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명대사, 400여년 전 민관외교길 韓·日 문화교류 탐방단 본격 활동 순항

유학자에 불학자로 국난을 이겨낸 천부적 지혜
시대정신에 시대인물로 되세겨야

임인식 시민기자 승인 2024.05.08 13:19 | 최종 수정 2024.05.08 13:36 의견 3

문화재청의 국가유산청으로 ‘국가유산기본법’ 시행에 따는 새로운 출범과 함께 그동안 야사(野史)나 전설로 내려오는 한국 민중문화의 대명사인 사명대사의 일본 행적이 조선의 억불(抑佛) 정책으로 400여 년간 봉인(封印)된 역사가 국가유산 활용, 스토리형 유산콘텐츠 발굴을 위한 “조선의 민간외교관 사명대사 일본외교길 문화교류”가 성사되어 드디어 공식적으로 (사)국제문화재전략센터와 표충사에서 탐방단을 모집하게 되어 국내외적으로 커다란 화제가 되고 있다.

지금도 세계사의 러시아, 이스라엘의 전쟁이 치열하게 격화되는 가운데 지금부터 432년 전 임진왜란 당시 국난극복에 앞장선 위인이라면 바다에는 이순신 장군이, 육지에는 사명대사와 권율 장군 등이 있었다. 특히 사명대사는 군인이 아닌 승려의 신분으로서 풍전등화의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의승병을 이끌고 왜적에 분연히 맞섰고, 임란 후에는 탐적사의 임무로 일본에 건너가 국교 회복과 피로인 쇄환, 그리고 이후 조선통신사를 파견토록 해, 260여 년간 동아시아에 평화의 시대를 열게 한 민족의 성웅이었다.

그러나 사명대사는 이런 朝·日간에 쏟은 혁혁한 업적에도 불구, 승려란 신분 탓에 숭유억불(崇儒抑佛)정책으로 조선의 역사 속에는 400여 년간 공적이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 재조명의 필요성이 대두되어 왔지만 불교계의 미온적인 태도와 국가적인 재조명의 기회를 얻지 못했으나 표충사 주지 진각스님, 한국국가유산지킴이 부회장 임인식(풍천임씨중앙종친회 부회장), 일본 흥성사 주지 (모치스키 고사이스님 宏濟)가 지난 2023년 11월 일본 흥성사(興聖寺)에서 한·일 불교문화교류(韓日佛敎文化交流)의 협약을 하고 KBS 진품명품 前 감정위원 김선원(서예가) 선생이 증명하여 결금석난맹영(結金石蘭盟永)을 작성한 것이 국내에 알려져 불교계와 학계, 언론 등 많은 관심을 불러 일으켰으며 (사)국제문화재전략센터(이사장 박동석)의 노력으로 임혁백 고려대 명예교수와 불교 조계종 진관 스님(대종사) 및 임홍순 서경대학교 전 대학원장등이 국가적인 사업으로 승격시키고 국민 참여형으로 하자는데 협의하고 시행에 들어갔다.

그동안 불교 언론 등 많은 곳의 노력으로 사명대사 다큐멘터리 제작과 서적 발간 등의 계기로 사명대사의 국내 행적을 물론 일본에서 펼친 위대한 외교력 등을 집중 조명하고 사명대사의 외교력의 산물인 ‘조선통신사’등 이 알려지고 국립중앙박물관에서 2019년 사명대사의 흥성사 유묵이 전시되기는 하였지만, 이번 본격적인 교류와 문화자원 역사 인물 활용은 국가유산청의 탄생과 함께 의미하는 바가 크다.

1592년 임진왜란은 민족의 정체성과 주체성이 훼손되고 인명과 재산 피해는 물론, 재산과 문화재 수탈 등 일본에 의해 자행된 대표적인 침략전쟁이다.

이런 민족수난기인 임진왜란사(壬辰倭亂史) 연구에 있어 역사는 임란 당시 바다에 이순신 장군이 있었다면 육지에는 사명대사가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혹자는 “그 당시 이순신 장군은 군인의 신분으로서 당연한 전투에 참여한 임무였다.

그러나 사명대사는 승려의 신분으로 호민(護民)애국한 인물인 만큼 더 이상의 평가가 이뤄져야한다”고 주장은 학계에서 꾸준히 제기해 왔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사명대사의 400여 년간 업적이 봉인된 채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가고 있어 재조명을 통한 제대로 된 업적 평가가 이뤄져야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사명대사는 진리를 실천한 수행자요, 시와 문학, 자연을 사랑한 문인이었다. 그는 사상가이며, 풍전등화의 나라를 구하기 위해 분연히 맞서 싸운 민족 운동가였다. 그는 또 적진에서 끌려간 피로인을 쇄환해 온 인간주의자요, 특히 ‘침략과 저항의 시대’를 허물고 ‘평화적 선린 우호시대’를 연 평화주의자였다. 사명대사는 1544년 10월 17일 무안면 고라리에서 태어났다. 속성은 풍천(豊川) 임 씨요, 본명은 응규(應奎), 자는 이환(離幻)이고, 호는 사명(四溟) 또는 송운(松雲), 종봉(鍾峯)이며 법명은 유정(惟政)이다.

