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꽃 속에 서려있는 아픈 역사의 땅-울주서생포왜성

-임진왜란 그 아픈 역사의 현장
-사명 대사의 4차례 휴전 협상
-창표사의 의로운 분들

전순희 시민기자 승인 2024.04.15 06:48 | 최종 수정 2024.04.15 08:44 의견 0

울산시 울주군 서생면 서생리에 있는 서생포왜성은 4월 초에는 벚꽃이 만발하여 많은사람들이 벚꽃명소로 찾던 곳이지만, 남해안각지에 산재하는 왜성가운데 비교적 규모가 큰 왜성으로 16세기 말기의 일본 성곽 연구에 귀중한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서생포왜성은 임진왜란 때 왜장 가토기요마사가 쌓은 왜성으로 회야강과 포구를 접하고 있어 물자와 인력수송이 용이하여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기간중 왜군의 군사주둔지로 중요거점으로 사용되었다.

왕벚꽃이 피어 봄빛을 더하고 있는 서생포왜성에서 바라본 울산 진하 바다 모습

서생포 왜성이라는 정상안내 푯말을 지나 석축앞에 첫발을 딛고 15도 정도의 산길에 우리 민초들의 피와 땀이 서려 있다고 생각하니 울컥하고 뜨거운 것이 올라온다.

임진왜란시 목숨을 잃은 56분의 위패를 모시고 있고 해마다 추향제를 지내고 있는 창표사신

임란공신의 위패를 모셔놓은 창표당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1592년 18만 대군을 이끌고 저 부산 앞바다를 쳐 들어왔던 그 날이 눈앞에 펼쳐진다.
서생포왜성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다음해인 1593년 5월 돌로 쌓은 성으로 울산문화재 자료 제 8호로 지정되어있다.

서생포는 수군 만호진을 두고 있었음에도 성을 지키지 못하고 무너졌다. 이 성은 왜장이었던 가토기요마사가 일본식 건축방법으로 4만 6천여평의 부지에 일년에 걸쳐 이 성을 쌓았다고 하는데 지금도 원형에 가깝도록 잘 보존되어있다.

서생포왜성의 내성 입구에 성의 구조가 안내되어있다
읍성의 구조와는 완전히 다른 서생표 왜성의 엇갈려려있는 내성입구

서생포왜성에서 왜군이 물러간 것은 선조31년인 1598년 11월, 이 곳에서 사명대사와 가토 기요마사가 4차례 평화교섭을 했고 가토 요구는 강경하여 회담은 무위로 끝나게 되었다. 왜는 협상이 결렬되자 약 14만병력을 동원하여 재차 침략을 해왔고, 명나라에서 마귀를 제독으로 5만 5천여 명의 원군을 보내왔고, 조명 연합군이 일본군을 대파하였다. 왜군은 더 이상 북상하지 못했다.

1598년 8월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일본군은 철수를 하였다.
일본군이 물러간 뒤에 서생포왜성의 외성에 조선수군의 동첨절제사영으로 300여년 사용하였다.

산 정상부로 올라갈수록 뚜렷한 왜성의 모습
천수각은 3층으로 추계단 앞의 장군수 추정지있는 푯말

서생포왜성 성벽은 60~70도 정도의 기울기를 가지며 정상부로 계속되다가 출입구까지 연결되며, 꺽이는 모서리부분은 전체적으로 상하선이 곡사선 형태로 처리되어 있다. 자연적을 난적하고 그틈을 잔돌로 메우는 방식으로 되어있다.

한 때는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던 적이 있는 서생포왜성은 400여년전 이곳에 성을 쌓고 만족과 성취감으로 웃었을 왜장과 우리 민초의 고단한 삶이 느껴지는 이곳,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아픈 역사가 스며 있는 곳이다.

대마도 보일 듯한 맑은 날, 아름답기만 한 진하바다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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