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천하, 광개토태왕의 정복전쟁

윤명철 논설위원 승인 2024.04.29 11:41 의견 0

고구려의 천하, 광개토대왕의 정복전쟁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 우즈베키스탄 국립사마르칸트 대학교 교수)

1. 들어가는 말

역사학은 미래학이다. 필자는 1990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역사학은 사실을 고증하고, 내용과 본질이 무엇인가를 추구하는 학문이다. 그러나 그것을 넘어 문제가 무엇이고, 왜 그렇게 되었는가를 아는 것도 중요하고, 궁극적으로는 어떻게(how)라는 해결방법론을 추구하고, 제시하는 것이다.’ 라고 서술하였다. 특히 역사의 흐름이 일상성을 벗어나고, 특히 한 집단의 위기의식이 심각해지고, 집단의 생명이 위협받을 때나, 시대 혹은 공간이 극적으로 전환하는 시기에는 역사학에서 ‘어떻게(how)’의 비중이 더욱 커지고 절실해진다.

지나간 길고긴 인류역사를 돌아볼 때, 어느 시대보다도 큰 격변기임에 틀림없다. 21세기라는 대폭풍이 우리라는 바다에 엄청난 대 변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특히 유라시아에서는 기존의 강대국 들 간에 새로운 파워게임이 발생하고 있다. 즉 ‘신거대게임(new great game)’이 일어나고 있다. 동아시아적으로는 실질적인 힘의 변동이 생기고, 조절의 진통이 예상되며, 협력체의 모색이라는 주제에 현실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그러한 과정 가운데에서 한 중 일 삼국은 신민족주의 시대라고 할 만큼 갈등을 벌이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민족 내적으로는 통일의 실현과 주체적인 역사운용의 계기를 잡을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국제질서의 변화, 동아질서의 재편, 민족내부가 극적으로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 한 발자욱도 비켜갈 수 없는 운명이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많은 일 가운데 하나는 위기를 극복하고 성장할 수 있는 해결모델 혹은 발전모델들을 많이 만들어내야 한다. 그런데 고구려의 역사과정과 광개토태왕의 정책은 현재 우리가 당면한 문제점들을 해결하고, 성공할수 있는 지혜와 방법론을 모색하는데 유효성이 높은 모델이다.

2.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과 과제

1) 문명과 세계화의 문제

21세기는 인류가 가꾸어온 역사의 대지에서 가장 큰 격변기임에 틀림없다. 정보기술(IT) 생명공학기술(BT) 나노기술(NT) 등 놀랄 만한 과학의 발달로 인하여 전혀 다른 세상이 만들어지고 있다. 이제 인간이 인간을 만드는 시대에 돌입했고, 언제 기계가 인간을 만들어낼지 모르며, 머지않은 장래에 ET(외계생명체)의 존재가 확인될 것이라는 불안감을 느끼며 사는 시대에 들어섰다. 또한 환경의 오염과 생태계의 파괴 현상으로 인간뿐 아니라 지구 자체가 생명을 위협받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새로운 성격과 형태의 사상 종교 등 예측하지 못했던 신문명이 탄생할 것은 자명하다.

뿐만 아니라 국제질서라는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측면에서도 질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이제는 지구 전체가 곧 세계이다. 미국이라는 초강대국 중심의 ‘세계화(globalization)’와 중간단계로서 넓은 범주의 ‘지역화(regionalization)’가 추진되는 중이다. 유럽은 우여곡절과 미국의 방해 등등을 물리치고, 연방(EU)이 되어 대통령을 선출하고, 군사력을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그게 살길이기 때문이다. 곧 합중국(United Europe)이 탄생할 것이다. 결국은 미주지역과 유럽지역을 양대 축으로 삼고 기타 세계를 종속시키려는 기도가 19세기와는 또 다른 형태로 탐욕스럽게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나머지 유색인종들의 세계, 특히 동아시아와 우리는 어떻게 생존전략을 짜고 추진해야 할까?

2) 동아시아의 신질서와 갈등

넓은 의미에서 동아시아는 20세기 후반에 가장 화려하게 역동적으로 발전해 온 지역이다. 하지만 IMF사태를 통해서 절망적인 나락을 경험한 아시아인들은 아시아인의 진정한 자각과 동아시아의 협력이 절실함을 깨달았다. 운명의 갈림길에서 통일한국, 중국, 일본, 러시아 등 동아시아 각국은 이해가 잘 조정된 협력체 내지 공동체를 구성하는 일은 선택이 아닌 필연의 문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갈등과 영토분쟁이 더 심각해지고 있다.

중국은 1983년에 중국사회과학원 산하에 '중국변강사지연구중심'을 설립하였다. 그 후 2002년 3월에는 길림성 요녕성 흑룡강省 등 동북 3성과 합작으로 ‘동북변강력사여현상계렬연구공정’이라는 약칭 ‘동북공정’을 발족시켰다. 동북공정은 우리가 주목한 고대사 혹은 역사문제 뿐 만 아니라 현실의 문제이며 정치적인 목적이 있었다는 증거는 몇몇 과제의 명칭가운데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일본은 근대 이후로 지속적으로 자국 중심의 역사로 한민족의 역사를 왜곡해왔다. ‘내선일체론’ ‘동조동근론’ ‘일한일역론’을 비롯하여 각종 이론들이 있다. ‘식민사관’ ‘반도사관’ 등이 만든 ‘임나일본부설’‘타율성론’ ‘정체성론‘ ‘만선사관’ 등을 비롯한 각종 해석은 그 가운데 일부이다. 그 후 1982년에 이르러 소위 고등학교 역사교과서 왜곡사건을 일으켰고 독도영유권을 공식적으로 주장했다. 1986년에 「최신 일본사」를 집필하면서 또 다시 역사왜곡을 시도하였다. 2002년에는 󰡐새 역사를 만드는 모임󰡑이 결성되어 후쇼사(扶桑社)에서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데 영향을 끼쳤다.

한편 영토분쟁도 일어나고 있다. 한일 간에는 독도문제가 있다. 또한 한중 간에는 해결되지 못한 ‘間(墾)島문제’가 있다. 1909년 4월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 간도협약이 맺어졌고, 현재 동북공정의 5개의 연구방향 가운데 간도 문제는 동북 지방사 연구라는 항목 아래 2003년 중점 연구 방향으로 선정되어 있다. 최근에는 이어도(離於島) 문제까지 생기고 있다. 한편 中 日간에는 영토분쟁이 심각하다 일본명 센카쿠(尖角)열도(중국명 釣魚島)의 영토분쟁이다. 그 외에 일 러, 중 러 간에도 영토분쟁이 있다.

