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란 호남 의병장들 멘토 겸 의병활동을 한 해광(海狂)선생

호남의 의병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해광(海狂) 송제민(宋濟民)선생
기아문화재지킴이 B조 스터디 답사팀 운암서원 [雲岩書院]에 가다.

김오현 시민기자 승인 2023.03.30 16:22 | 최종 수정 2023.03.30 17:26 의견 0

운암서원 묘정비 앞 홍주송씨 문중 관리자 송판길 선생님과 함께 단체사진

광주 운암서원 해광집 목판
▶종 별: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31호
▶명 칭 : 광주 운암서원 해광집목판
▶소재지 : 광주광역시 북구 무등로 1040

해광집 목판은 조선시대 중기의 문인학자이며 임진왜란기에 의병활동을 한 해광(海狂) 송제민(宋濟民)(1549~1602)의 문집을 간행하기 위해 제작한 목판이다. 조선 후기(1783년(정조 7)) 간행(초간본)했다가 근대(1933년)에 중간하였고, 현재의 목판은 초간본(46매)과 중간본(8매)을 합해 전체 54매로 완질이 보존되어 있다.

운암서원 표지석(2018년 사전답사 촬영)

◆ 운암서원(雲岩書院)
해광(海狂) 송제민(宋濟民,1549~1602)은 우리 의병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아마도 ‘물염정신(해광의 백부 송정순; 화순 물염정, 세속에 물들지 말라)’을 가장 잘 실천한 사람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광주광역시 북구 화암동에 있는 조선 중기의 학자 송제민을 배향한 서원이다. 운암서원을 운암사(雲岩祠)라고도 한다. 숙종 32년(1706) 지역 유림들의 청원으로 지금의 광주광역시 북구 운암동 운암산 기슭 황계리[黃溪里;현재 동운동 동배(東背, 어릴 때 살던 곳)마을]앞산에 건립하고 조선 중기의 학자 해광(海狂) 송제민(宋濟民, 1549∼1602)을 배향하였다.

운암서원 외삼문(숭의문)에서 김오현 회장 해설

그 후 숙종 35년(1709)에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제봉(霽峯) 고경명(高敬命)의 사촌동생이자 조선 선조 때의 유생인 창랑(滄浪) 고경리(高敬履, 1559~1609), 해광의 아들 송타, 해광의 사위인 석주(石洲) 권필( 權韠;1569-1612)을 추배하고 1769년(영조45)에는 사우 중수와 함께 정우(靜友) 신필(申滭), 도계(道溪) 신한주(申漢柱)등을 추배한 서원이다.
운암서원은 고종 5년(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어 사라졌다가 1994년 해광종문회의 결의로 현 위치인 화암동 화암마을로 자리를 옮겨 1997년에 복원공사에 착공, 이듬해 8월 완공하였다. 원래 이 자리에는 운암서원을 철폐한 후 1933년에 건립했던 송제민의 재실(齋室) 영모재가 있었는데 현재는 운암서원 안에 영모재가 들어서 있는 형태가 되었다.
그밖에도 운암서원 유허비와 제4수원지 위 관광도로 동쪽에 있었던 ‘해광(海狂) 송선생지천(宋先生之阡)이라 새긴 묘비도 옮겨져 있다. 사우 부속 건물로는 내외삼문, 영모재, 장판각, 묘정비(廟庭碑)등이 있다.

운암서원유허비(雲岩書院遺墟碑)

운암서원유허비(雲岩書院遺墟碑)는 1868년 운암서원이 헐린 뒤 동운동에 세워졌는데 1987년 3월 화암촌으로 옮겼다. 비에는 1행 26자, 여덟 줄의 음기가 있으며 비갓(지붕돌 笠;삿갓립)을 갖추고 있다. 비신의 높이는 134cm이며 비갓을 포함한 총 높이는 180cm이다. 비문은 1904년 갑진년에 관찰사 김세기(金世記)가 지었고 군수 권중은(權重殷)이 글씨를 썼다.

해광(海狂) 송제민(宋濟民)영정

해광(海狂) 송제민(宋濟民)은 현 전남 담양군 장산리 장동마을(당시 담양 대곡리)출신으로 이름은 제민(濟民:건널제;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제함), 자는 사역(士役), 호는 해광(海狂), 본관은 홍주다. 그는 아홉 살에 아버지(송정황)를 여윈다. 성품이 곧은 선비 송정황은 당시의 실세 윤원형의 눈 밖에 나서 객지에서 비명횡사한 것이다. 이런 충격으로 어려서부터 아예 과거시험도 보지 않고 벼슬에 나가지 않고 학문에만 힘쓰고 속박 받는 것을 싫어해 산천을 돌아다니었다.

