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는 선사시대부터울릉도의 생활권이었다.

독도를 이해하는 또 하나의 이론

윤명철 논설위원 승인 2024.04.20 17:02 | 최종 수정 2024.04.21 11:16 의견 0

독도는 선사시대부터 울릉도의 ‘생활권’이었다.

2월 22일은 일본이 주장하는 ‘다께시마의 날’이다. 동해라는 망망대해의 한 가운데 돌섬이 홀로 있다. 그래서 ‘석도’라고도 부르고, ‘독도’라는 이름도 있다. 그 이전에는 武陵島 三峯島 子山島 干山島 라는 이름들이 있었다. 그런데 일본은 러일전쟁의 틈을 타서 1905년 2월 22일에 독도를 강제로 시마네현으로 편입시켰다. 그리고 2005년부터 ‘다께시마의 날’을 만들어 기념하고 있다.

일본은 부지런하게 독도가 자국영토임을 주장하는 많은 논리를 만들고, 국민들에게는 물론이고, 세계를 향해서 끊임없이 홍보를 한다. 물론 여기에는 다양한 목적들이 있다. 물론 우리도 이러한 작업들을 많이 해왔고, 10월 25일을 ‘독도의 날’로 제정했다.

독도를 놓고 한일 간에 소위 영유권 문제가 시작된 것은 대한민국이 1952년 ‘대한민국 인접해양의 주권에 대한 대통령 선언’(평화선)을 했고, 일본이 이에 발발하면서부터였다. 실은 1998년에 ‘신한일어업협정’을 맺는 과정에서 일본은 독도의 영유권 문제를 연계시키려 했으며, 실은 그 협정 내용 때문에 몇 가지 예민한 문제들은 있다.

나는 역사학자의 입장에서 몇 가지 색다른 이론을 적용하여 이미 선사시대부터 울릉도와 독도가 우리의 영토였다는 주장을 했다. 그런데 이러한 이론들이 정교해지고, 세계에서 설득력을 가지려면 몇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첫째, 울릉도와 독도는 하나의 섬 시스템 속에서 파악해야 한다. 둘째, 해양문화의 메카니즘을 적용해야 한다. 셋째, 한국적 관점, 한일 관계적 관점이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의 역학관계라는 관점에서 파악해야 한다. 다섯째, 현재 및 미래적 가치를 구체적으로 염두에 두어야 한다. 여섯째, 어쩌면 가장 중요한 조건인데, 국내학자들도 이러한 이론과 주장에 힘을 실어줘야 한다.

육지인들은 오해가 많다. 독도가 육지나 울릉도에서도 멀리 떨어졌고, 주민이 상주하지 않으므로 울릉도와 무관했던 섬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일본인들은 독도는 물론 울릉도조차 사람이 살지 않았었고, 조선시대 말기에야 개척되었다는 주장을 한다. 하지만 울릉도에 사람이 산 것은 늦어도 기원을 전후한 시기부터이다. 이 사실은 섬의 여러 곳에서 발견된 무문토기나 고인돌, 제사 유적지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512년에 신라의 ‘김이사부’가 이 곳을 점령한 후에 우산국이라는 명칭으로 역사에 등장했다. 이후 울릉도는 고려 전기부터 고려 정부의 직접 지배를 받았다. 조선시대에는 ‘울릉(鬱陵)과 우산(于山)은 모두 우산국(于山國)의 땅이다.’라는 세종실록지리지 등의 기록처럼 우리 영토이며, 독도가 울릉도의 부속도서라고 인식했다.

‘陸地人’이 아닌 이들은 생활방식, 공간관, 거리감각, 기술력 등, 특히 생필품을 획득하는 방식이 다르다. 따라서 활동하고 이용한 해양공간 또한 육지 또는 농경 문화권에서 인식하고 활용하는 ‘공간관’과 다른 점이 많다. 그러므로 해양의 역사활동과 인문환경은 해양인의 관점에서 공간과 역사, 생활양식과 문화 등을 살펴보아야 한다.

나는 울릉도와 독도는 초기부터 동일한 어민들이 사용한 하나의 어장, 즉 ‘生活圈’이었다고 주장했다. 독도 해역은 수산자원이 풍부한 어장이다. 망망대해의 유일한 육지이니 그 둘레에 얼마나 생명체들이 서식했겠는가? 온갖 종류의 어류와 고래 물개 등의 포유류들, 괭이 갈매기 등의 조류들이 기대에 생존을 유지해온 고마운 생태계였다. 따라서 농사를 짓기 힘든 울릉도 주민들에게 독도는 선사시대부터 가장 중요한 식품획득 및 상업 공간이었다.