결과적으로 앞으로 전개되는 동아시아의 주도권을 놓고 한국은 뒤로 제쳐둔 채 중국, 일본, 미국이 노골적으로 갈등과 각축전을 벌이는 상황으로 변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 경제는 몇 년 새에 위축되고 허약해져 불안이 고조되는 상태이다. 세계경제 속에서, 동아시아 경제 속에서, 그리고 민족경제 속에서 가장 효율적인 경제전략을 짜고, 집행하기가 매우 복잡하고 어려운 시기이다.

3) 민족통일의 문제

통일을 위해서는 오랜 역사, 강력한 국가를 경영해 본 경험과 능력을 갖춘 전통적인 동아시아는 세계라는 큰 틀 속에서 두 가지 숙제를 동시에 해결해야 한다. 즉, 하나는 우선 미국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몇몇 블록들과 치열하게 경쟁하고, 다른 하나는 앞으로 협력하거나 통합을 이루어야할 할 동남아 지역과 중간과정으로서 경제공동체와 정치공동체를 모색해야만 한다. 하지만 경제, 정치, 군사력을 볼 때 우리의 힘이 주변강국들에 비해 열세를 면할 가능성은 별로 없는, 지극히 회의적인 처지이다. 국제적으로는 일본과 중국이라는 두 마리 고래 사이에 끼인 새우처럼 때로는 방관자처럼 바라보다가 한마디씩 거들기도 하면서 자기체면을 유지하려 하거나, 우발적으로 감정적으로 발언을 해보지만, 때로는 그마저도 무시당할 뿐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남북통일이 불투명하며, 주변국들의 방해로 인하여 민족력(民族力)의 결집 또한 매우 어렵다.

안으로도 해결이 쉽지 않은 복잡한 문제들이 산적해 있다. 감성적으로는 민족통일을 지향하지만 남북 간에는 반세기 동안 쌓여온 갈등들을 아직도 말끔하게 해소하지 못했다. 거기다가 중요한 축인 북한은 경제적으로도 터무니없이 취약하지만 체제 자체가 허약해서 언제 붕괴될지 예측불허의 상태에 있다. 북한에 갑작스럽게 유고가 발생한다면 중국이 어떠한 입장을 지니고 어떤 행동을 취할지에 대해서 속셈을 파악하고, 미리미리 대비해야 하는 현실이다. 과연 지향해 온 통일을 잘 이룰 수 있을지, 아니면 또 다른 형태로 재분단될지, 혹은 중국의 신경제권 속에 편입되어 예속되지는 않을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천운이지만 통일한국은 지정학적으로 두 강대국의 갈등과 충돌의 개연성이 많은 신질서의 편성 과정에서 중간역할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사이에 낀 강소국(强小國)으로서 매개자 겸 조정자의 역할을 할 수 있고, 무엇보다도 자연환경이 그러한 역할에 힘을 실어준다.

이렇게 문명사적(패러다임의 변화), 지구사적(생태계), 세계사적(역사), 그리고 동아시아적(지역)으로 한꺼번에 변동과 재생의 와중에 내동댕이쳐졌다. 설상가상으로 내부의 붕괴로 말미암아 혼돈chaos의 판(field)에서 우왕좌왕하고 있다. 어떻게 하면 태풍처럼, 해일처럼, 화산 폭발처럼 닥쳐온 민족사 최대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까?

우리가 할 수 있는 많은 일 가운데 하나. 그것은 변화무쌍하고 냉정한 세계질서와 문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어떻게 변화할까 하는 예상 시나리오를 다양하게 써야 하고, 그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해결모델 혹은 발전모델들을 각 분야별로 되도록 많이 만들어내야 한다. 그런데 불가사의하게도 우리의 역사에서 그 모델로 삼을 만한 사건이나 인물을 찾기가 쉽지 않다. 이는 누군가가 고의로 말살하거나 왜곡하였기 때문이다. 잊혀진 사건, 잃어버린 존재의 신원을 복원해서 의미를 부여하고, 우리의 발전모델로 환생시킬 필요가 있다. 고구려의 역사과정은 현재 우리가 당면한 다양한 문제를 극복하는 지혜와 방법론을 모색하는데 유효성이 높은 모델이다. 그리고 그 모델을 실현 시킨 인물이 광개토태왕과 장수태왕이다.

3. 한민족의 역할론과 동아지중해 중핵모델

1) 유라시아 세계의 이해

우리 문화와 역사와 정체성을 이해하려면 반도적인 인식과 연구방법론을 넘머 동아시아, 범아시아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유라시아로 확장해야 한다. 우리는 남만주와 한반도를 원핵으로 삼아 유라시아 문명권에 존재한 8개+@의 길(road)을 통해서 교류되는 과정에서 생성되었다. 이러한 유라시아의 부분이면서 넓은 의미의 동아시아는 지리와 지형 기후 등의 자연환경과 미래 등을 고려할 때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동북아시아로 유형화시키고 있다. 그리고 해양과 연관해서는 후술할 ‘ 동아지중해’ ‘동남아지중해’, ‘동북아지중해(오호츠크해<Sea of Ockhosk>)’로 구성되었다. 동아시아라는 역사와 문명의 ‘터’는 일민족사적인 관점, 일지역적인 관점을 포함하면서 더 거시적이고 확장된 문명사적인 관점에서 성격과 역할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필자는 동아지중해 모델을 설정하고, 이 것을 활용하여 국가발전에 성장한 나라와 인물을 고구려와 광개토태왕이라고 본다, 광개토태왕의 정복전쟁을 국제질서의 재편 , 즉 동아지중해 중핵조정역할이라고 해석한 것이다.

