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통해서 본 고구려 미학의 탐구

윤명철 논설위원 승인 2024.04.29 11:40 의견 0

글을 쓰다가 우연히 2014년에 쓴 논문을 보았습니다. 미술문화연구에 실린것인데 역사학자가 전개하는 고구려 미학입니다. 전공자들이 보기에 문제가 있겠지만 역사적인 접근도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역사를 통해서본 고구려 미학의 탐구

(미술문화연구) 제3호, pp.1-20

서울, 동서미술문화학회 발의, 2014. 5

윤 명 철*

Ⅰ. 서론

Ⅱ. 고구려 문화예술 생성과 자연환경

Ⅲ. 고구려 문화예술 생성의 역사적 배경

Ⅳ. 고구려 문화 예술에 표현된 미

Ⅴ. 결론

국문초록

문화와 미는 관념이 아니라 민족력, 국가력과 함수관계에 있는 현실적인 ‘文化力(culture power)’이다. 자주적인 역사발전이 오랫동안 저해 당해왔고, 영토의 많은 부분을 잃어버렸으며, 외부문화를 비자발적으로 수용했고, 외부문화에 수동적으로 편입되었다. 그 때문에 자기문화에 대한 자의식이 약할 뿐만 아니라 (identity)에 대해서도 자신감을 갖지 못했다. 따라서 정체성이 왜곡되고, 사실이 은폐되고 단절된 우리문화를 규명하고 이해하는 데 예술의 역할이 크다. 우리 예술과 美에 대하여 통념과 왜곡이 적지 않았다. 특히 본고에서 주제로 삼는 고구려의 미 또는 미학은 말살되거나 왜곡되었다.

본 연구는 첫째, 우리 美의 본질과 특성은 무엇인 가? 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질문한다. 둘째, 한국미의 중요한 부분이며, 의미를 지닌 ‘高句麗 美’가 생성된 배경을 이해하다. 그를 위해 자연환경과 고조선 계승성 등 歷史的 환경을 살펴본다. 셋째, 고구려의 미는 무엇인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전성기의 고구려는 하나의 국가영토 안에 색다른 자연환경, 이질적인 문화가 공존하면서 복합적인 역사공간으로 탈바꿈했다. 하지만 하나가 잘게 쪼개져 흩어진 다양성이나 이질집합체가 아니라 여럿이 모여 다름을 유지하면서 하나로 모이는 다양성을 지닌 다문화국가 다문화체제가 되었다. 또한 독특한 성격을 창조한 후에는 주변지역으로 전파하는 배급처 역할을 하는 ‘혼합문명’의 성격을 지닌 국가였다.

‘고구려미’를 몇 가지 단어로 정의한다. ‘자의식과 자유의지‘’다양성과 고유성‘’동중중‘ 至美와 소박’ ‘상생과 조화’‘ 합리와 서정’이다. 이러한 고구려 문화와 미를 통해서 우리역사와 문화예술을 총체적 전일적 통일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고구려가 멸망하면서 문화 예술에 변질이 생겼다. 만주 지역의 자연환경과 종족 생활 등 인문환경을 상실하면서 북방문화와 연결된 문화와 예술의 내용과 형식들이 불완전하게 계승되었다. 또한 군사정치적인 패배로 인하여 정체성에 균열이 생기고, 자의식이 약화되었다. 따라서 고구려의 미는 발해와 신라가 계승하였지만,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Ⅰ. 서론

인간은 생물학적 경험들과 문화적인 경험, 역사적 경험 등을 넓은 범위에서 공유하면서 맥락관계로 모여 전체를 생성하는 有機體이다. 따라서 인간은 생물학적 정체성, 자연적 정체성, 문화적 정체성, 그리고 역사적 정체성을 동시에 추구하는 존재이다. 문화는 관념이 아니라 민족력, 국가력과 함수관계에 있는 현실적인 ‘文化力(culture power)’으로 변화되고 있다. 우리문화에서 생존의 문제와 직결되는 것은 우리자신, 민족 자신에 대한 문제이다. 자주적인 역사발전이 오랫동안 저해 당해왔고, 영토의 많은 부분을 잃어버렸으며, 외부문화를 비자발적으로 수용했고, 외부문화에 수동적으로 편입되었다. 그 때문에 자기문화에 대한 자의식이 약할 뿐만 아니라 正體性(identity)에 대해서도 자신감을 갖지 못했다. 따라서 정체성이 왜곡되고, 사실이 은폐되고 단절된 우리문화를 규명하고 이해하는 데 예술의 역할이 크다.