그는 어릴 적 조부에게 사략을 배우다 ‘번뇌가 없는 글을 배우는 것만 같지 못하다’며 13세 때 직지사 신묵화상에게 머리를 깎고 선문에 들어갔다. 18세 때 봉은사에서 선과에 장원급제한 뒤 박순, 이산해, 최경창, 고경명, 임제 등 사대 문인들과 교유하면서 유·불 사상을 넘나들며 사상의 세계를 넓혀 나갔다. 그는 이때 당대 3대 시인으로 평가된 최경창과 이달 등 사대부와 교유하면서 이백과 두보의 시를 배웠고, 훗날 이것이 스승인 서산대사의 법맥을 잇는 선·교 양종의 불교사적 위치를 구축하는데 더 없는 계기가 됐다.

이런 기록은 합천 해인사 허균의 석장비(石藏碑 보물)문 에 전한다. 사명대사의 유학자들과의 교류는 30세 전후해서 끝난다. 32세 때 선종의 수사찰인 봉은사 주지 천거를 사양한 그는, 35세에 청허 스님을 하직하고 보덕사, 팔공산, 청령산, 태백산 등을 거쳐 43세 되던 해 옥천사 상동암에서 마침내 무상의 법리를 깨닫고 대오한다. 그런데 그는 46세 때 오대산에서 정여립의 역옥사건에 연루돼 한때 강릉부에 구속됐으나 강릉일대 유생들의 진정으로 풀려난다.

그의 속세 나이 49세인 1592년 표훈사에서 임진왜란을 맞으면서 그는 국난극복의 한 축으로 또 다른 세계를 걷게 된다. 사명대사는 그해 여름 금강산에서 노략질과 살상을 일삼는 왜군을 만나 위엄과 담력으로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말라”는 불법을 행해 영동 9군이 살해를 면하도록 한다. 그러나 왜군의 횡포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흉포화 됐다. 이에 사명대사는 중생구제를 목표로 하는 종교인 본연의 인도주의적 자세와 국난을 당해서는 승려라도 좌선에만 얽매여선 안 되며 충적(忠赤)을 다해야 한다는 애국적 실천 자세를 견지한다. 그래서 의승병을 모집, 연로한 서산대사 대신 총제도승병(總諸道僧兵)이 되어 유성룡과 함께 평양으로 향하게 된다.

이곳에서 명나라 원군과 함께 ‘평양성 탈환’에 성공한다. 이 전투는 기세등등한 왜적의 사기를 끊고, 전세를 완전히 뒤집는 실로 획기적 전환을 제공한다. 이를 놓칠세라 사명대사가 지휘하는 의승병과 관군, 명의 원군에 쫓긴 왜적을 따라 남으로 진군, 벽제관, 행주산성, 그리고 사명대사가 직접 큰 공을 세훈 수락산대첩에서 승리를 거둔다. 그 후 사명대사는 활과 화살 군기제조는 물론, 옹기산성, 금오산성, 부산산성 수축과 특히 상소를 통해 군량미 비축 등을 건의한다.

사명대사의 업적 가운데 업적으로 꼽히는 것 하나는 적정 탐정이다. 그는 임진왜란 와중에 세 차례, 정유재란 발발 후 한 차례 등 네 차례에 걸쳐 가또오 기요마사(加藤淸正)와 담판, 국가

생존에 결정적 계기를 제공한다. 그는 이 과정에서 기요마사와 고니시 유끼나가(少西行長) 사이 갈등을 증폭, 적진을 분열시키고 특히 일·명간에 교섭 중인 ‘조선영토 8도 중 4개도를 일본에 할양’과 ‘왕자 한 명 일본에 영주’토록 하는 등의 망국적 교섭을 사전 포착, 국왕과 비변사에 보고토록 하는 성과를 거둔다. 기요마사와 3차 회담 때 그가 “조선의 보배가 뭐냐”라고 묻자 사명대사는 “당신의 목이 보배다”라며 담대하게 응대, 그때부터 ‘설보화상’(說寶和尙)이라는 별칭이 붙었다고 전해진다. 이장희 성균관대 교수는 “사명대사의 적정탐정과 도일 외교 활동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업적”이라고 평가했다.

앞서 밝혔듯 사명대사의 차별화 되는 업적 가운데 하나가 바로 대일외교다.