2) 동아지중해 모델의 이해

그림 동아지중해 범위도

동아시아는 아시아 대륙의 동쪽 하단부에 자리하면서 중국이 있는 대륙, 북방으로 연결되는 대륙의 일부와 한반도, 일본열도로 이루어져 있다. 한반도를 중심핵(core)으로 하면서 한반도와 일본열도 사이에는 광대한 넓이의 동해와 비교적 폭이 좁고, 넓지 않은 남해가 있고, 중국과 한반도 사이에는 황해라는 내해(inland-sea)가 있다. 그리고 한반도의 남부(제주도 포함)와 일본열도의 서부(큐슈지역), 그리고 중국의 남부지역(양자강 이남에서 복건성 지역을 통상 남부지역으로 한다.)은 이른바 동중국해를 매개로 연결되고 있다. 지금의 연해주 및 북방, 캄차카 등도 동해 연안을 통해서 우리와 연결되고 있으며, 타타르해협을 통해서 두만강 유역 및 연해주지역과 건너편의 사할린․홋카이도 또한 연결되고 있다. 즉 다국간 지중해(multinational-mediterranean-sea)의 형태와 성격을 지니고 있다. 황해는 38만㎢인데 한반도와 요동반도 중국대륙을 연결하고 있다. 발해는 7.7만 평방km인데, 선사시대에는 해안선이 지금보다 더 내륙으로 들어갔다. 남해는 대마도를 사이에 두고 한반도와 일본열도 사이에 있는 협수로이다. 동해는 남북 길이가 1700 km, 동서 최대 너비는 1000여 km, 면적이 107만 km²로서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다. 여기에는 우리의 인식이 못 미치는 타타르해협(Tatar-strait)까지 포함한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인식을 갖고 ‘동아지중해(東亞地中海, EastAsian -mediterranean-sea)’)’라고 명명한 모델을 설정해서 동아시아 역사를 해석해왔다.

지중해는 몇 가지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동성(mobility)이 강하여 각 지역 간의 이동이 비교적 자유롭고, 비조직적이므로 국가의 형성과정이나 정치집단들 간의 관계도 매우 복잡하다. 해양력의 강약에 따라 국력이 결정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정치․군사적인 것보다는 교역․문화 등 구체적인 이해관계를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항상 개방적이고 여러가지의 다양한 문화를 전파하고, 수용할 수밖에 없다. 전형적인 정착성(stability)문화와 이동성(mobility)문화가 이곳에서 만나 상호보완한 것이다. 특히 황해는 좁고, 거리도 짧아(중부는 약 300~400km 정도) 중국과 한반도의 서부해안 전체, 그리고 만주남부의 요동지방을 하나로 연결하였으며, 해상상태도 안정되어 흡사 호수 같은 성격을 지니면서 인접한 모든 나라들이 무리없이 공동으로 활동할 수 있는 터전(場)의 역할을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비교적 일찍부터 인간과 문화의 교류가 빈번했고, 그 결과로 비교적 공질성(共質性)을 토대로 친연성이 강한 문화권이 형성되었다. 뿐 만 아니라 바다 주변의 나라들이 흥망을 되풀이하고 국제질서가 격렬하게 재편되는 과정에서 해양질서는 매우 중요하고, 의미있는 역할을 했다.

동아시아 상생체를 만드는 정책의 하나로서 ‘동아지중해(EastAsian-mediterranean-sea) 모델’을 적용하면 몇 가지 장점이 있다. 첫째, 육지 위주의 관점과 달리 모든 나라들은 해양질서와 육지질서를 공유하고, 어떤 지역에서든 서로 연결된 하나의 권역으로 본다. 또 실질적으로도 연결되었다. 그러면 역학관계의 본질을 쉽게 이해할 수 있고, 그에 따라 국가 간의 역할분담이라는 도식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둘째, 구성 국가들의 공질성(共質性)을 구체적으로 확인시켜 준다. 동아시아 3국은 다른 권역과 효과적으로 대결하기 위해서는 가까운 운명공동체라는 사실을 확실히 자각해야한다. 이 지역은 수 천 년 동안 지정학적 지경학적 지문화적으로 공동의 역사 활동권을 이루어왔다. 몇 번의 대 전쟁 외에는 대결은 그다지 심한 편이 아니었다. 이제는 지방시대, 국가시대에 겪었던 사실들은 철저히 반성하고, 감정을 풀어야 한다.

하지만 동아시아의 국가들 간에는 지정학적으로 철저한 힘의 균형(balance of power)이 필요하고 역할분담이 철저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한 국가가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으면 패권국가를 지향하거나 맹주로서의 유혹을 느낀다. 중국과 일본은 심각한 충돌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고, 중국과 한국은 추후에 이러한 불평등의 전형적인 사례가 될 수 있다. 또한 국가들 간에는 갈등이나 경쟁, 심각한 충돌을 적게하고, 분업과 상호협조로서 시너지(相生)효과를 창출시킬 수 있도록 해야 한다.

3) 한민족의 역할론

그러면 동아시아의 지중해적 질서와 성격 속에서 우리의 위치는 어떠하며, 어떠한 역할을 해야 할까?

21세기 국가발전전략과 관련하여 조금 더 상세하게 알아보자. 우리는 아직도 남북통일이 불투명하며, 주변국들의 방해로 인하여 민족력(民族力)의 결집 또한 매우 어렵다. 남북통일이 이루진다 해도 우리의 힘이 열세를 면할 가능성은 별로 없다. 그러면 절망적인가? 그런데 지정학적으로 통일한국은 두 강대국의 갈등과 충돌의 개연성이 많은 신질서의 편성 과정에서 중간역할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두 강대국 사이에 낀 강소국(强小國)이므로 객관적으로 매개자겸 조정자의 역할을 할 가능성이 있고, 무엇보다도 자연환경이 그러한 역할을 부여하고 있다.

동아지중해의 중핵(core)에 위치해있으므로 대륙과 해양을 공히 활용하며, 동해 남해 황해 동중국해 전체를 연결시켜줄 수 있는 해륙 네트워크의 허브이다. 통일한국이 중요한 해로를 장악하고, 해양조정력을 갖고 거기다가 ‘TCR’ ‘TSR’과 ‘SEA-LANE’을 연결시킨다면 교류의 주도권은 물론 정치갈등도 주도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 또 인프라를 효율적으로 건설하고 활용한다면 경제적으로도 동아시아에서 하나뿐인 물류체계의 거점(HUB)로서 교통정리가 가능하고 동아시아의 경제구조나 교역형태를 조정하는 역할까지 할 수 있다. 또한 한류 현상에서 확인하듯이 문화 또한 우리를 핵심 로타리(I.C)로 삼아 동아시아 공통의 문화를 창조해낼 수 있다.

