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창천에 흐르는 양무공의 충의(忠義)

박연정(博淵亭)을 찾아서

장창표 논설위원 승인 2024.04.25 18:56 의견 18

밀양 시청에서 자동차로 대구·청도 방향의 국도 25호선을 따라 15분쯤 달리면 상동역이 나온다. 이곳에서 조금 더 가서 산모롱이를 돌아 오른쪽으로 나 있는 고정·신곡 방향의 강변길을 따라 곧장 3〜4분쯤 가면 상동면 고정리 모정(慕亭)마을 입구에 이른다.

주말을 이용해 경북 청도와 밀양 상동을 경계로 흐르는 동창 강변의 모정마을 입구에 있는 임진왜란 일등공신 양무공(襄武公)의 충의가 깃든 박연정(博淵亭, 경상남도 문화재자료)을 찾았다. 아름다운 동창천 언덕에 고즈넉이 자리한 박연정의 주인공은 조선조 선조〜광해군 때의 무인(武人) 박연 김태허(金泰虛, 1555~1620) 장군이다. 처음에는 문인(文人)의 길로 가다 약관(弱冠)이 넘은 나이에 무예를 익혀 27세에 무과에 급제한 후 38세에 임진왜란을 만나 7년 전쟁을 다 치러 낸 인물이다.

장군의 본관은 광주(廣州), 자(字)는 여실(汝實), 호는 박연(博淵)이다. 시호(諡號) 양무(襄武)는 ‘적을 토벌하여 공을 세움을 양(襄)이라 하고, 적을 무찔러 모욕을 당치 않음을 무(武)’라고 하였다. 자호(自號) 박연(博淵)은 젊은 시절에 자사(子思, 공자의 손자)가 쓴 중용(中庸)을 읽다가 ‘넓고(博) 깊은(淵) 연천(淵泉)이 때맞춰 나온다.’라는 구절이 좋아서 호로 삼았다고 한다.

박연정 전경

산관(散官, 일정한 사무가 없는 벼슬)으로 울산에 있을 때인 1592년(선조 25) 왜군(倭軍)이 부산에 상륙하여 북진하니 당시 고을 수령과 병사들은 백성을 버리고 도망을 가고 나라가 위기에 처해 있자 장군은 도망친 장졸 3,000여 명을 불러 모아 수군과 육군으로 대열을 정비하여 수륙(水陸) 양면작전으로 왜적의 선봉대를 무찌르고 왜군의 진로를 격파하였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울산군수(蔚山郡守)가 되어 경주, 진주, 창원 등지에서 부대를 이끌고 왜병을 막아 영남의 좌측에 있는 고을들을 안전하게 사수하였다. 여러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둔 공(功)으로 품계가 자헌대부(資憲大夫, 정2품) 도총관(都摠管, 오위도총부의 군무 총괄)에 올랐다. 안무사(按撫使, 재난 시 백성을 보살피는 임시직) 이상신(李尙信)이 장군의 공적을 기록하여 조정에 보고하니, 나라에서 후한 음식과 포목(布木, 베와 무명)을 하사하여 군사들의 사기를 드높이고 장군은 원종일등공신(原從一等功臣)에 녹훈되었다.

박연정은 장군이 임란이 수습된 다음 충청병사와 오위도총관을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자연을 벗 삼아 시(詩)를 읊고 세상사를 논하며 여생을 보내기 위해 세운 별업(別業)이다. 본래 이곳은 조선조 명종 때 능성현감(綾城縣監)을 지낸 이 고을 출신 이담용(李聃龍)의 별업인 관란정(觀瀾亭)의 옛터였으며, 신라 시대에는 지대(支待)라는 당나라 장수가 진(陣)을 치고 있었다는 전설이 전해오는 곳이다. 임란 때 관란정이 불타 폐허가 된 이곳에 1613년(광해 5) 정자를 지었다. 장군이 이곳에 머무는 동안 조정에서는 여러 번 더 높은 벼슬을 제수(除授)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니, 사람이 나아 갈 때와 물러날 때를 아는 참된 선비정신을 일깨워 준 그의 발자취가 깃든 곳이기도 하다.

박연정

1660년(현종 1)에 장군의 손자인 김부호(金富鎬)가 경내를 확장·정비하여 정당과 충의문(忠義門)을 중창하였다. 그러나 1682년(헌종 8년)에 화재를 당하여 170여 년 동안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가 1864년(고종 1년)에 9세손인 현감 김난규(金蘭奎)가 중건(重建)하였다. 1938년에는 후손들의 정성으로 충의문이 중건되었고, 1965년에는 새로이 사당인 추유재(追裕齎)를 세웠다. 정자 북쪽에는 수어대(數漁臺)가 있고, 강가의 깎아지른 벼랑 끝에는 빙허대(憑虛臺)가 있으며, 그 위에는 만년송(萬年松)이라는 희귀한 노송(老松)도 있어 주위의 수려한 경관과 함께 박연정의 운치를 더해준다.

약 2,000년 전 미리미동국과 이서국(伊西國, 청도의 옛 이름)에서 서라벌로 오가던 옛길을 밟고 서 있는 박연정(博淵亭) 강변에는 해오라기 노닐다가 자맥질하고 이름 모를 물새가 노래도 부른다. 운문산 봉우리에 놀던 구름도 호수 위를 떠돌다가 동창천을 적시면서 장군의 충의(忠義) 앞에 머리를 조아린다. 비슬산과 운문산에서 발원한 청도천과 동창천이 박연정 발치 아래 휘돌고 감돌아서 밀양강 두물머리에 넓은 벌판을 이룬다.

또한, 이곳은 청도가 낳은 시조 시인 이호우와 이영도 오누이가 강 건너 밀양 땅에서 소꿉놀이하면서 문학의 꿈을 키워온 곳이기도 하다. 시인의 생가(生家)는 모정마을에 있어 오누이 시조 시인은 아낙네들 소라 잡고 종달새 노래하는 강기슭 갈대밭에 휘날리는 바람 소리 들어가며 옛 시인이 뜯어내는 비파(琵琶)소리에 잠시 잠이 들었다.

장수는 전장에 나아가 죽어야만 충신이 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살아남아 적을 물리치고 도탄(塗炭)에 빠진 나라를 구하는 것이 진정한 충성이라 여기고는 이 땅에 태어난 이 한 몸이 천명(天命)을 다하여 이 강토와 우리 백성을 온전히 지키고자 임진왜란 7년 내내 전장(戰場)을 누비신 분이 장군이시다. 문무(文武)를 겸비한 선비의 대도(大道)를 걸어가신 우리 고장의 큰 어른이신 양무공의 높은 충의(忠義) 앞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수어대와 빙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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