7년에 걸친 침략 전쟁은 일본군의 살육과 약탈, 방화, 그리고 무모한 조선인 강제연행 등 실로 엄청난 상흔을 남겼다. 임진·정유재란이 끝난 1599년 일본이 조선과 화친을 맺자며 대마도주 소 요시토모(宗義智) 등이 여러 차례 찾아 왔으나 조선은 5년을 끌어오다 드디어 1604년 사명대사와 순문욱을 ‘적정탐정’을 명분으로 파견한다.

사명대사는 어명을 받들고 그해 7월 서울을 떠나 단양-죽령-학원-밀양-김해-다대포를 거쳐 8월 20일 경에 대마도에 도착한다. 대마도에서 3개월간 머문 사명대사는 왜승 겐소와 야나가와의 안내로 본토인 경도로 향한다. 사명대사가 경도로 향한 목적은 적정 탐정과 신의에 입각한 화평 교섭 가능성 타진, 그리고 ‘선사(先師)의 뜻을 받들어 생령(生靈)을 구제한다.’는 어명의 명분을 내세워 피로인을 쇄환(刷還)하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다. 그해 12월27일 경도 본법사에 도착한 사명대사는 그곳 고승들과 불도의 종지(宗智)를 논하고 덕천가강의 아들 히데타다(秀忠)에게 선학을 깨우친다. 그리고 수많은 고승들과 지식인들에게 불법을 강의하고 시문을 지어주며 비평과 서(序)를 붙여주는 문화 활동을 편다. 이것이 한류문화의 원조 인 것이다.

이는 훗날 ‘조선통신사’가 한·일 친선과 문화전파를 통한 국위를 선양하는데 기초가 된다. 드디어 1605년 3월 5일 이에야스의 본거지인 경도 후시미성(伏見城)에서 이에야스를 만나 조·일 강화를 논하게 된다.

이 자리에서 사명대사는 일본이 다시 침략하지 않겠다는 이에야스 서약과 임란 당시 왕릉을 도굴한 범인 인도, 그리고 피로인 쇄환 등의 약속을 받아내 불구대천의 원수 관계를 허물고 두 나라간 국교 정상화의 터전을 마련한다. 그러나 일본은 국서 개작(改作)과 왕릉 도굴 법인을 진범이 아닌 대마도인을 보내거나 피로인 쇄환 약속을 지키지 않아 사명대사가 일본 체재 시 알게 된 고승을 통해 약속 이행을 촉구한다.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1607년 양국간의 ‘선린우호의 상징’인 ‘회답 겸 쇄환사’가 파견된다. 이것이 훗날 ‘조선통신사’의 전신의다. 회답 겸 쇄환사는 1차에서 3차까지 현지 문물준수와 피로인 쇄환업무를 수행했다. 그리고 4차부터 ‘조선통신사’로 명칭이 바뀌면서 1811년까지 일본의 장군(지배자)이 바뀔 때 마다 파견돼 260여 년간 양국은 물론 ‘동아시아의 평화’를 가져다 준 실로 위대한 업적이었다. 그런데 이 조선통신사 파견의 계기를 부여한 인물이 바로 ‘사명대사’란 역사적 사실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사명대사의 도일은 바로 ‘침략과 저항의 시대’를 허물고 ‘평화적 선린우호의 시대’를 연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이 그를 ‘위대한 외교관’이라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박형규 원로목사는 “그 시대 노벨평화상이 있었다면 사명대사가 수상했을 것”이라며 그의 외교력을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이처럼 사명대사는 1610년 8월26일 입적하기까지 승려로서 풍전등화의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의승병을 이끌고 왜적과 분연히 맞섰고, 특히 일본에서 적장과 담판, ‘침략과 저항’의 시대를 허물고 260여 년간 동아시아에 평화의 시대를 연 혁혁한 공적을 남긴 민족의 영웅이었다. 그러나 숭유억불정책으로 그의 업적이 역사의 뒤안길에 파묻혔고 그로부터 400여 년간 봉인된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일본에 남겨진 사명대사 친필유묵 중 당시 흥성사 창건주지 엔니료젠(圓耳1559-1619) 에게 지어준 도호 허응(虛應) 과 법호 무염(無染)은 ‘자순불법록’의 기록으로 대한민국 불교역사를 연구하는데 경천동지(驚天動地)할만큼 위대하며 충남 보령의 성주사지(聖住寺址)의 선종(禪宗)을 청안(靑眼)으로 바꾸는 ‘국가유산청’의 K-한류문화 활용의 방향을 정하는 나침판이 되어 대한민국 국민에게 새로운 희망이 될 것이다.

※ 자료제공 : 표충사, 풍천임씨중앙종친회, 밀양시민신문사, 보령시장신문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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