한국지역의 이러한 중핵 역할과 조정기능은 21세기 동아시아 신질서의 수립과 상생, 공동체 구성에 더욱 필요해지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주변국가들도 인식하고, 이를 인정하면서 실제로 우리의 통일을 적극적이고 자발적으로 도와주도록 설득해야한다. 단 명심해야 할 사실은 인식의 전환, 해양력의 강화, 대륙의 중시,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치 군사적인 영향력이 있어야 한다. 광개토태왕과 장수왕 시대에 고구려가 중핵조정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했고, 그 시대에 동아시아에 평화구도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고구려가 힘이나 문화 경제 등에서 대등하였기 때문이다.

4. 광개토태왕의 정복전쟁과 국제질서 재편 전략

광개토태왕은 391년에 18세의 나이로 등극하여 22년간 우리 역사상 가장 많은 영토를 넓혔고, 자의식이 강했으며, 군사전략에 탁월했다. 세계국가적인 성격이 강했던 시대의 대왕, 즉 왕 중의 왕인 태왕이다. 삼국사기에는 그의 이름이 ‘담덕(談德)’이며, 성격은 웅혼하고 위엄이 있으며, 대범하고 빼어난 뜻을 지니고 있고, 시호는 광개토왕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당대의 평가를 받은 그가 등극한 4세기 말과 5세기 초는 우리가 맞이한 20세기 말과 21세기 초와 마찬가지로 당시의 세계인 동아시아의 질서가 전면적으로 재편되고, 정치의 주역들이 교체되며, 문명의 질이 전환하는 대혼란의 시대였다. 국내적으로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위기상황에 처해있었다. 나라도 민심이 흉흉하며, 백성들은 굶어주는 궁핍한 상태에서 불확실한 상태로 미래를 맞으며 자신감을 상실하고 있었다. 이 상황 속에서 태왕은 자기의 조국인 고구려를 새롭게 재편되는 세계질서의 중심에 놓고자 했으며, 이를 위해 다양한 정책을 추진했다. 그 정책들은 성공했으며, 그 역사적인 결과물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본받아야 할 모델이 된다.

1) 정치와 외교 정책--동아지중해의 중핵(CORE)조정역할

그가 추진한 정책 가우데 정치외교적인 측면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4세기는 북방종족들에게 고착되고 엄숙한 중화 중심의 ‘냉전시대(cold war)’가 아니라 희망과 의욕에 넘치는 열전시대(hot war)였다. 중국이라는 탐스러운 먹잇감을 서로 물어뜯는 이리 떼처럼 5호 16국 시대를 연출하고 있었고, 남쪽에는 도망간 한족이 동진이라는 피난정권을 세우고 있었다.

지금 중국과 일본은 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복잡미묘하게 경쟁 및 대결구도를 연출하고 있다. 센카쿠(尖閣)제도-다오위다오(釣魚島) 등의 영토분쟁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한국과 일본은 우호협력 내지 경쟁관계이지만, 과거 청산과 역사교과서 왜곡, 독도문제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중국과 미국은 소련이 붕괴된 이후에 세계질서를 놓고 잠재적인 적국으로 서로를 주시하고 있는 상황이다.

한국은 북한과 적대관계를 청산하지 못했으나, 북한의 혈맹인 중국과는 우호적이다. 물론 중국은 우리의 통일을 기본적으로 방해하는 세력이고, 앞으로도 갈등 내지 충돌을 빚을 가능성이 많다. 중국과 러시아는 기본적으로 갈등 혹은 경쟁관계인데, 한시적으로 우호관계를 맺고 있지만 연해주 영유권과 두만강 하구를 놓고 갈등이 불가피하다. 여기에 일본과 러시아, 일본과 북한, 북한과 러시아의 관계가 있다. 무엇보다도 북한과 미국의 관계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고 미묘하다. 그리고 우리가 간과하고 있지만 일본과 중국의 동중국해 갈등과 중국과 대만의 뿌리 깊은 갈등 또한 동아시아 질서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거기에다가 동남아와 인도, 유럽까지 염두에 두면 상황은 정말 복잡해진다. 하지만 현실은 어쩔 수가 없다.

지금과 유사한 상황에 처한 광개토태왕은 국제질서의 변화와 본질을 정확하게 꿰뚫어보면서 과감하고 전격적으로 국가발전정책을 입안하고 실천에 옮겼다. 그는 우선 군사력을 동원해서 영토확장 정책을 펼치고, 외교노선을 다변화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22년 동안 거의 쉬지 않고 끊임없이 전방위 정복활동을 했다. 고구려에게 북방은 국가생존과 직결된 지역이었다. 특히 요동지방은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뛰어난 가치가 있어서 즉위 기간 내내 주력했다. 요동정복은 지금의 관점으로 본다면 압록강 하구나 두만강 하구 지역을 통째로 장악한 것과 같다. 요동반도는 철을 비롯한 풍부한 지하자원의 매장지이며 물류거점뿐 아니라 생산지이기도 한 경제전략지구였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황해 동안의 연근해항로를 확보하면서 황해 중부이북의 동쪽 바다를 안전한 內海(inland-sea)로 삼아 영역권화할 수 있다.

한편 태왕은 즉위 21년(411년)에 친정군을 이끌고 진군해서 두만강 하구 유역에서 연해주까지 걸쳐 있는 동부여도 완벽하게 장악하였다. 이 작전으로 인하여 연해주 남부바다의 일부와 동해항로의 일부까지도 영역에 포함시켜 경제적으로도 많은 혜택을 얻게 되었다.

앞으로 세계질서 혹은 동아시아 질서의 재편과 맞물려 만주지역에서 국제분쟁이 빚어질 가능성은 높다. 특히 한민족이 통일을 이룬다면 연고권과 영향력을 놓고 변동이 일어날 수도 있다. 최근 중국정부가 무리하게 東北工程을 시도하고 있는 것은 만주의 향후 위상과 관련이 깊다. 태왕은 강력한 군사력을 동원하여 명멸하는 북방국가들을 대상으로 화전(和戰) 양면정책을 다양하게 구사하여 국제적인 위상을 높이고, 전략적으로 유리한 입지를 차지하였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북방 중국 동방이라는 동아시아 삼핵(三核) 혹은 삼극(三極)체제의 한 부분을 확실하게 차지하였다.

