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의 위대한 백의종군 정신

출옥에서 합천까지

노승석 전문위원 승인 2024.04.25 06:52 | 최종 수정 2024.04.25 15:13 의견 0

국보 76호 난중일기 소유자 최순선 제공, 문화재청 현충사 사진

임진왜란의 역사에서 가장 큰 활약을 했던 이순신의 업적을 후대의 학자들이 ‘중흥(中興)의 대업을 이룬 것’이라고 평가하였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그가 겪은 시련과 고통은 범인이 감내하기 힘든 파란만장한 것이었다. 1596년 윤8월 조명일간의 강화협상이 결렬되자, 일본은 이듬해 재침준비와 함께 이순신을 제거하기 위한 모략을 꾸며 이순신은 결국 모함에 빠지고 말았다.

이해 12월 부산에 도착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요시라(要時羅)를 시켜 현재 일본에 있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조선에 올 때 요격하라는 거짓 정보를 권율에게 전했다. 이에 조정이 이순신에게 출동을 명했지만, 이순신은 그것이 거짓임을 알고 “어찌 전쟁을 시험 삼아 하겠냐”며 작전상 출동을 미루다가 끝내 출동하지 않았다.

이에 선조는 1597년 2월 6일 이순신을 체포하라는 명을 내려 3월 4일 이순신이 왕명거역죄로 삼도수군통제사직에서 파직되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12일 이순신이 문초를 받고, 13일 선조는 임금을 속인 자는 용서할 수 없으니 극형에 처하는 문제를 논하도록 대신들에게 지시하였다. 이때 이원익과 정탁 등 대신들과 이순신 휘하 장수들이 구명운동을 벌였다. 그 결과, 선조는 그간 이룬 공로를 참작하여 이순신에게 원수의 막하에 가서 백의종군(白衣從軍)하라는 처분을 내리고 사면하였다.

본래 백의(白衣)의 사전적 의미는 평민신분의 뜻인데, 여기서의 백의종군은 관리가 죄를 지어 면직 처분을 받은 상태로 종군하는 것을 뜻한다. 송나라 때 사마광의 《자치통감(資治通鑑)》〈당기(唐紀)〉를 보면, “당나라 때 청주자사(青州刺史) 유인궤(劉仁軌)가 해운을 감독하다 배를 전복시키자, 백의종군으로 스스로 공을 세우게 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미 오래전부터 백의종군이 관리가 면직된 신분으로 종군하는 뜻으로 사용된 것을 알 수 있다.

이순신은 3월 4일에 투옥되었다가 4월 1일 옥문을 나온 날부터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되는 8월 3일 직전까지 120일 간의 백의종군의 여정에 오른다. 이때 그간 옥중에서 쓰지 못한 《난중일기》를 다시 쓰기 위해 다시 붓을 들었다.

필공(筆工)을 불러 붓을 매게 했다. 저녁에 성으로 들어가 재상(유성룡)과 이야기하다가 닭이 울어서야 헤어지고 나왔다.

-《난중일기 》1597, 4, 2-

3일 이순신은 백의종군하러 가기 위해 남쪽으로 길을 떠났는데, 과천 인덕원을 지나 이름도 모르는 병사의 집에서 자고, 곧장 아산에 있는 부친의 묘소에 가서 절하며 곡하고, 그후 조상님과 장인 장모의 사당에 들러 멀리 떠나감을 고유(告由)하였다. 이때 여수에서 아산으로 올라오던 어머니의 사망소식을 듣고 아산 해암(蟹巖, 게바위)에서 어머니의 시신을 영접하고 아산 집으로 돌아와 초상(初喪)을 치룬 뒤 남행에 나섰다. 4월 5일부터 19일까지 아산에 머문 15일 동안은 이순신의 일생에 있어 가장 절망적이고 참담한 시기이었다.



“나와 같은 사정은 고금(古今)에 둘도 없을 터이니, 가슴 찢어지듯이 아프다. 다만 때를 만나지 못한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난중일기》1597, 5, 5

그후 이순신은 민가와 관노(官奴)의 집을 전전하며 합천을 향했다. 순천의 빈 동헌에 앉아 비통함을 드러내기도 하고, 때로는 지방관리가 원균의 비행을 전하여 전세의 위태로움을 느꼈다. 5월 15일 구례의 손인필의 집에 묵을 때 파리 떼들이 달려들어 밥을 먹을 수 없어 거처를 옮기고, 26일 이정란의 집에 갔다가 문전박대를 받고, 6월 1일 늦게 단성의 박호원의 농사짓는 노비집에 투숙하여 누추한 밤을 간신히 보냈다.

삼가현에 도착하여 현감이 없는 빈 관아에서 유숙하는데, 고을 사람들이 밥을 지어 와서 먹으라고 하나 이순신은 종들에게 먹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종들은 이순신의 분부를 어기고 고을사람들의 밥을 얻어먹었다. 이 사실을 안 이순신은 종들을 매질하고 밥한 쌀을 되돌려 주었다. 이순신은 상황이 아무리 궁할지라도 백성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일은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

그후 4일 이순신이 합천에 도착하자 멀리 적포들에 있는 권율 진영의 수(帥)자 기(旗)가 보였다. 8일 드디어 영전진에서 도원수 권율을 만나 이야기하고 복병 파견에 대한 공문을 보며 작전업무를 도왔다. 선조로부터 백의종군 처분을 받고 남행한 지 67일 만에 임무를 수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순신이 출옥한 이후부터 합천에 도착하기까지 보여준 정신은 인간으로서 감내하기 힘든 최악의 상황에서도 국난극복과 신하의 도리를 실현하기 위해 결코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백절불굴의 강한 의지를 보여준 점에서 가장 위대한 것으로 평가한다.

ICPSCⓒ?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