독도가 울릉도 어민들의 어업 범위, 즉 생활권에 있음을 확인하는 방법이 또 하나 있다. 두 섬 간의 항해거리와 항해방식, 항해 가능성의 정도 등을 분석하면 전근대 시대에도 생활권에 있었음을 살펴볼 수가 있다. 시인거리를 적용하면 약 100km 떨어진 독도에서는 울릉도를 항상 볼 수 있다. 반대로 울릉도에서 독도를 쉽게 바라볼 수가 있다. 따라서 현장의 해양 현상과 초보적인 천문항법 등을 숙달한 어부들에게는 가치가 높은 어업현장이었다.

또한 울릉도와 독도는 동아시아 역사, 특히 한민족이 해양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동해 항로상에서 항해민들이 피항이나 항로를 관측하는 데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1쌍의 공간이었다. 고구려는 일본열도에 공식적으로만 12번의 사신을 파견했다. 신라인들은 건국 초기부터 영일만, 울산만 등을 출항해서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오끼제도와 시마네현에 도착했다. 이들은 당연히 독도 해역을 경유했다. 발해는 일본국에 34차례의 사신단을 파견했다. 그 때 사용한 동해종단 항로, 동해북부 사단항로는 망망대해의 중간인 울릉도와 독도를 항해의 물표나 피항, 또는 정거장으로 활용해서 원양항해를 할 수밖에 없었다. 필자는 1998년에 발표한 <발해의 해양활동 연구>라는 논문에서 동해에서 원양항해로서 항해가능한 범위를 계산했고, 그 결과 울릉도 독도의 역할이 절대적이었음을 확인했다. 고려 전기에 여진 해적들은 울릉도를 약탈했었는데, 이는 동해 북부에서 연결되는 항로가 있었다는 반증이다.

이러한 상황은 근대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동해는 러시아의 태평양 및 동남아시아로 나가는 출구에 해당되는 국제해역이며, 지금은 일․러, 일․북한 간의 항로로 이용된다. 이때도 역시 울릉도와 독도는 역시 동해 항로상에서 중간거점이다. 일본과 러시아는 1897년 이후에 본격적으로 조선의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해 갈등과 충돌을 벌였는데, 그 중요한 현장이 울릉도와 독도였다. 그래서 러일 전쟁 도중에 이미 독도는 일본 시마네현의 소속으로 바뀌었고, 러․일 전쟁의 최후전투도 울릉도의 도동 앞바다에서 일어났다.

해양문화의 담당자들인 어민이나 항해자들은 중앙정부와 거리를 두는 ‘무정부성’과 기록을 남기지 않는 ’불보존성‘ 등의 특성이 있다. 따라서 역사기록은 없지만 이러한 해양문화의 메카니즘과 ‘생활권’의 개념을 적용하면 울릉도와 독도는 한 쌍으로 우리민족이 동해에서 해양활동을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으며, 특히 울릉도 주민들에게는 중요한 어장인 생활권임을 화인할 수 있다.

독도는 지금도 해양영토의 깃점, 군사전략적 측면, 고래 해달 강치 생선 등의 수산자원, 메탄수화물(Gas-Hydrate) 등으로 인하여 중요성이 더욱 커지는 중이다. 만약 독도 연구도 안 이루어지고, 독도 생활화 운동도 펼치지 않고, 정부도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대책을 마련하지 않는다면 독도는 또 다시 외로운 섬이 된다. 그렇다면 급하게 변동하는 동아시아의 국제질서 속에서 일본의 속내와 계략대로 분쟁지역으로 탈바꿈하고, 어쩌면 양보할 지경에 이를지도 모른다.

동해로 들어가 독도를 돌아볼 때 마다 늘 여러 생각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사라진다. 그래도 늘 한결같은 마음은 경외심이다. 독도는 망망대해의 한 중심이며, 동해라는 시공에서 유독 홀로 서있는 존재이다. 독도가 없었다면 동해도 외롭고, 그곳을 오고가는 뱃사람들도 외롭고, 괭이갈매기도 외로웠을 것이다.

독도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 해양사
한국해양정책학회 부회장

<한국해양사>, <고구려 해양사>, <윤명철 해양논문 선집 ( 총8권)> <장보고 시대의 해양활동과 동아지중해>< 고조선 문명권과 해륙활동> < 해양사연구방법론>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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