한편으로는 남방정책 또한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4세기 말의 국제환경에서 중요한 변수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해양력(sea-power) 강화였다. 중국지역은 남북조로 분단되었으므로 국제외교에서 중심부를 차지하려면 ‘외교통로의 장악과 관리’는 절대적인 의미가 있다. 태왕은 대정치가다운 스타일로 해양영토와 거점을 확보하여 국제질서의 中核 자리에 진입하고자 하였다. 남진정책은 소위 육지영토 외에 해양영토를 확대하는 일과 깊이 연관되어 있었다. 그는 즉위 5년(396년)에 대규모 수군을 투입하여 백제의 수도인 한성을 주공목표로 삼고, 그 외에 경기지역을 중심으로 황해도, 충청도 일부지역을 광범위하게 점령하였다. 이 작전은 결국은 경기만 쟁탈전 및 서해안의 해상권 장악과 깊은 관련이 있다. 전근대시대에는 경기만을 누가 장악하느냐에 따라 한반도의 판세가 결정되었다. 지금도 남과 북이 NLL 등을 비롯하여 보이지 않는 선을 경계로 경기만을 공유하고 있음은 매우 상징적이다.

태왕은 백제 공략이라는 1단계 목표를 달성한 후에, 신라의 청병을 빌미로 경자년(400년)에는 보병과 기병 5만 명을 신라의 국경 안으로 진격시켰다. 이 작전으로 신라에 대한 종주권을 확실하면서, 백제와 왜가 해양을 연결고리로 새롭게 부상하는 것을 신라를 이용하여 붕괴시키려는 것이었다. 태왕은 이에 멈추지 않고 부산지역의 임나가라(任那加良)를 공격했고, 나아가 일본열도에 진출했을 가능성이 높다.

태왕이 붕어할 때까지 쉴 새 없이 추진한 정복작전의 결과로 고구려는 대륙의 남부, 한반도 중부 이북의 북부지역 등 거대한 육지영토를 차지하여 중핵이 되고, 거기에 황해 중부 이북, 동해 중부 이북의 해양영토를 확보한 명실공히 ‘해륙(海陸)국가’가 되었다. 고구려는 곳곳에 전략적인 거점을 확보하여 질서의 축(軸)을 세우고, 지정학적 위치를 활용하여 단계적으로 동아시아 국가들을 연결함으로써 자국(自國) 중심(core)의 거대한 망(網, net)을 구성하고 동아시아 삼각축의 하나로서 명실 공히 중핵국가가 되어 조정능력을 가지며 한민족 질서의 패자가 되고자 하였다.

그림 광개토대왕군의 수군공격로

장수왕은 이를 계승하였다. 427년 수도를 평양으로 천도하고, 475년에는 대군을 동원하여 한성을 점령하고 개로왕을 죽였다. 남진정책을 추진하여 한반도의 지배권을 확립하였으며, 해상활동을 더욱 활발히 하였다. 북으로 진출하여 현재의 동몽골 지방인 지두우지역을 유연과 공동 분할지배를 하고자 하였다. 이 시기의 고구려는 한반도의 대부분, 만주전체, 요동반도 그리고 동해와 황해의 해상권을 장악하여 동아시아에서 대륙과 해양을 겸비한 제국적 국가가 되었다. 그리하여 동아지중해의 중핵에서 자연스럽게 분단된 남북조(현재의 상해정권과 북경정권)와 동시등거리외교를 벌일 뿐 아니라 북방의 유연(현재의 러시아 혹은 몽골)과 동맹을 맺어 송과 연계해 북위를 압박하는 포위망을 구축하는 다국간(多國間) 외교를 전개했다. 물론 백제, 신라, 가야, 왜가 북중국정권은 물론 남조정권과 교섭하는 것마저 해상통로를 막아 통제하고 조정했다. ‘동시 등거리외교’와 ‘다핵 다중방사상외교’를 펼치면서 태왕의 구도인 동아지중해 중핵조정역할을 충실하게 완성하여, 정치 외교적으로 강국이되었다.

2) 경제 무역정책

(1) 에너지원의 확보와 기술력의 발달

한 국가의 흥망성쇄와 직결되어있는 요소는 자원의 존재와 확보여부이다. 전근대사회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에너지원은 철이다. 다양한 종류의 농기구, 무기들과 무기군수품들을 생산하는데 필요한 전략적 물자이다. 또한 주변의 여러 나라에 팔수 있는 고가의 무역품목이기도 하였다. 당시 동아시아 최대의 철생산지는 요동지방에 있었다. 광개토태왕은 완벽하게 장악하였다. 고구려는 금, 은, 동을 생산하였으며, 주변국에 수출하였다.

고구려는 철을 무역품목으로 최대한 활용하였다. 즉 요동에서 채굴하고 제련한 철을 현재 흥안령 지역에 살았던 실위 등에게 수출하고 대신 좋은 말들과 모피 등을 수입한 후에 이를 배에 실어 상하이 안쪽에 있었던 남경까지 수출을 하였다. 439년, 장수왕 때에는 무려 800필의 말을 송나라에 보낸 적이 있었다. 645년에 고구려와 당나라군 간에 운명을 걸고 벌어진 안시성 공방전은 이러한 철생산지 확보와 직결되어있었다. 이 지역은 그 후에도 늘 각축전이 벌어지던 경제전략지구였다.

(2) 물류의 거점(hub)과 중계무역

태왕이 추진한 경제정책은 실로 다양했다. 우선 물류거점을 확보를 목적으로 영토확장정책을 추진했는데, 크게 나누면 다섯 지역으로 압축할 수 있다. 첫째는 요동지역, 두 번째는 압록강 하구일대, 세 번째는 두만강 하구및 연해주 남부일대, 넷째는 경기만 일대, 다섯째는 동해안 중부일대이다.