송제민은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 1517-1578)의 문인으로서 성리학을 연구하고 주역에 가장 조예가 깊어 심오한 경지까지 이르렀다고 전한다. 그는 스물 살이 되기도 전에 성현의 글을 터득하였고 천문, 지리, 의술 등 다방면에 조예가 깊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창의사 김천일의 전라도 의병종사관이 되어 의병에 가담하였고 ‘초모호서의병문(召募湖西義兵文)’을 지어서 각 고을에 보내 의병을 모집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실제 1592년 5월16일 김천일(金千鎰), 양산룡(梁山龍)ㆍ양산숙(梁山璹)등과 의병을 모아 6월3일 서울을 향해 북진하는 출병식을 열었다. 그 장소가 바로 나주의 금성관이다. 또 김덕령(金德齡)의 의병군에 가담하여 의병을 일으킬 것을 권유하기도 했는데 그 일화가 유명하다.

1593년8월 송제민은 모친상을 당한 외가 쪽 친척 김덕령을 찾아가 ‘나라 일이 먼저이고 집안일은 나중’이라는 의리로 설득하여 그를 의병장으로 추대하였다. 손수 제주까지 가서 군마 30여필을 구해와 의병장 김덕령의 사기를 올리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또 당시 전쟁 상황과 식량보급, 의병모집을 위한 활동을 서술하고, 일본의 재침략에 대한 예방책을 강조한 ‘상체찰사이공항복서(上體察使李公恒福書)’와 전쟁 중의 모든 일과 득실을 논한 ‘와신기사(臥薪記事)’을 저술하였다. 그런데 그 내용이 남원성 싸움(명나라 장군 양원에게 성을 지킬 방책 건의)의 실패 등 관리들 잘못을 지적한 책이라 관찰사의 미움을 사게 되었고 이후 후진양성과 농사에만 전념하며 은거생활을 영위하게 되었다.

그는 일본과 화의(和議)가 진행된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화친할 수 없는 명분과 국력을 신장하여 극복해야 된다는 이유를 역사지식으로 예증하면서 설명한 ‘척왜만언소(斥倭萬言疏)’를 올리려 했으나 이를 들은 관찰사가 만류하자, ‘경세제민(經世濟民)을 이루려 했으나 뜻을 펴지 못했으니 제민(齊民)이라는 이름대신 ’서민(庶民)‘이라는 뜻의 제민(齊民)으로 고쳤다고 한다.
임종(무안군 옥산동 별채 ; 현 함평읍 월산리 지역)때에는 나라의 원수를 갚지 못하고 죽는 것이 죄인과 다름없다하여 유족에게 박장(薄葬; 간소한 장례)할 것을 명하고 북향 4배한 뒤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1602년(선조35), 향년 54세였다.
1789년에 사헌부 지평(司憲府 持平)에 추증되었고, 광주 북구 화암동 운암사(雲岩祠)에 제향되어 있다. 광주공원내에 있는 『도원수 충장권공창의비』 왼편에 그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후손은 광주 북구 운암동, 용두동 등지에 거주하고 있다.

운암서원 운암사 전경(사진촬영 이병봉)

◆ 화암촌(花岩村)과 송타(宋柁)
운암서원이 있는 화암촌은 광산이씨들이 대대로 살고 있는 유서 깊은 마을이다. 한국전쟁 때 불타버린 이후 잣고개 아래로 집들을 옮겨지었으나 제4수원지를 건설하면서 수몰지구가 되는 바람에 다시 옛 자리를 새로 복구하는 등 수난이 많았던 마을이다. 옛날에는 마을 뒤편에 가마터가 있었던 곳으로 1966년 조사 발굴 작업을 했던 흔적이 남아있다.
마을이름을 ‘화암촌(花岩村)’이라고 한 것은 송제민의 아들 송타(宋柁, 1567-1597)가 이 마을에 살면서 집 앞의 큰 바위 주변에 백일홍 나무를 많이 심어놓고 화암당(花岩堂)이라 부르고 스스로 아호를 화암(花岩)이라 부른데서 연유한 것이다.

송타는 자가 시지(時止)로 제봉 고경명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정유재란 때 피난 중에 왜적에게 붙잡혀 일본으로 압송되어 가던 중 한산도 앞바다에 이르렀을 때 왜적의 칼을 빼앗아 배안에 있던 적을 모조리 베어 죽였다. 그러나 그 중 한 명이 창을 맞고 달아났다가 원병을 이끌고 돌아와 공격을 가해왔다. 그러자 송타는 “나는 광주에 사는 송제민의 아들인데 후일 여러분이 다행히 귀국하게 되면 부모님께 내 소식을 전해 달라”는 말을 남기고 바다에 뛰어들어 순절했다. 그때 송타의 나이는 31세였다.

이같은 사실은 함께 붙잡혀가던 창평의 진사 이신(李紳)이 수은(睡隱) 강항(姜沆,1567-1618)에게 전하여 알려지게 되었는데 석주 권필이 이를 『명행기(名行記)』에 기록했다. 화암은 뒷날 사헌부 지평(司憲府 持平)에 증직되고 운암서원에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1. 박종현, [해광집 국역본], (주)화동기획, 2002.
2. 광주광역시, [광주읍지], 태양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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