학자인 고 석주선(石宙善, 1911년 - 1996년)박사의 '한국복식사'에 의하면 어여머리로 보는 것이 맞다는 견해도 있다.

큰머리는 의식이나 혼인 때 하는 머리 모양으로 신분에 따라 크기에 차이는 있으나 신분이 낮은 사람들도 혼인 때는 큰머리를 했다고 한다. 어여머리는 본래 긴 머리카락을 땋아서 만든 머리 모양이었으나 조선 후기 '가체 금지령(加髢 禁止令)'이 내려진 이후에는 오동나무로 만들어진 떠구지를 사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나무로 만든 가발을 썼기 때문에 왕비가 아니라 나인이라는 견해는 잘못된 것 이라고 한다. 실제로 고종의 후궁 복녕당(福寧堂) 귀인 양씨(貴人 梁氏, 1882년 – 1929년, 덕혜옹주의 생모)의 실제 모습을 촬영한 것으로 대례복(원삼)에 어여머리를 하고있다. 옷은 거의 같은 모양이고 떠구지의 크기에만 차이가 있다. 후궁과 제조상궁은 비녀를 하나만 사용하지만 왕비의 떠구지는 비녀를 둘 사용한다. 대원군의 사저였던 운현궁 전시실에도 비녀를 두 개 사용하는 떠구지의 모형과 떠구지를 착용한 민비의 마네킹이 전시되어 있다.

고종의 후궁인 복녕당 귀인 양씨(1882년 – 1929년, 덕혜옹주의 생모)의 실제 모습으로 비녀가 하나인 떠구지를 하고 있다.

운현궁에 전시된 민비, 상궁, 떠구지 착용 예를 알 수 있는 복식과 머리 모양

일본 공사 이노우에 카오루(井上馨)의 고종과 민비 알현 장면 스케치

일본 동경 동양당(東陽堂, とうようどう)에서 1895년 1월 25일에 발간된 풍속화보(風俗画報, ふうぞくがほう) 제84호에 王並に王妃我公使の忠言に感じて始めて改革の端を開く圖(왕과 왕비가 공사의 충언에 감동하여 개혁의 발판을 마련하는 그림)라는 제목의 그림이 실렸다. 같은 그림이 1905년 4월 8일자 프랑스의 La Vie Illustrée (1898년 – 1911년)에 실리게 되는데 그 기사에서는 제목이 다음과 같이 바뀌었다. L’OCCUPATION DE LA CORÉE PAR LES JAPONAIS (일본의 한국 점령)라는 제목과 LE MINISTRE DE JAPON A SEOUL IMPOSANT LE PROTECTORAT A L’EMPEREUR ET A L’IMPERATRICE DE CORÉE (황제와 황후에게 보호조약을 당당하게 요구하는 서울 주재 일본 공사)라는 설명을 하단에 붙였다. 같은 그림을 10년 후에 재활용하면서 설명이 달라졌다. 무슨 일일까? 본인이 직접 보고 들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부정확하고 본인의 생각에 따라서 해석이 달라지는 것은 늘 있는 일이니 크게 놀랄일도 아니다. 오늘날에도 취재원의 신뢰도나 증언의 신빙성보다도 관심을 끌 수 있는 기사를 많이 만들어 내려는 것과 비슷한 심리가 아니었을까 싶다. 다만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믿을 수 있는 정보를 최대한 많이 수집해서 종합적인 판단을 하는 것이다.

이노우에 가오루 (井上馨, 1836년 – 1915년)가 고종을 알현한 기록을 고종실록에서 찾아보았다. 고종실록 제32권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고종 31년 (1894년 조선 개국(開國) 503년 10월 23일 병인)의 첫 번째 기사이다.

(고종이) 함화당(咸和堂)에 나아가 각 아문(衙門)의 대신(大臣)들을 불러 보았고, 이어 일본 공사(日本公使)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를 접견하였다. 청대(請對)와 폐견(陛見)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에 일본 공사가 개혁안 20개 조목을 제출하였다. 이하 생략. (원문: 二十三日。 御咸和堂, 召見各衙門大臣, 仍接見日本國公使井上馨。 請對及陛見也。 【此時日本公使進呈, 革新案二十條: 이하 생략.) 민비가 동석했는지는 알 수 없다.