태왕은 경제전략지구인 요동지역을 장악해서 농경면적이 더욱 넓어졌고, 안시성이나 건안성 같은

그림 광개토대왕 전략요충지 분포

지역에서 질이 우수한 철들을 생산했다. 또한 내륙의 북방경제권과 요동만과 발해만을 이용하는 해양물류망을 네트워크화시켰다. 또 다른 경제전략지구는 압록강 하구이다. 만주에서 황해로 나아가는 출해구이며, 황해에서 만주로 진입하는 입구이다. 또한 하구인 서한만은 만주와 한반도가 만나며 황해 북부 연근해항로의 중요한 거점으로 정치 외교뿐만 아니라 국제교역에서 가장 중요한 물목이었다. 고구려에게는 생명선과 목구멍 같은 곳이다. 앞으로도 이 지역은 정치군사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전략지구로 자리 매김할 것이다. 북한이 추진했던 ‘신의주 경제특구’는 중국의 압력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외에 두만강 하구 유역은 지금 북한의 나진 선봉지구, 중국의 훈춘, 러시아의 핫산지역의 경제전략적 가치와 유사하다. 중국은 2006년 4월을 계기로 중국은 북한과 나진 선봉(나선시)를 50년 동안 공동관리하겠다는 발표를 했다.

이처럼 만주지역은 지금도 대륙과 황해와 동해가 만나는 곳이자 대륙경제권과 황해경제권, 동해경제권이 만나는 곳이다. 만약 남북한의 희망 섞인 계획대로 남북이 협력하고 중국횡단철도(TCR), 시베리아횡단철도(TSR)와 경의선, 경원선과 이어지면 세계는 물론 아시아의 모든 교통망이 몰려들면서 아시아 교통의 중심지가 될 것이다. 이 가치를 새삼 주목한 중국의 새 지도부는 소위 ‘동북진흥계획’을 중점적으로 추진하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고구려 역사에 대한 왜곡작업이 본격화되고 있다.

태왕이 심혈을 기울여 추진한 동아지중해 중핵정책의 백미는 사실 경제발전과 물류의 또 다른 전략지구인 경기만의 점령과 운영이다. 경기만은 부유한 국가를 지향하는 그에게 국제경제적인 측면, 즉 교역을 위해서 매우 중요한 전략지구였다. 한반도 중부의 모든 강들과 이어지는 해륙교통의 거점이다. 태왕은 시대의 변화를 포착하고, 이 범경기만을 또 하나의 허브로 삼아 교역의 거점뿐만 아니라 생산의 거점으로도 삼았다. 이렇게 고구려는 동아지중해의 허브라는 지경학적인 위치를 최대한 활용하여 해양로와 육상로를 자유자재로 활용하면서 물류체계를 원(circle)으로써 연결시켰으며, 중계로 역할도 하였다. 즉 북방교역망을 형성하는 한편 해양을 통해서 일본열도, 제주도, 양자강 유역으로 연결되는 해상교역망을 운영하였다. 또한 북방의 산물과 남방의 물품들을 중계무역하기도 하였다.

3) 문명의 터전(하트)-융합과 재창조

큰 나라의 완성은 정치 군사력이 강하고 경제력이 뛰어난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문화가 소중하다. 지금 우리사회가 당면한 문제도 문화의 왜곡과 혼란스러움에 기인한 바가 크다. 태왕이 벌인 정복활동은 광대한 제국의 건설과정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다양한 자연환경과 문화가 하나로 모인 호수며 바다 같은 곳으로 변신하였다.

그림 5~6c 동북아 국가 및 종족 분포도

뿐만 아니라 고구려 안에는

원고구려인 외에 새로 편입된 동부여, 북부여 주민들이 있었다. 점령한 영토내의 백제, 신라, 가야의 주민들은 종족은 동일하고, 어느 정도 공동체의식을 지녔었다. 화북과 요서에 살고 있었던 한족들도 유이민으로 들어왔으며, 시라무렌 유역의 거란족, 요하에서 흥안령으로 이어지는 지역에 살던 선비족(鮮卑族)들도 흡수했다. 또 연해주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던 말갈계도 흑수말갈 같은 일부를 빼놓고는 고구려의 주요한 구성원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고구려는 하나의 국가영토 안에 색다른 자연환경, 이질적인 문화가 공존하면서 복합적인 역사공간으로 탈바꿈했다. 필연적으로 원(原)고구려인들은 물론이지만 제국으로 편입된 신국민들 스스로도 이 엄청난 환경 속에서 문화충격(culture shock)과 혼란을 느꼈을 것이다.

광개토태왕은 제국을 확실하게 유지하고 번성시키려면 종족과 문화를 잘 조화시켜 고구려의 신민으로 만들어야 했고, 소수종족들 사이에 벌어진 충돌이나 불신으로 인한 내부의 균열현상도 가능한 한 무마시켜야 했다. 지금 세계화와 집단의 자의식 사이에서 혼란을 겪는 우리에게도 주어진 과제이다. 고구려인들은 2가지 방식을 복합적이고 유기적으로 적용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첫 번째는 정체성을 회복시키고 자의식을 강화시키는 정책을 추진했다. 고구려인들은 자신들이 ‘하늘의 자손’이라는 자의식과 하늘을 뜻을 받았다(天託)는 의식과 행동을 거행했다. 광개토태왕릉비에는 첫 구절에 “옛 시조 추모왕이 나라를 세웠는데, 북부여로부터 나왔다. (추모왕은) 천제의 아들이요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이시다(惟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 出自北扶餘, 天帝之子, 母河伯女郞.)”라고 기록했다. 이는 추모의 후예인 태왕이 천신과 수신의 직손直孫이라는 천명을 통해서, 고구려가 하늘의 뜻으로 선택된 종족임을 선언한 것이다. 결국 추모의 혈손인 고구려 임금들은, 태왕을 비롯하여 모두가 천제이며 천손이라는 논리이다. 이런 작업을 추진하면서 정치적으로 자신감을 갖고 이데올로기를 통일시키는

그림 고구려 전성기 영역의 관리방식

작업을 성공적으로 완료시킨다. 더 나아가 부여 이전의 국가이고, 부여를 포괄하는 더 큰 질서인 왕검조선, 고조선을 계승했다는 조선정통론을 분명히 했다.

그런데 고구려가 국제적인 나라, 혹은 명실 공히 제국을 건설하는 데는 세계국가 혹은 고유문명을 이룩할 수 있는 문화적인 힘과 역량을 갖추고, 나아가 동아시아 문명의 발전과 보존이라는 측면에서 의미있고 긍정적인 역할을 해야만 했다. 지금으로 말하면 일종의 ‘한민족 문화역할론’이다.

