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아국가유산지킴이는 비가 오는 날에도 굴하지 않고 봉사활동을 강행하다.

- 비 오는 날에도 굴하지 않는 기아국가유산지킴이의 열정

- 정해진 일정에 맞추는 책임감과 사명감

한병기 승인 2024.04.21 21:22 의견 0
비오는 날에도 봉사활동에 참여한 기아국가유산지킴이(사진 고경임)

4월 21일, 벽진서원 정기 봉사활동 날. 며칠 전부터 쏟아지는 비에 밤잠을 설치며 봉사활동이 무산될까 걱정했던 기아국가유산지킴이들은 아침에 눈을 뜨자 촉촉하게 젖어 있는 대지에 마음이 흔들렸다.

계단은 장비로 할 수 없어 수세미와 장대 솔로 제거 작업중인 회원들(사진 김현정)

비 오는 날 진행 여부를 놓고 회원들 사이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잇따랐다. 하지만 정해진 날짜를 낭비할 수 없다는 책임감과 봉사활동에 대한 열정으로 기아국가유산지킴이는 활동을 진행하기로 했다.

회원 가입 후 처음 해보는 봉사활동인데 비 맞고 열심히 봉사하는 신입회원(사진 김현정)

비 오는 날에도 굴하지 않은 열정으로 12명의 기아국가유산지킴이는 벽진서원의 요청에 따라 계단(대리석)에 묶은 때 제거 활동을 시작했다. 비가 많이 오는 상황 속에서 숭본당에서 스터디를 진행하는 대안도 고려했지만, 정해진 활동을 이어나가기로 했다.

급조한 비닐봉지 우의를 입고 봉사활동중인 기아국가유산지킴이 회원들(사진 김현정)

전동 부러시(전문업체에 대여)를 사용하여 평평한 곳의 때를 제거하고, 계단은 철 수세미를 사용하여 사람이 직접 닦아내는 꼼꼼한 작업을 진행했다. 비가 도움이 되지 못할까 우려했지만, 어제부터 내린 비로 인해 불어 오른 때는 약품을 사용하여 더욱 쉽게 제거할 수 있었다.

처음으로 잡아보는 전동장비이지만 능수능란하게 활용중인 민병옥사무장(사진 김현정)

비닐봉지로 급조한 우의를 입고 쓸려내러 가는 때를 보며 회원들은 25년 만에 처음 진행되는 때 제거 작업에 큰 보람을 느꼈다. 특히 올해 처음 가입하여 처음 참여하는 회원은 뿌듯함과 감동을 감추지 못했다.

계단의 묶은때를 철 수세미로 제거중인 기아국가유산지킴이(사진 김현정)

비 오는 날에도 굴하지 않은 기아국가유산지킴이 회원들은 끈기와 협력으로 벽진서원의 계단은 깨끗하게 새 단장을 하게 되었다. 처음으로 묶은 때 제거 활동을 진행하지만 늘 해온 것처럼 봉사활동은 단순히 때를 제거하는 것을 넘어, 기아국가유산지킴이에게 깊은 감동과 보람을 선물했다.

묶은때 제거전의 모습(사진 고경임)
묶은때 제거 후 모습(사진 고경임)

『광주의 도로명 “회재로” 2009년 행정안전부는 광주 남구 칠석동에서 백운동 동아병원 앞까지 이어지는 4~6차선 도로를 ‘회재로(懷齋路)’로 명명했다. 길이 12.98㎞로 광주에서 가장 긴 도로다. 이 도로가 시작되는 전남 나주시 남평읍까지 확장하면 총연장은 15.534㎞에 달한다.

회재로의 명명 연원은 조선 시대 중기 문인으로, 임진왜란 때 호남 의병을 일으킨 회재 박광옥(1526~1593) 선생이다. “광주 출신인 회재 박광옥 선생의 충의정신과 학덕을 기리기 위해서 그의 호를 따서 회재로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가 ‘의향(義鄕)’ 광주의 상징적 인물이라 할 수 있다.

회재 박광옥 선생(1526~1593) 영정

회재 박광옥은 관직을 그만두고 낙향한 지 3년 만인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경명(1533~1592), 김천일(1537~1593)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김천일은 회재에게 편지를 보내 “한편은 전장에 나가고 한편은 지방에서 방비하는 것이 국가를 위하는 일이다. 기반이 흔들리면 이 일을 수행하지 못할 것이니 우리가 앞장서서 싸우는 것은 오직 공의 협조에 달렸다”고 회재의 공을 높이 평가했다. 회재의 후방 지원이 그만큼 절대적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본인도 고령(당시 67세)임을 알고 직접 전장에 나설 수 없게 되자, 사재를 털어 ‘의병도청(義兵都廳)’을 설치하고 무기와 군량을 모아 조달하는 일을 맡았다. 권율의 ‘이치전투’와 ‘행주산성’의 전투 당시 연고가 없는 전라도 의병들이 대거 참여했는데, 이는 회재가 이들을 모집하고 군량을 지원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선조는 그를 “호남의 충의신(忠義臣)”이라고 극찬하고 나주 목사로 제수했다.

회재 박광옥은 낙향 후 서당을 세우고 향교 중수에 참여하는 등 지방 교육 발전에도 힘을 썼다. 조선 성리학의 대가인 고봉 기대승(1527~1572)과도 학문을 논하고 우정을 쌓았다. 그는 특히 당대 호남의 3대 갑부 중 한 명이었지만 재산을 불리기보다 그것으로 구휼하는 데 더 큰 가치를 뒀다. 실제 그는 매월ㆍ벽진마을 백성들이 가뭄으로 고통받자 개산 남쪽의 물을 끌어들여 둑을 쌓아 ‘개산방죽’(현 전평제 광주 서구 매월동 519-1)을 만들었다.

한평생 출세를 위해서 높은 벼슬아치의 문 앞을 찾아가지 않았고 부임하는 고을마다 먼저 향약을 세워 청년들을 가르쳤다. 그야말로 선비관리였다. 관직에 있으면서 잘 먹고 잘 입고 살 법도 하지만 근검절약하는 검덕(儉德)이 생활신조였다. 회재 박광옥 선생은 나라에서 주는 녹봉밖에는 아무것도 더 취하지 않았다. 내 것이 아니면 손대지 않고 그것을 누구에게 주지도 않았다. 아는 지인들이 자리 부탁을 하면 크게 꾸짖었다. 젊어서 늙음에 이르기까지 의관을 정제하고 무릎을 꿇고 책을 놓지 않았다. 특별히 문장에 뜻을 두지는 않았으나 문장이 중후하고 아름다워 옛 문장의 정취가 담겨있고 필법이 자유분방하였다.

만년에는 더욱 주역, 계몽, 가례 등 글에 힘써 통달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기대승 선생과는 교우하였고, 사암 박순, 옥계 노진과도 우의가 깊어서 서로 존경하는 사이로 지냈다. 몸소 노불레스오불리주를 실천한 광주의 큰 인물중의 하나다.』

참고문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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