이 삽화에 민비의 모습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머리 모양도 떠구지를 하고 있다. 그림을 그린 사람의 이름도 적혀있으나 여러 가지 정황상 실제로 보고 그린 것은 아닌 것 같다. 풍속화보라는 잡지의 이름이 암시하는 것처럼 당시의 소문 등 이야깃거리를 소개하는 정도로 크게 신뢰할 수 있는 내용은 아닌 것 같다. 실제로 풍속화보 제84호는 임시 증간호로 기획된 것으로 청나라 정벌 그림 제5편으로 홍보하고 있었다. 해당 호에 실린 기사를 보면 1884년 12월 4일에 발생한 갑신정변때 조선에 있던 타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 1842년 – 1917년) 일본 공사가 공사관 깃발을 내리고 인천으로 도망가는 장면, 청파동에서 타살된 이소바야시 신조(磯林眞三) 대위 이야기, 조선어를 배우기 위해서 조선에 왔던 학생의 죽음, 일본 부녀자가 조선인으로 위장해서 탈출하는 이야기, 일본인들이 인천으로 피난 가다가 청나라 군대에 포격을 당하는 장면 등이 기술되어 있는 목적이 뚜렸한 기획된 잡지이다. 서문에는 일본 망명 중인 박영효(朴泳孝, 1861년 – 1939년)와 일본에 망명하다가 중국으로 건너가서 1894년 3월 28일에 홍종우(洪鍾宇, 1850년 – 1913년)에게 상하이(上海)에서 10개월 전에 암살당한 김옥균(金玉均, 1851~1894)도 등장한다. 임시 증간호로 청나라와 싸우면서 도망 나오는 장면 등을 상상력을 동원하여 자극적으로 무용담으로 소개하기 위하여 기획한 성격이 강한듯하다.

1894년 10월 23일 일본 공사 이노우에 카오루(井上馨, 1836년 – 1915년)가 고종과 민비를 면담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 (왼쪽)과 그 삽화를 1905년 4월에 프랑스 잡지 La Vie Illustrée에서 게재한 것 (오른쪽).

1895년 1월 25일자로 발행된 풍속화보에서 사용된 삽화를 바탕으로 다시 그려서 1905년 프랑스 잡지에 실린 삽화 위에 고종, 민비, 민비의 머리 모양, 이노우에 가오루의 모습을 비교하기 쉽게 합성해 보았다. 1894년 10월에는 민비의 초상화가 동경 신양당에서 조선국귀현초상으로 나와 있었으므로 그것을 참고해서 그렸을 개연성이 높아 보인다. 떠구지의 모양이 삽화에서도 확인된다. 고종의 모습은 비슷해 보인다. 이노우에 가오루의 뒷모습도 매우 현실적으로 느껴지도록 그려진 것 같다. 미국인 퍼시벌 로웰(Percival Lawrence Lowell, 1855년 – 1916년)이 윤치호(尹致昊, 1865년 – 1945년)의 소개로 창덕궁에 들어가 농수정 장대석 앞에 서서 촬영한 사진과 분위기가 비슷하다.

1895년 1월에 발행된 풍속화보에서 사용된 삽화의 재활용판인 1905년 프랑스 잡지에 실린 삽화 위에 고종, 민비, 이노우에 가오루의 모습을 비교하기 쉽게 합성한 것

이상에서 열거한 예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아무리 간단하게 보이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완벽한 답을 얻기란 쉽지 않다. 사진을 찍은 사람도, 찍힌 사람도, 그들을 본 사람도 이미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니다. 어떤 결론을 내더라도 그것이 정답인지는 영원히 알 수 없다. 다만 추가적인 자료와 종합적인 고찰을 통해서 가장 합리적인 결론을 도출할 수 있도록 노력할 뿐이다. 앞으로 3회의 칼럼을 통해서 지금보다는 좀 더 합리적인 결론을 얻게 되기를 기대한다.

<유우식 문화유산회복재단 학술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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