태왕은 다문화적이고 다종족적인 신문화를 수용하여 보편성을 획득하면서도 정체성에 충실하면서 중국문명이나 북방문명과는 또 다른 동방문명을 창조하였다. 원조선의 문명을 계승하고, 동족국가들의 역사적인 경험을 수용하여 고구려 중심의 동방문명을 창조하였다. 그리고 동방문명을 중국문명은 물론 비중국문명에게 수혈하여 보존과 발전을 도왔다. 동아시아 문화가 생동감 있고, 정체성을 띠지 않고, ‘환류(環流)시스템’과 균형감을 유지한 것은 고구려 문화의 역할이 크다. 따라서 사상의 통일과 상징물 등을 통한 홍보활동이 필요했다. 특히 내부의 공동체 의식을 강화시켜야 했고, 그를 위해서는 주체와 대상체의 합일(合一)을 지향하는 세계관이 필요했다. 고구려가 주목한 것은 조화와 상생이다.고구려 문화의 역동성은 단순한 운동량의 증가나 힘의 과시가 아니라 정제되고 목적을 지향하는 질적으로 성숙한 역동성이었음을 알려준다. 이른바 동중정의 문화, mo-stability문화를 지향했다. 고구려는 더 나아가 모든 종족의 고유신앙을 넘어서고, 포함할 수 있는 복잡한 논리와 상징 형식이 있는 고등종교를 채택했다. 불교는 고국원왕이 전사하고 국가적 위기를 남북으로 받는 상황에서 왕실의 주도 아래 새로운 사상이면서 종교인 불교를 공인하였다.

고구려인들은 자기역할과 자기정체성(identity)을 자각하고 새로운 형태의 고구려 문화를 만들어냈고, 질이 높은 문화국가로서 성장하였다. 이렇게 해서 고구려는 문명개화의 절정시대(renaissance)를 맞이했으며, 고구려인들은 세계국가적 성격을 갖고 동아시아의 중핵국가로서 성격을 재정립(re-foundation)하였다.

최근에 아시아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소위 한류현상에서 확인했듯이 우리는 문화면에서도 핵심 I.C 또는 ‘심장(HEART)’으로서 동아시아 공통의 문화를 창조해낼 능력과 자격이 있다. 남한과 북한문화가 만나고, 자본주의 문화와 사회주의 문화가 만나고, 대륙문화와 해양문화가 만나며, 유교, 선교 및 불교문화와 기독교문화가 만나고, 또 동아시아 정통문화와 서구문화가 만나는 접점이다. 이러한 다양하기도 하고, 이질적인 문화들이 만나면서 공존을 모색하고 상생을 이룩한다면 동아시아 문명, 나아가 인류문명이 지향하는 상태와 실현방식에 대하여 대안을 제시할 수도 있고 모델이 될 수도 있다.

4) 민족통일의 모델

역사적으로 평가하면 고구려는 끝내 통일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멸망한 나라이다. 물론 실패한 역사는 아니다. 고구려는 왜 전성기에 4국을 통일하지 않았을까? 고구려는 국가의 성립과정과

그림 동아시아 문명권

발전과정에서 많이 나타나지만 영토와 주민을 지배하는 방식도 백제 신라 같은 농경위주의 나라들과는 다르다. 정복국가와 유목종족들의 지배방식을 염두에 둔다면 고구려 역시 직접통치 외에 간접통치나 영향력을 확대하는 방식을 많이 사용했으리라 생각한다. 또한 고구려의 결정적인 외교적 실패는 한반도, 즉 민족 내부에 있었다. 고구려는 신라를 적대국가로 삼았다. 백제 또한 긴밀한 동맹관계를 맺지 못했다. 심지어는 수나라와 전쟁을 벌일 당시에는 신라는 물론 백제도 오히려 고구려를 쳐줄 것을 수나라에 청했었다. 고·당 전쟁을 벌이고 있을 당시에도 백제는 고구려를 도와주지 않았다. 고구려는 최소한 백제를 전략적인 동반관계로 삼지 못했었다. 그리고 백제가 항복했을 때라도 신속하게 백제 부흥군, 왜국 등과 남북으로 연결하여 나·당의 동서동맹과 대결구도로 만들었어야 했다. 하지만 이러한 작업은 모두 뜻한 만큼 실현되지 못했다.

고구려가 외교적으로 실패를 하게 된 데에는 국제환경에 대한 인식에도 문제가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해양능력이 약화되었고, 해양질서의 중요성을 경시했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6세기 중엽에 경기만을 신라에게 빼앗기므로써 황해중부의 해상권을 잃었다. 그 결과 백제 신라 등은 중국세력과 독자적으로 교섭을 하게 되므로써 외교적 주도권마저 상실했다. 결국은 국제질서를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했고, 외교전에 실패했으며, 해양에 대한 인식을 소홀히 하므로써 당시 최대의 장수국이었던 고구려는 역사에서 허망하게 사라진 것이다.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에 동아시아의 질서는 唐을 중심으로 재편되었고, 교역의 형태는 물론 문화가 질적으로 변화되었다. 우리는 신라가 존속하면서 남북국시대가 되었으나, 대신 민족적 패배를 하였으며, 민족사는 주체성을 잃어가면서 동아시아의 주변부로 전락하여 갔다. 종속의 논리, 타협의 논리, 대국중시의 논리, 주변부의식 등에 젖어들면서 정체성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고구려의 패배와 멸망은 주체적인 민족의 굴복과 패배가 역사적으로 얼마나 심각한 의미와 불행한 결과를 낳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고구려의 역사는 우리에게 또 다른 유용성이 있다.

남과 북은 향후에 전개될 상황을 염두에 두고 통일의 과정과 통일 이후에 주도권을 잡기위한 노력을 각 방면에서 추진하고 있다. 특히 한민족의 역사상에서 정통성을 찾고, 그 작업을 누가 주도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고조선 계승의식이 강했던 고구려는 남과 북이 모두 거부감 없이 수용할 수 있는 역사이다. 최소한 미래를 지향하는 우리에게 자긍심을 불러 일으키는 역사이다. 고구려와 관련하여 민족문제, 영토문제, 외세에 대한 대응태도, 민족문화의 성격 등은 향후 남북관계에서 중요하다.