우리 예술과 美에 대하여 통념과 왜곡이 적지 않았다. 특히 본고에서 주제로 삼는 고구려의 미 또는 미학은 말살되거나 왜곡되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소위 삼국통일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으로 인하여 신라중심사관이 자리 잡은 탓이다. 둘째,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다양한 대륙문화가 불충분하게 계승되었다. 셋째, 발해가 멸망한 이후에 만주지역의 자연환경을 경험할 기회를 상실했다. 넷째, 유학 성리학을 비롯하여 중국 일본 서구에서 수용된 미개념의 영향과 정치적인 의도로 왜곡됐다. 특히 근대에 들어서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등의 일본인들이 끼친 영향은 매우 크다.

본 연구는 몇 가지 목적을 갖고 시도되었다. 첫째, 우리 美의 본질과 특성은 무엇인가? 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질문한다. 둘째, 우리 미의 중요한 부분이며, 각별한 의미를 지닌 ‘高句麗 美’가 생성된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 자연환경과 原朝鮮 계승성 등 人文 歷史的 환경을 살펴본다. 셋째, 고구려의 미는 무엇인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하지만 첫째 목적인 우리 미의 본질 및 미의식의 구체성에 대해서는 능력의 부족과 함께 본고의 형식적인 한계로 인하여 추후에 언급한다. 또한 본고는 춤, 음악, 그림, 유적, 유물, 공예품, 고분, 건축물 등 문화 또는 예술과 직접 관련 있는 소재들을 분석하는 방식을 피한다. 역사적 환경 속에서 행위와 창작의 근거가 되는 美논리를 모색하고 설정한 다음에, 그 틀에 맞춰 관련 증거들을 살펴보는 연역적 방법을 택한다. 그러므로 역사성을 강하게 반영한 몇 개의 지표문화를 대상으로 삼는다.

Ⅱ 고구려 문화예술 생성과 자연환경

Ⅴ. 맺음말

앞에서 언급한 대로 미의 정의는 시대와 공간 상황 집단과 인간에 따라 다르다. 또한 정의하는 방식도 다양하다. 본고는 고구려라는 특정한 시대를 구체적이고 심층적으로 이해할 목적으로 예술과 미를 살펴본 것이다. 즉 순수예술적인 관점이 아닌 역사적인 관점에서 논리와 의미를 파악하는데 비중을 두었다. 高句麗美’가 생성된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 자연환경과 原朝鮮 계승성 등 人文 歷史的 환경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역사성을 강하게 반영한 몇 개의 지표문화를 대상으로 삼았다. 전성기의 고구려는 하나의 국가영토 안에 색다른 자연환경, 이질적인 문화가 공존하면서 복합적인 역사공간으로 탈바꿈했다. 하지만 하나가 잘게 쪼개져 흩어진 다양성이나 이질집합체가 아니라 여럿이 모여 다름을 유지하면서 하나로 모이는 다양성을 지닌 다문화국가 다문화체제가 되었다. 터와 구성핵들이 전체와 부분으로서 유기적인 연결을 맺고, 여러 종류의 문화를 한군데로 섞어서 독특한 성격을 창조한 이후에는 주변지역으로 전파하는 배급처 역할을 하는 ‘혼합문명’의 성격을 지닌 국가였다. 고구려인들이 창조한 문화예술은 원조선을 모델로 삼아 재현하는 것으로서 왜곡됐던 정체성을 회복하고, 사물과 사건과 세계는 궁극적으로 조화를 지향한다는 세계관을 표현하고 있다. 상생과 부분적인 자기희생, 하나의 지향성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문화와 미는 한 집단이 지닌 정체성이 압축적으로 표현된 것이다. 본고는 高句麗美를 몇 가지 단어로 정의하고자 한다. ‘자의식과 자유의지‘’다양성과 고유성‘’동중중‘ 지미와 소박’ ‘상생과 조화’, ‘ 합리와 서정’이다. 이러한 고구려 문화와 미를 통해서 우리역사와 문화예술을 총체적 전일적 통일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고구려가 멸망하면서 문화 예술에 변질이 생겼다. 만주 지역의 자연환경과 종족 생활 등 인문환경을 상실하면서 북방문화와 연결된 문화와 예술의 내용과 형식들이 불완전하게 계승되었다. 또한 군사정치적인 패배로 인하여 정체성에 균열이 생기고, 자의식이 약화되었다. 따라서 고구려의 미는 발해와 신라가 계승하였지만,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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