5. 맺음말

20세기 말과 21세기 초처럼 당시의 세계인 동아시아의 질서가 전면적으로 재편되고, 문명의 주역들이 교체되며, 문명의 질이 전환하는 대혼란의 시대이다. 이러한 위기상황 속에서 우리는 고구려를 더 적극적으로, 새로운 각도에서 연구하지 않으면 심각한 문제가 될 수도 있다. 고구려를 地域的인 개념, 영토적인 개념으로만 파악할 경우에는 민족내부나 민족외적으로도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또한 자칫하면 팽창지향적인 국수주의로 흐를 수도 있으며, 주변국들에게 경계심을 불러일으켜 자극할 우려가 있다. 내부적으로는 유기체적인 관점으로, 민족공동체라는 관점으로 보아야, 역사에서의 정치적인 분열을 극복하고 南北韓 어느 한 쪽에 편향되지 않는 계승성을 주장할 수가 있다. 외부적으로는 역사적 문화적 경제적 개념으로 파악해야 하고, 동아시아와 범아시아 나아가서는 지구라는 입장에서도 역사를 해석해야 주변국들의 우려를 불식하고, 또 공존을 모색할 수 있으며, 일종의 역할론으로 ‘동아지중해중핵조정역할’과 ‘지구담론’과 ‘역할론’을 창출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광개토태왕과 장수대왕은 우리에게 구체적인 모델이 된다. 그들은 위기에 처한 고구려를 구원하고 강국으로 만드는 데 그치지 않았고, 새롭게 재편되는 세계질서의 중심에 놓고자 했다. 동서남북의 군사작전과 수륙양면 작전들을 전개하여 영토를 확대했다. 군사적인 우위를 토대로 삼아 동아시아 세계에서 정치 외교의 중핵 조정 역할을 했다. 아울러 경제력의 상승과 백성들의 풍요로운 삶을 실현시킬 목적으로 경제영토를 확대했고, 물류망을 확대하고 네트워크화하여 주변의 지역 및 국가들과 교역을 하는데 최대한의 이점을 끌어냈다. 이 무렵에 동아시아 세계는 다양한 종족들과 문화들 간에 교류가 확산되고, 고구려는 이미 제국의 위치에 올라 다종족적 국가 다문화 국가가 되어 갈등과 혼란이 발생할 수 있었다. 천손민족과 ‘原조선 계승성’을 토대로 고구려를 문화적으로도 정체성에 충실하면서도 보편성을 갖게 했다.

이렇게 해석한 고구려를 발전모델로 삼는다면 한국지역의 중핵 역할과 조정기능은 21세기 동아시아 신질서의 수립과 상생, 공동체 구성에 더욱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주변국가들도 인식하고, 이를 인정하면서 실제로 우리의 통일을 적극적이고 자발적으로 도와주도록 설득할 수 있다. 단 명심해야 할 사실은 인식의 전환, 해양력의 강화, 대륙의 중시,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치 군사적인 영향력이 있어야 한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시대에 고구려가 중핵조정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했고, 그 시대에 동아시아에 평화구도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고구려가 힘이나 문화 경제 등에서 대등하였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의 터는 한반도가 아니라 한반도와 대륙, 그리고 바다를 아우르고 있다. 우리의 핏속에는 유목민, 농사군, 사냥꾼, 그리고 어부와 뱃사람, 장사꾼의 피가 한데 섞여 있다. 역사는 과거가 아니고 현재도 아니며, 미래 그 자체이다. 역사는 관념도, 지식도 아니고, 삶 그 자체이다. 고구려는 수천, 수백 년 전의 먼 과거가 아니라 시시각각 다가오는 미래이다.

고구려는 우리민족의 시원국가인 원조선(原朝鮮)을 발전과 이상국가의 모델로 삼아 재발견(re-discovery)하고 재부활(re-naissance)하며 재건국(re-foundation)한, 즉 多勿한 나라였다. 이제 다시 그들의 정책과 능력, 세계관을 모델로 삼아 ‘고구리즘(gogurism)’을 개화시키고 환생(re-re-foundation)해야 한다.

본 글에 사용한 필자의 참고문헌

저서

1992. 『역사는 진보하는가?』, 온누리.

2004. 『역사전쟁』, 안그래픽스.

2004. 『고구려는 우리의 미래다』, 고래실.

2005. 『광개토태왕과 한고려의 꿈』, 삼성 경제연구소.

2006. 『우리역사지도』, (MBC-TV 느낌표)

2006. 『장수왕 장보고 그들에게 길을 묻다』, 포름.

2012.(2) 『윤명철 해양논문 선집』 (8권). 학연.

2012.(9) 『해양사연구방법론』, 학연.

2013 『고구려, 역사에서 미래로』, 참글세상.

2015 『다시 보는 우리민족』, 상생

2015 『유라시아 실크로드와 우리』, 경상북도

2016, 󰡔현동아시아 해양국경분쟁의 역사적 근거와 대안탐구.󰡕

2018 , 󰡔고조선 문명권과 해륙활동󰡕, 지식산업사

2019, 󰡔장수왕 , 그에게 길을 묻다.󰡕, 수동예림

윤명철 역사학박사 / 고구려 및 동아시아 해양사 전공 / 동국대 명예교수. 사마르칸드 국립대학교 교수

동국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성균관대학교에서 석사 및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연구분야는 고구려사와 동아시아 해양사이며, 광개토태왕을 통해 21세기의 ‘고구리즘(gogurism)󰡑의 실현을, 장보고를 통해서는 ‘동아지중해 물류장 역할론’을 꿈꾸고 있다. 현재 동국대학교 다르마 칼리지 교수로 재직 중이며 해양문화소장, 고구려연구회 부회장, 한민족학회회장, 고조선단군학회회장 등을 거쳐 한국해양정책학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

1983년 대한해협 뗏목 학술탐사를 시작으로, 2회에 걸쳐 중국 절강성에서 한국까지 황해문화 뗏목 탐사를 실시했고, 2003년에는 중국 절강성에서 인천을 경유, 제주도와 일본까지 뗏목 장보고호를 타고 43일간 학술탐사를 한 바 있다. 해양문화 창달에 기여한 공로로 대한민국근정포장을 수훈했으며, 1회 김찬삼여행상을 수상했다. 또한 동아일보 창간 90주년 행사로서 추진된 ‘2020년 한국을 빛낼 100인’에 선정됐다. 60여 권의 저서와 다수의 공저 및 150여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고구려 및 해양과 관련된 TV방송강의, 출연, 연재 등을 하고 있다.

현재

유투브 <윤명철 교수의 역사대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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